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머리를 망쳐놓나
나는 육아 휴직 중에 문화센터에서 한 달가량 헤어컷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다. '가족의 머리를 직접 잘라 주면 좋지 않을까.'란 생각에 듣게 된 수업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이뤄지는 수업이라 실력이 금방 늘 순 없었다. 그 이후로 기회가 되어 나는 남편과 아들의 머리를 두 번 정도 잘라주었다. 당시에는 혹시나 망칠까 조심스러워 정말 살짝살짝 머리를 다듬어주는 정도였다. 특히 길게 자른 아들의 머리는 실수를 해도 크게 티가 나지 않아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의 머리가 금세 자라 있는 것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그 날이 마침 주말이라 나는 쇠뿔도 단김에 뽑는다고 아들을 화장실에 두고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우선 급한 대로 미용 가위로만 머리를 대충 잘라주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아들은 지루해졌는지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속도를 내었다. 그런데 너무 마음이 급해서였을까. 가위로 내가 내 손을 집어 버리고 말았다. 피가 나는 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마무리해주긴 더 이상 무리였다. 결국 미완성 상태로 아들의 머리를 마무리 지었다.
다음 날, 퇴근을 하고 아들을 데리러 어린이집에 갔다. 날 보자마자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며 나를 추켜세워주시는 것이 아닌가. "어머님이 00이 머리를 직접 잘라주셨나 봐요. 손재주가 있으시네요. 지난번에도 어머님이 직접 잘라주신 거예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우쭐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이와 동시에 '바리깡을 사용했다면 더 완벽한 작품이 탄생했을 텐데..'와 같은 아쉬운 마음도 올라왔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칭찬 들은 고래 마냥 일사불란하게 아들의 머리 위에서 바리깡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방금 전, 선생님의 칭찬을 들은 나는 자신감이 충만해서였는지 3mm도 아닌 이전에 연습해보지도 않은 1mm로 맞추고 아들의 머리를 깎았다. 결과는 뻔했다. 아들의 머리는 금방 짧아지고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것도 가만히 있는 아들이 아닌지라 시간이 조금 지나니 싫다고 울기 시작했다. 아들이 울어 어쩔 수 없이 이발은 종료되었다.
이후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하였다. 영상통화를 하는 내내 가족들은 아들의 머리를 보며 꼭 쥐 파먹은 바가지 모양이라며 아들을, 정확히 말하면 나를 놀려댔다. 나 또한 아들이 움직여서 저렇게 자를 수밖에 없었다 합리화했지만 스스로가 용서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밤 중에 아들을 다시 화장실 의자에 앉히고 이발을 시작했다. 이번엔 조금 더 철저하게. 아들이 좋아하는 영상을 틀어주고 아들이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도록 했다. 그랬더니 거의 움직이지 않아 이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이발기 소리에 아들이 계속 고개를 저었지만 이 정도는 참을 만했다. 잘하는 것보다 쥐 파먹은 곳을 기준선으로 하여 머리를 다듬기만 하자는 생각으로 예쁜 바가지 모양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드디어 완벽하진 않지만 동그란 바가지 모양이 되었다.(바가지의 크기는 정말 작아졌다.) 머리 위에 크기도 안 맞는 바가지 하나를 쓰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좌우 대칭을 맞춰 머리를 잘랐다는 안도감에 이발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참 사소한 일상 속, 나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서 '나란 사람은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대단하구나.'를 느꼈다. 참 별 거 아닌 것 같은 말에 의욕이 앞서 아들의 머리를 망쳐놓는 나 자신을 보며, 처음의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그리고 내가 기준이 아닌 타인의 말이 기준이 되어 이에 얼마나 휘둘리고 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처음 가족의 머리를 잘라주겠다는 순수한 의도에서 나의 인정 욕구를 채우려는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바뀌는 순간 상대도, 나도 망쳐놓을 수 있음을 알고 '내일은 그러지 않도록 노력해야지.'라고 다짐하며 나를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