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팀에서 일하던 10년 전에, 인사 상무 K는 유난히 나를 아꼈다. 어른들에게 싹싹하지도 않은 내게 그가 꾸준히 관심을 줬던 이유는 단 하나, 대학교 동문이라는 것이었다. 당시는 회사 오너부터 전략, 재경, 인사 상무가 모두 같은 학교 출신이었는데, 그래서인지 학교에 대한 그의 애정은 상당했다. 가끔 나를 불러서 면담반 잡담반으로 얘기할때면 회장님 때문에 동문회 모임을 빠질 수가 없다며 투덜거리곤 했는데, 말투에서는 미묘한 으쓱함이 느껴졌다.
부서 내에서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알만한 수준이 관심이었는데, 나는 그게 싫었다. 팀장이나 임원 승진을 앞둔 고연차도 아니었고, 그저 조용하고 평화로운 직장 생활이기만을 꿈꾸던 20대 청년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느껴졌다. 특히 나를 어렵게 했던 반복적인 질문이 있었는데, "일은 재밌습니까?"라는 질문이었다.
K는 평균 하루 한 번씩은 일하고 있는 내 등 뒤에 나타나서 재밌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 때마다 나는 소울리스하게 "네, 재밌습니다..."라고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K는 내 텅빈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밌고 즐겁게 일해야 성과도 나고 배우는 것도 있다며 충고하기를 잊지 않았다.
나는 그 충고가 싫었다. 자신의 조언을 잘 새겨들어야 자신처럼 성공해서 임원이 될 수 있단다, 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가 싫었다. "저는 당신이 별로 부럽지 않아요."라고 속으로 몇 번을 되뇌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건 어색한 "네, 네..."가 전부였다.
그래서였을까. 오랜만에 팀에 들어 온 신입에게 11년차 팀 동료 J가 "일은 재밌어요?"라고 무심코 물었을 때, 나도 모르게 발끈해서 J에게 핀잔을 줬다. "아유, 일 재밌냐는 질문은 어른들이나 하는거에요. 어떻게 일이 재밌어요. 일은 그냥 하는거지."
J는 그런가, 하며 머쓱해했는데, 옆에 있던 선배 Y는 오히려 "J는 일을 정말 재밌어서 하는 사람이라,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걸지도 몰라."라며 J를 두둔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J는 언제나 모든 일을 열심히 했다. 이 일은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흔한 불평도 본 적이 없다. 덜 하고 싶은 일과 더 하고 싶은 일은 있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없는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쩌다가 사소한 업무 스킬 하나만 알려줘도(엑셀 애드온을 활용한 그래프 작성 방법 같은 것) 너무 신나하며 그걸 여기저기 활용하고 즐거워했다. 그런 J를 보며, 그래 저런 사람이 직장 생활해야지... 생각하며 나를 되돌아보곤 했다.
나는 일이 재밌었던 적이 있었나. 완강히 부정하고 싶으면서도, 재밌다고 생각한 순간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기억에 많이 남는 순간들은 대부분 인터뷰를 했던 일이다. 경영감사 일을 하면서 내외부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원체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꺼리는 편이라 처음엔 많이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인터뷰는 어렵지 않았다. 무슨 질문을 할 것인지만 잘 정리되어 있으면, 그리고 상대방의 말을 집중해서 잘 듣기만 하면 인터뷰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고, 그 얘기에 공감하고 질문받기를 즐겼다. 업무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중에도, 그들이 살아온 삶의 태도나 이야기들은 자연스레 묻어났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이것을 즐기고 있다,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일이 재밌었다.
재밌냐봇이었던 인사상무 K나 동료 J는, 어쩌면 '재밌음'의 역치가 나보다 조금 낮은 사람들인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굳이 높은 허들을 만들어서 재미없는 직장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내가, 그들에게는 이상해 보일지도. 내일은 눈 딱감고, 신입에게 재밌냐는 질문을 해보려 한다. 아니 그전에, 나는 무엇이 재밌었는지를 얘기해 보아야겠다. 꼭 재밌을 필요는 없다는 밑밥을 잔뜩 깔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