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삶이 정답인가? 바쁜 가운데 중심을 어떻게 잃지 않을 것인가?
본능적인 ‘몰입'
노동조합 간부로서의 삶은, 부모를 모시고 떠나는 첫 배낭여행과 닮아있다.
그 둘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철저하게 움직여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
-때로는 계획된 일정에, 그때 그때의 컨디션과 상관없이 잡아먹힐 때도 있다.
-힘들 것이라고 어느 정도 각오한다. 막상 해보면 좋은 건 좋고, 힘든 건 힘들다.
-그 모든 것을 상쇄할 정도의 추억과 보람이 생긴다.
노동조합의 주된 업무 중 하나는 '행사와 교육'이다.
우리는 봄·가을로 전국의 직원(조합원)들을 초대해서 노동교육을 진행했다. 봄에는 1박 2일씩, 가을에는 2박 3일씩. 사람이 많아서 봄·가을도 각각 두 차례에 나눠 교육을 진행했다. 간부들과 조합원까지 셈하면 한 번 행사를 할 때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였다.
그중 백미는 가을에 있는 2박 3일짜리 분회장 교육이었다. 나눠서 하다 보니 2주에 걸쳐 연속으로 진행됐다. 이를테면 첫째 주 수·목·금, 바로 다음 주 월·화·수 이렇게 진행되는 식이었다. 그러면 준비를 하는 간부들은 전날부터 가서 온갖 진행 사항을 체크하고 물건을 나르고 자리를 세팅하고 하느라 출장 일정이 더 길어졌다. 거기에 봄·가을이 날씨가 좋으니 다른 행사가 주말에 껴있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러면 출장 일정이 실제로는 화요일에 시작해서 그다음 주 수요일에 끝나는 '8박 9일 출장'의 경우도 생겼다. 당연히 가정에선 반기기 어려운 일정이다.
분회장 교육을 백미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참여자들이 그 시간을 온전히 우리에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평소에는 일이 바쁘다. 그래서 우리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해도 닿기가 어려운데, 분회장 교육 때는 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쉽게 전달됐다. 각종 사업 보고, 외부 강연자 초청, 레크리에이션, 영상 상영, 체육대회, 심지어는 조직의 최고경영자를 모셔다가 직원의 이야기를 듣게 한다든지. 우리는 차곡차곡 쌓인 경험과 노하우를 살렸다. 2박 3일간 주어진 시간 속에서 최대한 다이내믹하고 즐거우면서도 유익한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 회사는 전국에 사업장이 분포한 조직이지만, 다른 지점에 있는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교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자기 자리에서 고객과 업무를 하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보지 않는 이상 지근거리의 지점에 누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런데 업무 교류는 종종 이루어지기 때문에, 친분이 없는 상태에서 부탁하다 보면 쉽게 오해가 생기곤 했다. 그래서 분회장 교육을 '직원들이 편한 마음으로 어울리는 교류의 장'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때 쌓은 친분이 이후에 그들의 일터에서 도움이 되었다.
몇 년 전 분회장 교육 당시에 나는 '노사교섭팀'에 속해 있었다. 분회장 교육 직전에 합의한 노사협의회에서는 좋은 성과들이 있었다. 나는 그 노사교섭의 결과 보고를 하는 강의자로서 연단에 올랐다. 좋은 재료를 맛있는 음식으로 요리하는 역할이었다.
원래부터 해 오던 역할도 그대로 해야 했다. 나는 디너쇼 MC로서 3년간 무대에 올랐다. 보통 내가 진행하는 디너쇼의 순서는 이렇다.
