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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피아 Oct 11. 2021

종이의 권위

그 종이가 가졌던 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종류의 책을 펴놓고 누군가의 지시를 따르는 순간이 있다. 학교 수업 시간이다. 교실 안에 서른 명 이상의 학생이 있고, 한 명의 선생님이 모든 학생을 통솔한다. 규율이 필요하며, 학생들의 행동은 평가 대상이다. 평소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교우 관계는 어떠하며, 성적은 어떤지 등이다. 아무리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어린이라도 학교 안에서 제멋대로 행동할 수 없다.  


“표창장은 친구들을 위한 마음 씀씀이가 예쁘고, 성실한 학생에게 수여될 거예요.”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내가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었던 이유다. 집단생활에는 차별이 존재했다. 사람의 마음으로 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적이 우수하고 바른 행동을 하는 학생에게 선생님이 신뢰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어른이 되니 공감할 수 있었다. 표창장은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친구들로부터 인기를 끌지도 못했던 내게 기회로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했고, 신발장 구석의 먼지를 보았다. 보통의 아이들은 청소 시간에 마지못해 책상을 밀고 끌며 겉으로 보이는 곳만 청소했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그곳을 우연히 발견했고, 보물섬처럼 느껴졌다. 수업이 끝나고 청소 시간 막바지를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복도까지 잘 닦았는지 점검하는 순간, 신발장 구석에 빗자루를 들이댔다. 그곳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웠을 게 분명하다.


대전 동구 우암로 96, 한밭교육박물관



“여러분, 이것 보세요. 청소는 보이는 곳만 하는 게 아니에요. 내 집처럼 생각하면서 구석까지 열심히 해야 

해요.”


선생님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1학기 끝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날부터 매일 시커먼 신발장 구석에 고여 있는 먼지들을 정리했다. 먼지라는 게 쓸고 닦아도 계속 쌓인다는 것을 그곳을 보며 깨달았다. 신발장이 나만의 성역처럼 느껴졌다. 그곳을 청소하려고 탐내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신발장 청소는 점점 주목받지 못했다. 배움의 전당이라는 학교의 특성상 학업에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에게 칭찬이 쏟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수학 시간에 덧셈, 뺄셈을 척척 푸는 짝꿍을 보며 생각했다. 착한 일만 한다고 그것을 받을 것 같지 않았다. 어느 정도 공부를 잘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았다. 그날부터 방과 후 놀이터보다 집 안에 들어갔다. 열심히 숙제를 하기로 결심했다. 빳빳한 종이에 굵은 금색 테두리의 멋진 표창장을 받는 날을 상상하면 열정이 샘솟았다.     


어렸을 때부터 젬병이었던 수학 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없어 국어 과목에 집중했다. 짜증스럽던 맞춤법을 익히고자 노력했다. 자연스레 빠지는 날 없이 긴 분량으로 일기도 썼다. 그렇게 우등생으로 성장했지만, 표창장은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경쟁자들이 있었다. 매일같이 꽈배기 모양으로 머리를 땋고 학교에 오던 건너편에 앉아있던 친구에게 돌아갔다. 그가 나보다 학급에서 주목받던 학생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고, 신발장 청소를 멈췄다. 그날부터 공부 대신 놀이터에서 실컷 뛰어놀았다.    


대전 중구 중앙로 101, 대전근현대사진전시관


“종이 한 장이 뭐라고 그렇게 상심을 해. 하나 만들어줄까?”


아버지가 내 얘기를 듣고, 말씀하셨다. 그것과 실제 선행상은 엄연히 달랐다. 더 두꺼운 종이와 멋진 디자인일지라도 빠진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상장을 받는 분위기가 없었다. 조회 시간에 이름이 호명되고, 손뼉 치는 친구들 사이에서 상장을 받는 묘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렀고, 2학년 초에 선행상을 받았다.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기뻤다. 학년이 올라가며 상장의 종류는 훨씬 다양해졌다. 개근상, 학급 우수상, 과목우수상, 표창장 등. 상장 디자인도 화려했다. 금상, 은상, 동상으로 나뉘는 학급 우수상의 경우엔 금, 은, 동색의 스티커가 상장 상단에 붙었다. 나는 그 다양한 종이의 컬렉터가 되었다. 상을 받기 위한 욕심으로 더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했다. 상장이 목표가 되면서부터 나는 조금 더 모범생이 되었다. 


