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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버지 Jul 01. 2024

1년의 반

무엇이 달라졌나?

  1년의 반, 소위 반기가 끝이 났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동안 6월은 반기시점 KPI 달성률을 점검하고, 하반기 기획된 내용들을 재점검하거나 추가하는 시기였다. 신기하게도 성과와 지표는 늘 우상향 해야 한다는 윗분들의 논리 덕에 열심히 숫자를 만들거나 무언가로 포장하는 작업이 수고로웠던 한 달로 기억된다.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는 동안은 워낙 짧은 주기로 개별 프로젝트를 수행하다 보니 그런 일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내 몸은 분기, 반기 등의 시점에 주로 반응하는 편이다. 그래서 오늘도 이 글을 적어 본다.


  본격적으로 백수가 된 지 6개월이 지난 지금 난 무엇이 달라졌을까?


  하나, 나 자신을 좀 더 알게 되었다. 여유가 생기면서 약 3개월은 어떻게 이 시간을 잘 보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아내에게 여행을 떠나게 해달라고 하질 않았나, 집에서 틈틈이 모은 위스키를 탕진하며 혼술을 하진 않나 등의 발광을 했다. 그러는 동안 갑자기 몸도 아팠고, 아이도 컨디션이 좋지 않은 환절기여서인지 이리저리 헤매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그 일에 몰두하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했다. 그게 바로 글쓰기였고 블로그를 시작하였는데 글을 쓰면서도 '이게 맞나'라는 감정과 함께 보여주기 위한 글(이를테면 평양냉면 보고서..ㅎ)을 자주 쓰곤 했다. 그래도 그 시작이 지금의 브런치 연재까지 온 건 맞기에 감사한 일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며 나 자신과 주변을 면밀히 관찰하였고, 결국 나란 사람의 부족한 부분과 원래 좋아했던 것, 놓치며 산 일들을 조금씩 나열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사랑하는 아이와의 교감은 나를 더 의미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고, 최근 들어 직장생활 15년 차에 접어든 아내에게 어떻게 하면 인간 대 인간으로서 도움을 더 줄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둘, 관계가 자연스레 정리가 되었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었거나 나에게 무엇이 필요해서 만난 사람들과는 멀어졌다. 당연지사이다. 물론 그런 지인 중에도 종종 연락을 하며 지내는 이들도 꽤 많지만 확실히 내가 먼저 연락은 잘 안 하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그들에게 그런 존재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젠 정말 누군가와의 만남 그리고 그 시간을 소중한 '내 사람'들에게 듬뿍 쓰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당연히 그 첫 번째는 가족이고 그들과의 시간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 보내고 있다. 나처럼 수동적이며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사람이 서울랜드 연간회원권을 먼저 끊자고 할 정도였으니까. 은행에서 근무한 시절보다 스타트업에서 근무한 기간 동안 오히려 저녁시간을 가족과 거의 못 보냈다. 그즈음 아이가 태어나 아내는 육아휴직 들어갔고, 가장 예쁘고 손이 많이 갔을 시기였는데 나는 너무 바빴다. 일 또는 개인적인 약속 그리고 다른 임원들과 의미 없는 밤샘토론까지 소중한 내 저녁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겼다. 인간에게 시간은 매우 유한하고 소중한데 치유와 회복을 했어야 할 저녁 시간을 그렇게 빼앗기면 당연히 다음 날까지 영향을 미쳤다. 덕분 분명 건강도 매우 나빠졌을 거로 사료된다. 지금은 정말 하루를 유익하고 여유 있게 보내려는 노력 중이다.


  셋, 평온함이 생겼고 호기심이 살아났다. 원래 지인들이 보기엔 나는 평온한 사람이었다. 어떤 사건이나 상황 또는 사람에게 크게 휘둘리지 않고 최대한 괜찮은 척을 잘하는 편이다. 작년에 찾았던 한의원 원장님께서 하신 말이 기억난다. 맥을 짚으시곤 '몸이 왜 이렇게 긴장되어 있어요? 이 정도로 몸이 긴장상태면 엄청 힘들 텐데? 원래 이런 건지 아니면 최근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건지 궁금하네요'. 난 어느 정도 정답을 알고 있었다. 그저 우아는 백조였다. 물 밖에선 긴장하지 않은 척 갖은 표정으로 날 포장하고, 물 밑에서는 두 발을 열심히 휘젓고 있었다. 회사에선 어려운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커버하는 든든한 임원인 척, 집에선 괜찮은 아빠인 척, 부모님께는 잘 살고 있는 아들인 척했다. 막상 나 자신도 챙기지 못해 몸도 마음도 병들어가면서 말이다. 최근 요가를 시작하고 나서 가끔 명상을 하게 되는데 점점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시간이 늘다. 소위 멍 때리는 시간이 조금 생겨난 것이다. 보수적 관점에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서 애를 보며 멍까지 때리는 남자는 마이너스 200점일 것이다. 하지만, 난 대낮에도 아이와 놀이터에서 잘 놀고 그런 아이를 보며 잠시 멍 때린다. 그런 나를 쳐다보는 주변 엄마들 시선이 곱지 않을 뿐 내 마음은 행복하다.

호기심이 살아난 일은 정말 고무적이다. 원래 준비가 많이 필요한 사람인데 단순한 호기심으로 해보고 싶은 일들이 더 늘어났고 행동으로 옮다. 요가 역시 그중 하나인데 정말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7월부턴 아내도 함께 할 예정이다. 호기심이라는 감정은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사치처럼 느껴졌다. 쳐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인데 무슨 새로운 것에 빠져들 여유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호기심이란 놈이 얼마나 대단한지 딸을 통해 느낀다. 아이는 온통 다 궁금하고 알고 싶다. 해맑은 표정으로 최근 물어 온 이 질문 '아빠 비누는 어떻게 만들어요?'에 아직 대답을 못했다. 나이를 먹어가며 우리가 세상을 좀 살았다고 이미 다 아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사는데 막상 하면 안 되거나 알면 안 되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납득시키는 놀라운(?) 능력키우며 살았다고 생각된다. 뭐 이제라도 호기심이 다시 살아났으니 아이처럼 즐거워지리라.


  적고 나니 조금 정리가 되었다. 결국 위와 같은 변화는 나를 예전보다 하루에 집중하고 순간에 더 진심을 다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 힘을 주고 있다. 요즘 들어 '나 즐거워, 좋아'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나 자신을 보며 다시금 느낀다. 감히 '나 행복하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더 높은 위치에 서면 당연히 행복이 따라오는 줄 알았다. 경제활동을 멈추면 큰일이 나고 뒤쳐지는 인생이 되는 줄 알았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영원히 그렇다면 말이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왔다면 잠시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사회적 권위를 쌓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하루와 순간에 집중하며 살아보시라 권하고 싶다. 분명 그런 시간을 보낸다면 더 좋은 사람이 될 것이라 믿는다. 좋은 사람이 반드시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란 법도 없다.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면 난 먼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앞으로도 이 마음이 변치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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