마지막 날 밤 출장 뷔페를 불러 만찬을 즐기다 보면, 내가 무대에 올라가 각종 이벤트와 만담을 진행했다. 그러다가 노래 퀴즈를 시작하면서 제목을 맞춘 사람을 무대로 올려 노래하게 하고 분위기를 띄웠다. 분위기가 올라오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노래 경연 대회로 행사를 바꿨다. 미리 준비해 놓은 조명이 무대를 비추고, 상품이 무대 앞쪽에 도열됐다. 앞에 나와서 무대를 하면 좋은 상품이 그 조 전체에게 돌아갔다. 잘하는 것만큼이나 재밌게 분위기를 살린 조에게도 선물이 나눠졌다. 그러다 보니 용기를 내어 한 사람이 무대에 올라가면 조원 모두가 앞에 나와서 그를 응원하고, 심지어는 같이 올라가서 백댄서 역할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상품까지 수여하고 나면 그들은 금세 친해져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분회장 교육은 직원들끼리 허물없이 어울릴 수 있는 교류의 장이 되어야 했다.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럴만한 상황을 만들어줘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행자인 내가 아마추어처럼 비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노래경연대회 행사를 하면 늘 초반부에 분위기를 직접 띄웠다. 갑자기 토크쇼를 하던 MC가 노래를 한다고 하니 그때 이목이 무대로 확 집중됐다. 재즈 동아리에서 밴드 공연을 해왔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20년 동안 힙합을 듣고, 노래방에서 놀던 것이 분위기를 더 맛깔스럽게 살렸다.
부끄럽지만 나는 타고난 무대 체질이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엔 긴장하다가도, 무대에 오르면 긴장이 풀리고 에너지가 솟았다. 사람이 많을수록 더 잘했다. 노래 반주가 나오면 나는 4분 동안 이 무대를 씹어 먹는다는 생각으로 놀았다. 곡이 끝나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뭐야. 저 사람 누구야. 미쳤다.' 이런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놀라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렇게 한 번 뒷짐 지고 헛기침하는 분위기를 박살 내주면 그다음부터는 모두가 20대 초반이 된 것처럼 놀았다. 이제 1년 차인 신입도, 15년 차인 차장도 함께 춤을 추었다. 뉴진스의 'OMG' 뒤에 자자의 '버스 안에서'가 선곡되어도 아무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때의 분회장 교육으로 다시 돌아가면,
몸이 이상했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오한이 들었다. 처음에는 아침에 있는 체육대회에서 무리한 것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 내가 담당하는 지역에서 온 직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그들의 고충을 들어준 뒤 자리를 파하고 씻고 잠자리로 든 게 새벽 2시였다. 그리고 7시에 다시 일어나 행사를 준비하고, 9시에 맞춰 행사를 시작하고 땀을 뻘뻘 흘렸으니 체력이 없을 만도 했다. 그런데 단순히 피곤한 느낌이 아니었다.
한 시간 뒤에는 노사교섭 보고를, 그리고 저녁에는 무대를 해야 했다. 아프면 안 됐다. 나는 디너쇼 무대를 '해방'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해방되고, 직원들도 해방시켜 주는 시간. 그러려면 대충 하는 것은 내 사전에 없었다. 무조건 끝내주게 잘해야 했다.
주문을 외우듯 눈을 감고 되뇌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내일 무너져도 오늘은 반드시 버틸 수 있다.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무대에 올라가서 최고가 될 것이다. 나는 이미 준비되어 있다. 나는 늘 증명해 왔다'라고.
노사교섭 보고는 잘 마무리되었다. 시작하기 전 양해를 구했다. "감기가 온 것 같아요. 목이 정상이 아닙니다. 잠깐씩 물을 마시면서 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강의에 흐름을 타니 어려울 것이 없었다. 중간중간 목이 갈라지는 것만 신경 써 주었다. 몸이 좋아진 것처럼 느꼈다. 강의를 마치고 인사 직전, 똘망똘망하게 나를 바라보는 수백 명의 눈동자는 '강의 좋았어요'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러나 무대에서 내려오자 오한이 갑자기 돌았다. 저녁은 생략하고 숙소로 돌아가 이불을 몇 겹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었다. 이미 감기약과 해열제는 복용량을 초과했다. 그저 정신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무대를 시작할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가까스로 일어나 샤워실로 몸을 끌고 가서 호스를 돌렸다. 뜨거운 물을 목덜미에 맞으며 정신을 차렸다.
