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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랑 Jan 09. 2021

[志] 살아낸 시간이 살아갈 시간에게 보내는 편지

그날 그때가 온다. 그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외국 사람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본 것은 외삼촌 생신 잔치 때였다.  미군 부대 군무원이던 외삼촌은 해마다 생신이 돌아오면 생일잔치를 했다. 가족, 친구 물론 부대에 근무하는 동료나 미군들까지, 아는 사람과 그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까지, 모두 초대해 그렇게 생일잔치를 했다.

하루를 넘겨 이틀이나 사흘 동안 그렇게 잔치는 이어졌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그런 모습을 처음 봤고, 해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이가 들었다. 외삼촌의 생신은 경이로운 연중 이벤트였고, 꼬맹이의 버킷리스트 첫 번째 목록에 올리기에 충분했다.

"나중에 나도 어른이 되면, 가족, 친척, 친구들과 함께 멋진 생일잔치를 해야지..."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버킷 리스트에 올라 있고, 현실이 되지 못한 채 소망 리스트에 유배되어 있다. 형제, 친구와 함께 모여 밥 한 끼 먹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될 줄 몰랐다. 내 집 없이 사는 삶, 넉넉하지 않은 삶, 그리고 병과 함께 살아가는 삶은, 무엇 하나도 절박하지 않은 것이 없다.


지난 한 해는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힘든 시간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이런 시간을 더 보내야 할지 모른다. 이런 와중에 후배와 친구 몇몇이 세상과 작별했다. 나 역시 세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요단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려는 순간, 어찌어찌해서 다시 돌아온 덕에 이렇게 편지를 쓴다.


병을 얻어 세상과 멀어진 것이 벌써 9년. 그사이 많은 고비를 버티며 견뎠지만, 지난 일 년은 정말 힘겨웠다. 하루하루의 상태가 매일매일 달라지는 상황이라, 몇 시간 후에는 어떨지 내일은 어떨지 기약할 수가 없다. 어떤 순간에는 멀쩡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시간에는 생사를 구분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사는 시간이다. 그런 시간을 오랫동안 지나오면, 생각은 단순하고 명료해진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갈림길 위에 서 있으면, 선택했던 것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선택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게 된다. 살아있을 때 하는 후회는 돌이킬 수 있지만, 죽음 이후에는 후회조차 이승에 두고 온 마련이 될 뿐이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 산다는 것은, 가장 경계하고 지양해야 하는 삶의 방식이다. 되는대로 살아보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어이없는 충고를 하는 얼빠진 사람들이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부탁한다. 살아가다가 최소한 한 번쯤은 정말 심각하고 진지하게, 살아 있음 그 후의 시간과 세상에 대해 고민해 볼 것을 권유한다.

살아 있을 때 해야 한다.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경계의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고, 가장 담담하면서 차분한 눈으로 시간을 바라보아야 한다. 자주 할수록 좋지만 한 번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남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마음속에 품고 살았던 불덩이나 얼음덩어리, 눈길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욕심, 내려놓지 못했던 열정을 유리(遊離) 시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내려놓고 거리 두고, 살아가던 시간에서 살아갈 시간을 돌아보면, 감정에 뿌리를 둔 모든 생각들과 지식에 기반을 둔 어떤 확신이, 단단하게 박혀있던 자리를 뿌리치고 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빈손으로 오는 것이 인생이지만 갈 때는 가져가야 하는 단 하나의 징표가 있다. 어쩌면 그것을 얻기 위해 이 힘겨운 살아내기를 하는 중인 인지도 모른다.

버킷리스트에 올라 있는 생일 파티를 영원히 못 할 수도 있다. 투병을 시작하고 세상과 단절되면서, 형제들은 소식과 발길을 끊었고, 친구는 사전 속에 의미로만 존재하는 허울이 됐다. 아픈 자를 차마 떠날 수 없는 가장 가까운 식구만이, 결국 그 짐을 지고 가는 형벌을 함께 받는다.

병은 독이다. 몸을 숨쉬기 힘든 고통에 밀어 넣는 독이고, 마음을 공포로 가득한 좌절로 몰아가는 독이다. 그 상태가 되면 '힘들다'와 '외롭다'는 말의 의미가 사전 속에 적혀 있는 것과는 달라진다. 부디, 분주하지 않은 삶, 의미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삶, 스스로 만든 걱정 속에 가두지 않는 삶, 이런 삶을 찾은 후 그 자리에 설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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