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립 Mar 09. 2021

면접, 답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야 하는 이유

면접은 지극히 수직적인 관계맺기다. 어디에서, 언제, 어떤 방식으로 만날 것인가에 대해, 피면접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무엇을 질문할 것인지, 어떤 기준으로 심사할지, 또 그것에 대한 정보를 어느 수준까지 먼저 공유할지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면접자에게 있다. 누군가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원하는 만큼 뜯어보고, 나는 그것을 어쩔 수 없이 허용해버린다. 그렇게 한쪽이 한없이 무력해지는 관계이지만, 그런데도 누구나 어느 시점에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허들이다.




운이 좋았다. 스물 다섯이 될 때까지 단 한 번의 면접도 없었다. 대학을 갈 때에도 수시는 서류에서 광탈한 탓에, 정시는 면접이 없는 전형이었던 이유로 절차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반면 면접자로서의 경험은 있었다. 고등학교 동아리 회원을 뽑는 일이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문학동아리였다. 나는 (이때도) 면접없이 동아리 회원이 되었는데, 2학년이 되어 신입 회원을 뽑을 때에는 생각보다 지원자가 많아서 어떤 방식으로든 선발 절차를 거쳐야 했다. 나름 서류 심사도 하고, 1차 선발 인원을 대상으로 면접도 봤다.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지, 최고의 책은 무엇인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와 같은 평범한 질문들로 진행되었다. 


문제는 마지막 질문이었는데, 지원자의 '시적 감성'을 판단하겠다는 목적으로, 우리는 주변에 보이는 사물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이것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나요?"와 같은 즉흥적인 질문을 던졌다. 일종의 프리스타일랩인 셈이다. 질문이 갑작스러웠기에 대답도 당연히 천차만별이었는데, 하필이면 그것이 '마지막 질문'이었던 탓에 어린 면접관들의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구절 하나만 던지면 그 전의 모든 답변들은 잊혀졌다. 일례로, 교실 천장에 달린 선풍기를 보고 '축 늘어진 시체같다'고 대답한 한 친구는 단 번에 면접 점수 상위로 올라가며 신입 동아리원이 되었다. 그 표현이 뭐가 좋았던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설픈 면접 진행의 경험은 독이 됐다. 뭐랄까, 면접을 가벼이 여기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크게 긴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될 수 있겠지만, 해야 할 최소한의 긴장조차 없었다는 점에서 독이었다. 


그 독이 나를 푸욱 찌른 건, 스물 다섯이었던 대학교 3학년 겨울이었다. 광양에 위치한 P사 제철소에서 한 달간 인턴을 했다. 지금 같으면 대기업에서 인턴을 하는 것 자체로 몇 단계의 면접 전형을 거쳐야 할 텐데, 당시 인턴십은 몇 개 대학 특정 학과에 전달된 추천서를 기반으로 했기에 인턴 선발의 면접 절차가 생략되었다. (이 놈의 행운!) 아마도 P사는 당시 떠오르던 '통섭'의 키워드를 고려해서 다양한 전공의 신입 사원을 뽑고자 했던 것 같다. (나는 철학을 전공했다.)


한달의 인턴 생활이 끝난 뒤에는 2:1의 경쟁률로 정사원을 선발했다. 2차례에 걸친 면접 전형을 거쳤다. 예비 4학년을 대상으로 한 전형이었기에, 남은 2학기의 학비 지원과 방학 기간을 활용한 해외 연수 지원 등 메리트가 상당했다. 무엇보다도 졸업을 1년이 넘게 남겨둔 상태에서 이른바 '취업보험'을 들어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전체 몇십명의 인턴들 중 첫번째로 면접을 봤다. 면접 순서는 서류 전형의 점수 순위인 게 아니냐고 주변에서는 얘기했는데, 나는 손사레를 치면서도 내심 기대감에 부풀었다. 당시는 학점도 상당히 좋았던 때라, 진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면접을 망치고 시원하게 탈락했다. 특히 두번째 면접은 가관이었다. 면접관은 얼핏 보기에도 90년대 보수정당의 대표처럼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는 차가운 인상의 임원이었다. 몇 가지 질문과 대답이 오간 후, 그는 내게 미국 어학 연수 경험을 토대로 '한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를 영어로 말해보라고 했다.