'네가 지금 못한다고 하면 누가 할 것이냐. 너는 “쓰러질 것 같이 아파 못 하겠다”라고 말하면 그만이지만, 결론적으론 타인의 기회를 빼앗은 것이다. 사람들이 어울려 놀 수 있는 기회, 네가 아니었으면 누군가 준비해서 올랐을 무대의 기회를. 나약해지지 마라.'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 발걸음 옮겨 숙소를 빠져나갔다. 나는 컨벤션 홀 앞에서 양손으로 얼굴을 세차게 두드렸다. 눈에 힘 딱 주고 들어가자고.
(저 멀리서부터 들리는 소리)
(행사 전체 MC)".. 분회장 교육을 와보셨던 분들은 기억하실 거예요, MC Mo. 어제도 저녁때 저쪽 테이블에서 어떤 분이 저한테 물어보시더라고요. MC Mo 어디 갔냐고. 이번에도 하냐고. 그래서 제가 그분께 대답해 드렸어요. (살짝 뜸 들인 후)좀 기다려 보셔라."
(좌중) 하하하
(행사 전체 MC)"이제 대답을 해 드릴 때가 왔죠? MC Mo를 큰 박수로 맞이하겠습니다"
(좌중) 와아아아--- 짝짝 짝짝----- 와 아아아 아..
(Mc Mo)"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좌중) 잘생겼어요!!
(Mo)"아이고. 감사합니다. 조명이 거기가 어두워서 그래요~!(작게 소리치며)"
(좌중) 하하하
(Mo)"여러분의 소개를 받은 MC Mo입니다. 오 아까 멀리서부터 걸어오는데 Pyo Mc(전체 MC)한테 어제 저 이번에도 무대 올라오냐고 물어본 분이 계시다면서요~? 그분 어디 계세요?
(좌중 1) 여기요~~! 저예요~~~!
(Mo)"아 저번에 와서 술 많이 드시고 재밌게 노셨던 누님이셨구나~~~~"
(좌중 1) 뭐야~~~
(Mo)"아 그래 맞아 맞아. 확실히 기억났어요. 약간 진상이었어."
(좌중) 하하하
(좌중 1) 아이~ 진짜!
(Mo)"장난이에요. 장난. 농담입니다~~~ 여러분~ 우리 스태프분들 저분께 준비 한 선물하나 건네주시겠어요?
(좌중)오오오
(좌중 1) 고마워~~~
(Mo)"좋습니다. 앞으로 저와 여러분이 함께 만들어 갈 시간에서는 저렇게 용기 내서 참여해 주신 분들께 선물이 돌아갑니다. 자 박수로 본격적인 Mc.Mo의 디너쇼 파티를 시작합니다!!"
(좌중) 짝짝짝 짝짝.... 와아아아...
(Mo) 제가 한곡 해야겠죠? 다이내믹 듀오의 Aeao. 노래 주세요.
(음악) 빰 빰 빰빰 빰빠빠 안. 빰 빰 빰빰 빰빠빠 안. 엔엔엔 엔더 게임 원 체인지 저스트 세임 올드 땡~. 엔엔엔 엔더 게임 원 체인지 저스트 세임 올드 땡~. 프프리모~ 다다 다이내믹 듀오~. (Mo) 동전 한 잎조차 아쉽고 일 없어~ (중략).. (Mo) 손 머리 위로! 손 머리 위로! 풋져핸섭! 풋져핸섭!
이날 무대는 내가 해 왔던 셀 수 없는 무대 중에서도 분위기가 가장 좋았던 무대로 남았다. 때로는 정신력이 모든 것을 압도하기도 한다. 나는 그날 저녁 분명히 불꽃이었다. 나를 활활 태운 불은 직원들에게 옮겨 붙었다. 마지막에는 나도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추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춤이었다.