부작용도 있었다. 장기적인 목표에 대한 갈망이 옅어졌다. 다른 친구들이 장래 희망으로 우주비행사, 대통령, 화가 등과 같은 특별한 직업들을 얘기할 때 내 머릿속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오직 이번 학기 시험을 잘 보거나, 어떤 과제를 훌륭하게 해내서 상장을 받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마음껏 군것질할 수 있는 ‘슈퍼 사장’이 되고 싶었으나, 차마 적을 수 없었다. 통통한 편이었는데, ‘돼지’라는 별명이 붙을 것을 우려했다. 무난하게 ‘선생님’이라고 적었다. 내가 가까운 곳에 유심히 지켜본 직업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상장들을 차곡차곡 파일에 넣어 보관했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상장이 생각났다. 필요 없는 책과 자료들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책꽂이의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상장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누구에게 보여주거나 자랑할 일이 없었고, 취업 시에 필요하지 않았다. 공간만 차지하는 것 같아서 파일에서 상장을 한 장씩 꺼내서 버렸다. 파일은 대학 수업 자료를 보관하는 것으로 재활용했다. 상장을 받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한때 그토록 갈망했던 상장이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전략한 것이 씁쓸하기도 했다. 한때 나를 설레게 하던 권위 있던 그 사물이 쓰레기의 대상으로 전략한 것이다. 


대전의 한밭 학생 교육박물관에서 과거 학교에서 사용했던 지류들이 전시된 것을 본 적이 있다. 문집, 학급문고 대장, 통신문, 학생기록부 같은 것들이다. 학생 전원에 대한 기록이 담긴 그것의 내용이 흥미로웠다. 상장은 오히려 내 이목을 끌지 못했다. 학생에게 주는 상장은 어딘가에 버려질 수 있지만, 그런 자료들은 학교에 영구적으로 보관된다. 변색하고 꼬깃거리는 종이에 글씨가 보였다. 어떤 선생님의 필기체가 그대로 보이는 그것들은 인쇄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상장과 달랐다. 전시실 안에서 그 자료들을 읽다가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글 속 학생의 모습이 어렴풋이 상상했다.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다.


서울 을지로 , 카페


‘나는 선생님에게 어떤 학생을 기억됐을까?’


당시 내게 가치 있게 느껴졌던 것은 내 손에 쥐어지는 상장이었지만, 나라는 개인에 대한 기록이 더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 졸업했던 학교에 가서 그 기록들을 보고 싶은 욕망이 들었다. 내가 소유했던 상장으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 수 없어서다. 하지만, 선생님이 나에 대해 면밀히 쓴 글들을 읽어 본다면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파악하는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학생들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하며, 쉬는 시간에도 뭔가를 기록하던 선생님이 모습이 떠오른다. 90년대 초반, 컴퓨터가 일반화되지 않아서 모두 수기로 작업을 하던 시절이다. 선생님이 쓴 그 기록들은 천편일률적이지 않은 개인에 대한 세밀한 얘기다. 명랑하며 잘 뛰어노는 학생, 곤충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학생, 음악시간을 즐기는 학생 등. 다양한 수식어로 그 학생을 표현했다. 

어쩌면 진짜 권위는 내 손에 쥐어진 상장이 아니라, 그 기록들인지 모른다.



<종이 일기>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권위를 얻고 싶어서 노력했던 순간이 있습니다. 제게 ‘상장’이라는 종이 한 장은 그 행위의 시초였습니다. 상장을 받기 위해 공부하고, 청소하고, 명랑한 학생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니, 그 상장들은 없어져도 상관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정말 가치 있는 종이는 따로 있었습니다. 저라는 사람에 대한 세세하고 개별적인 기록들이었습니다. 학교에 영구적으로 보존되는 것이었습니다. 진짜 권위 있는 게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어떤 권위를 위해 노력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지금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나중엔 쓸모없는 것들이 될지도 모릅니다. 제가 생각하는 권위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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