그때부터였다. 평탄하고 매끈해야 할 시간이 한 쪽 끝에서부터 돌돌 말리기 시작했다. 영어 면접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아니, 사실은 면접에 대해 아무것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나는, 잘 떠오르지 않는 영단어들을 엉망으로 나열하기 시작했다. "미국 문화는 한국보다 수평적"이라는 말을 어찌저찌 내뱉고 보니 연관된 낱말들이 아무렇게나 튀어나왔다. 미국이었으면 나는 당신의 이름을 친구처럼 불렀을 것이라는 둥, 보수적인 대기업 임원이 딱 싫어할 말을 버벅거리며 지껄이는 내 자신이, 육체에서 영혼이 이탈한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제 3자가 되어 보이는 듯 했다. 쟤 왜저래.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학원에서 잘만 떠들어댔던 영어 한 문장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해 더듬거리던 나는, 면접을 앞두고 급하게 맞춘 정장도 몸에 잘 맞지 않아서 자켓의 짧은 팔 밖으로 삐져나온 하얀 셔츠 손목을 펄럭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불안을 증명하듯 양손을 허공에 휘적거렸고 면접자의 시선은 그 손목을 안쓰럽다는 듯, 혹은 실망스럽다는 듯 응시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나는, 면접 말미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미국에서 막 돌아왔을 때는 영어를 잘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말이 잘 나온다."며 변명하기까지 했다. 


방을 나오면서, 나는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리고 떨어졌다. 탈락 자체는 금세 잊혀졌지만 그 면접의 기억은 박제되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러움에 어디론가 숨고 싶어진다. 삐걱대며 잘 돌아가지 않던 내 머리대신 연신 돌려대던 손, 그 손을 반쯤 덮은 하얀 셔츠, 자켓 소매 밖으로 삐져나와 구겨진 셔츠 소매, 그걸 바라보는 P사 임원의 눈. 한심하다는 듯한 그 눈.


그 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그냥 나의 모국어로 하고 싶은 말을 해야지. 영어로는 생각이 안나니까 한국말로 하겠다고, 뽑는 말든 그건 네 맘인데 쪽팔리고 싶지는 않다고. 탈락은 하더라도 최소한 자존감이 무너지지는 말아야겠다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십 수개의 지원서를 썼다. 서류를 통과한 게 대략 삼할, 최종 면접을 본 건 네 곳이었다. 영어 면접은 딱 한 군데였는데,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다.


지원자 5명이 한 조에서 면접을 봤다. 면접관은 4명이었는데, 입사 후 보니 4명 모두 입사할 부서의 직원들이었다. 영어 질문은 마지막이었고 나는 가장 왼쪽, 그러니까 첫 번째 답변자였다. "동료 직원이 회사 생활에 적응하기 못해 힘들어하고 있다면, 당신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이었다. 눈 앞이 하얘졌다. 너무 어렵잖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리 직무가 HR이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그 순간 2년 전의 상처가 되살아나며 창피함의 대상이 내 자신과 면접관 2인에서 내 옆에 앉은 4인과 면접관 4인까지 분대 하나 규모로 늘어났구나, 하는 생각에 온 세상이 까맣게 물들었다.


지금 이 질문에 답변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면접에서 (면접관이 아닌 지원자 주제에) 질문을 던졌다.

"죄송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금 있다가 답변드려도 될까요?" 

편안한 한국말로 또박또박 물었다. 면접관은 크게 어려운 요구가 아니라는 듯, 그렇게 하라고 했다.


대답의 의무를 가진 자가 되려 질문을 던지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마지막 순서로 답변할 기회를 얻었고, 다른 지원자들이 대답하는 동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경영학과 수업에서 들었던 '자기효능감'이라는 단어도 슬쩍 끼워넣어 HR직무에 관심있는 척도 했다. 결과를 떠나서 내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면접이 되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모국어처럼 반사적으로 말하기 어렵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안되는 것을 되는 척 하려다 상황이 엉망이 되면, 비로소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된다. 면접은 아주 일방향적인 소통이어서, 묻는자와 대답하는 자가 정해져 있다. 권력은 한 곳에 집중되어 있어서, 답변을 요청받은 피면접자는 어떻게든 면접관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한 부담을 짊어진다. 그래서 때로는 스텝이 꼬이고,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를 놓치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 비난하게 된다. 


어떤 수직적인 관계라도 최소한의 소통은 가능하다. 아니, 가능할 수도 있다. 어쨋든 필요한 요구는 시도해보는 것이 좋다. 내 역량 이상으로 상대를 만족시키려다 실패하느니, 조금 용기를 내보는 것이 낫다. 나와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나와 함께 일하게 될 그들에게도, 그들과 함께 일하게 될 나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