다양한 역할간의 충돌
다음 날 아침에는 정말 버티기 힘들었다. 고열에 눈을 뜨기도 어려웠다. 가까스로 서울행 버스에 탑승해서 에어팟을 귀에 꽂고 눈을 감았다. 고통에 잠도 오질 않았다. 나는 서울에 내리자마자 인근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했다. 독감이었다. 체온계에는 39.9라는 숫자가 반짝였다.
나는 그리고 통째로 주말을 침대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아내는 안방을 내주고 소파에서 새우잠을 청했다. 월요일이 되어도 컨디션이 좋아지지 않았다. 월요일에 출근하려던 나는, 그날 새벽 심한 기침에 잠에서 깼다. 목에서 피가 나오는 것 같았다.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서서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응급실에 가볼 생각이었다.
아내가 잠에서 깼다. 왜 그러냐며 물었다. 나는 “기침이 좀 심해서 응급실에 가보겠다. 안 따라와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내는 “무슨 소리냐, 왜 혼자 가냐”며 새벽에 눈을 부비며 함께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은 접수하는 곳부터 황망했다. 내 옆에 주저앉은 여인은 옷에 피가 흥건했다. 본인의 피가 아닌 듯했다. 그녀의 표정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초점이 없었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으니 생과사가 갈리는 순간들이 주위에서 펼쳐졌다. 아프지 말라며 가족에게 울음에 가까운 명령을 하는 사람, 내가 잘못했다며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 나는 그 앞에서 작아졌다. 기침 좀 한다고 응급실에 오다니. 진료를 받기도 전에 다 나은 기분이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나는 지쳐 있었다. 열은 떨어졌지만 기침은 쉽사리 멎지 않았다. 나는 이게 정신이 보내는 고통의 신호라고 생각했다. 에너지를 있는 대로 끌어다 쓰니 뒤에 후유증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무실에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렇게 일주일간 배려를 받으며 병가를 냈다.
몸이 아파서 쉬니 좋긴 좋은데, 무척 심심했다. 분회장 교육에서 태웠던 불꽃이, 다 타지 못한 채 불씨가 되어 조금 남은 것만 같았다. 분명, 뭔가 바쁘게 살면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던 것 같은데.. 기침만 콜록콜록하며 침대에 누워 있자니 답답했다. 괜히 회사일에 참견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바엔 출근하는 게 맞지 않냐는 생각에, 이번 기회에 쉴 때는 그냥 제대로 쉬자고 하고 휴대폰 화면을 닫았다.
하루도 못 가 쉬더라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도졌다. 그러던 중 앱스토어에서 게임을 하나 발견했다. <Call of Dragons>. 용과 인간과 엘프와 오크, 그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역사. 마침 심심하던 차에 발견한 귀여운 게임의 일러스트는, 새로운 모험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게임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정치 게임이었다. 사람들끼리 국가를 형성하고 한정된 영토와 자원을 두고 전쟁을 했다. 전략과 음모, 공존과 배신이 도처에서 발발했다. 작은 모바일 속 구현된 판타지 세계는 현실의 사람들을 현실보다도 더 냉정하고 흥미로운 세상으로 이끌었다. 돈을 많이 쓸수록 강해졌다. 강한 것은 곧 권력이 되었다. 내 캐릭터가 강한 것과, 외교나 정치적 결정을 잘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임에도, 강한 캐릭터를 보유한 사람들(돈을 많이 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쉬는 동안만 할 생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적당히 하고 게임을 지우려고 했다. 그런데, 몇 번 리더군의 결정에 대해 의견을 낸 것을 계기로 한 국가의 운영진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 국가의 왕 역할을 맡게 되었다. 글로벌 게임이기 때문에 다양한 나라의 멤버들이 많았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폴란드, 미국, 프랑스, 스리랑카 등 별의별 국가의 사람들이 우리 왕국에 속했다. 개발사는 글로벌 게임회사답게, 게임 내 채팅에서 자동 번역 기능을 제공했다.
다른 한국인들은 그 불편함과 문화 차이 때문에 대부분 한국인끼리 국가를 건설하고 주위 국가들을 복속시켰다. 게임의 돈을 쓰는 것을 '현질' 한다고 표현하는데, 가장 많이 '현질'을 하는 것도 한국인이었다.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의 성격도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한몫을 했다. 그리고 스스로 항상 위계를 설정하는 사람들의 습관은, 운영진 그룹이 사람들을 통제하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밖에서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더라도, 게임 속에선 돈을 많이 쓴 사람이 대장이었다.
한국인들로만 이루어진 사방의 국가에서 나의 합류를 권했다. ‘외국인들은 의리 없다. 외국인들은 체리피커다 ‘. 낯선 이들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은 적대심이 되었다. 그들은 한국인들만 추려서 넘어오라고 회유했다. 한 몸이 된 뒤, 외국인들을 함께 쓸어버리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한국인이나 외국인이나 동등한 플레이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배타적이고 잔인한 그들의 심성에 질려버렸다. 내 반골기질이 발휘됐다. 나는 글로벌 연합국가의 리더로서 독자적인 힘을 기르기로 결심했다. 약소국가의 생존 방법으로서 강대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다. 노동조합에서 교섭팀을 하면서 갈고닦은 협상능력이 도움이 되었다. 결국엔 우리가 핵심 키 플레이어가 됐다. 나는 더 많은 외국인들을 포섭해서 국민의 수(플레이어의 수)를 늘리고 영향력을 과시했다.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닌 경험이, 그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우리를 포함한 인근 국가들이 합쳐져 제국을 결성하게 되었다. 게임이 구조가 독특한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전장이 계속 확장됐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도록 게임을 만들었다. 결국에는 마지막 전장에서 큰 제국끼리 전쟁을 벌이는 스토리가 펼쳐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제국국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보컬 리더라고 부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나를 통해 이루어졌다. 위계상은 조언자 역할이었지만, 사실상은 내가 지휘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 스마트폰 속의 세계의 권력에 취해 있었다.
그건 회사를 복귀하고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일에 집중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출퇴근길이나 점심시간 같이 잠깐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순간에도, 게임 내 밀린 의사결정을 하느라 쉬질 못 했다. 잠시만 눈을 떼도 별의별 일이 다 생겼다. 사람들의 배경이 부정적인 의미로 다양했다. 작은 갈등이 금세 인종 간, 국가 간 갈등으로 번졌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한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당사자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양쪽을 설득시키느라 꽤나 진땀을 뺐다.
미친 듯이 바빴다. 일을 쉬지 못했다. 이미 게임 속 세계는 내 일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현실에서는 노조 간부로서 갈등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고, 게임 속에서는 제국의 리더로서 갈등을 중재하며 문제를 해결했다. 수시로 바뀌는 역할에 정신이 없었다. 아내는 서운해했다. 심지어 그녀와 떠난 일본 여행에서도 나는 급한 일이라며 보이스톡으로 회의를 소집하고 게임 속 운영진들과 전략 회의를 했다.
'참 역할'
그러던 중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오래된 친구를 만나 근황 공유를 하다가 요즘 내 삶의 얘기를 했다. 친구는 유심히 얘기를 듣다가, 네 아이폰에 스크린 타임을 좀 보자고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내가 게임과 게임 관련 카톡회의에 하루에 7시간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계산을 해 보면 회사에서 일하는 8시간을 제외하고 7시간을 게임에 쓰고 있으면 거의 잠자고 밥 먹는 시간 빼놓고는 다 일 아니면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친구는 심각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친한 형이 사업에만 너무 몰두해 결국 이혼한 이야기도 해 줬다. 중앙아시아에서 사업을 했던 그는, 외국인의 신분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 제한되어 아내 명의로 사업을 벌였다. 이혼한 뒤 재산과 사업체는 명의를 가진 전부인에게 전부 넘어갔다. 정신없이 일에 몰두한 결과 재산도 사랑도 건강도 잃고 폐인처럼 되었다고 한다. 부부 사이는 조금씩 조금씩 누적되는 것과 같아서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너 올해 선거라고 하지 않았어? 너 이렇게 살다가 만약에 선거 지면, 그때 후회 안 할 수 있겠어? 너한테 중요한 게 뭔지 조금 더 생각해 봐야 되는 거 아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그날 이 게임을 끊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는 아내에게 곧바로 전화해 내가 요즘 당신에게 소홀했던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마음먹은 것과 다르게, 게임 속 세상의 관계는 단칼에 잘리지 않았다. '내가 필요하다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일은, 여전히 내 삶에서 중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수시로 보이스톡이 울리고 게임 내 채팅메시지 알람이 팝업창에 떴다. 다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며 아우성이었다. 내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서 돌았다. 그들 입장에선 의아했을 것이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조금씩 시간을 줄여나가는 것으로 최선을 다한다고 자위하고 있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나와 자주 충돌하던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가까웠다. 지방에서 사업을 하는 그는, 자기 삶에 열정적인 구석이 있었다. "가난하게 자라고 장사로 먹고살 만 해질 때까지 온갖 고생을 다 했다"라고 어느 날 그는 솔직히 속마음을 털어놨다. 나는 그것을 충분히 존중해 주었다. 그도 내 인사이트를 존중해 주었다. 처음에는 말이다.
그러나 외교적인 문제나, 사람들 간의 갈등이 터질 때마다 그와 나는 충돌했다. 그는 원칙이나 철학 없이 기분대로 오락가락했다. 그것을 본인의 열정이라 착각하는 듯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때로는 좋게, 때로는 약점을 잡아 그를 설득시키며 끌고 나갔다.
돈을 쓰지 않고도(캐릭터가 약한데도) 내 역할이 존중되었던 것은, 그간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운영진의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점 내가 참여하는 시간이 줄어들자 그는 반격을 시작했다. 결정이 늦어지자 그는 나를 책임감이 없다며 비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회원관리를 놓고 나와 충돌한 그는 끝내 선을 넘어버렸다.
라며 나를 힐난했다. 난 그때 딱 여기까지라고 직감했다. 나에게 중요한 역할과, 그렇지 않은 것이 마침내 머릿속에서 구분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모든 권한을 내려놓겠다며 회원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게임과 관련된 카톡 방들을 나왔다. 나오면서 보니 이래저래 그룹핑되어 있던 게임 카톡 방이 10개는 되었다. 참 거미줄처럼 내 삶을 옭아매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게임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집요하게 나의 복귀를 요구했으나, 철저하고 냉정하게 무응답으로 대신했다. 딱 일주일이 지나자 무소불위처럼 느껴지던 스마트폰 세상 속 권력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삶이 이전으로 돌아갔다.
다시 본업에 몰입했다. 그리고 그해 말, 나는 핵심적인 참모스태프로서 선거에서 승리했다. 진짜 내 삶에서의 승리였다. 그 순간이 달콤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마무리)
때로는 정신없이 사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 삶이 너무 바빠 "너 요즘 뭐 하고 살아?"라는 지인들의 질문에 쉽게 대답을 못할 때도 있다. 뭐가 엄청 많은데, 딱히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는 느낌. 그런 시기들을 몇 번 겪고 나니, ‘시간 주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바쁘게만 사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당신에게 여러 역할 기대가 있을 수 있다. 진짜 중요한 역할과, 그렇지 않은 역할을 구분해라. 가치 있는 역할에 충실하고 시간을 쏟아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며 살 순 없다.
또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당신의 하루를 낱낱이 해부해 볼 필요가 있다. 대개의 경우 유튜브, SNS, 게임 등 소모적인 콘텐츠를 소비하며 보내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다. 그 시간을 청소하고 당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삶의 중심으로 가져와라. 성장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쓰는 시간은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다. 그리고 명상, 운동, 독서와 같이 진짜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매일의 루틴에 배치할 때 당신은 주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인생은 현재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하루의 일상이 바뀌지 않으면, 영원히 삶이 바뀌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