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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헤는나무 Dec 14. 2020

그녀는 아름답다.(1)

71세 그녀의 이름은 현상숙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난 그녀는 목수의 첫째 딸이었다. 가난한 집 맏딸로 국민학교조차 간신히 다녔고, 시골에서 동생들 챙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 결혼할 때까지는 방직공장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 시절 별다른 추억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일하며 보낸 기억이 전부였다. 


공장생활이 지긋지긋해질 때 시골의 백부님이 중매를 하셨다. 흰 두루마기를 즐겨 입는 젊잖은 백부님의 중매였기에 약속을 잡고 다방으로 향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도 키도 큰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철도청에 근무한다는 그 남자는 나이가 서른하나였다. 노총각이라고 들어서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인물은 생각보다 좋았다. 말주변이 없어 별다른 말도 없었다. 이렇다 할 데이트도 없었지만 그 남자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자꾸 어두침침한 골목으로 손을 잡고 이끄는 걸 보면.


그렇지만 그 남자의 현실적 조건이 썩 좋지 않았다. 홀어머니와 다섯 명의 동생들이 선물세트처럼 묶여 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가족이 되어야 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조금 더 따져가며 남자를 만났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그녀가 어렸다. 첫 만남에서부터 '가진 게 없다'는 말을 하는 남자를 좋게만 생각한 숙맥이었다.



'그럼 나는 앞으로 어디서 자요?'

중학교 2학년이던 시동생이 형이 결혼을 한다니 가장 먼저 한 말이다.


24살, 1973년 10월 24일에 결혼식을 치렀다.

방 2개인 작은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니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첫 시누이는 결혼을 했지만 아래로 시누이가 셋, 시동생이 하나 있었다. 시어머니부터 시누이 셋, 시동생까지 한 방에서 생활하게 된다. 혼기가 꽉 찬 시누이들은 짝을 찾기 못해 중매 서는 것만 수십 번이었다. 그렇게 하나 둘 시집 장가를 보내니 결혼생활의 20년 가까이 지나갔다.


결혼 한 이듬해 첫딸이 태어났다. 딸이라는 이유로 시큰둥했다. 시어머니는 계집아이라고 부르며 아들 타령을 했다. 아들 손주를 그렇게 찾으니 노력 끝내 2년 터울로 아들을 낳았다.  금지옥엽 ‘우리 손주’라는 말이 떠나지 않아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청량리로 출퇴근을 하는 남편을 위해 새벽부터 도시락을 2개씩 챙기는 일이 매일 같이 반복되었다. 시동생 도시락까지 아침이면 다섯 개의 도시락을 준비했다. 철도공무원인 남편은 24시간 맞교대 근무였다. 천안역에서 기차를 타고 출근을 해서 다음날 아침에 퇴근했다. 

짐칸에 올려놓은 도시락이 새 김치 국물이 흘렀다는 말을 들었을 땐 민망했지만, 이렇다 할 반찬을 따로 준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른 아침 출근에 다시 아침에 퇴근한 남편은 오전에 잠을 자는 편이었다. 그런데 천안역으로 근무지가 바뀌고부터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낮부터 어울려 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술을 마시게 되면 언성이 높아지고 다툼이 되었다. 집안의 불화엔 시어머니는 아들만 감싸고돌아 시집살이는 호되지기만 했다. 


초라한 말단 공무원 월급은 이리저리 쪼개 써도 늘 부족했다. 두 아이가 태어났음에도 학교 보낼 시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셋째는 공부를 괜찮게 하는 편이었지만 대학을 보낼 형편은 못되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기어이 대학에 원서를 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떨어졌다. 이후 취업을 해야 하는데 이것도 쉽지 않았지만 어렵게 입사한 회사는 계속 다녔다. 눈이 높아 중매마다 번번이 퇴자를 놓았는데 이유는 장남이라서, 홀시어머니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한 숨이 나왔다. 그렇게 계속되던 어느 날 임자를 만났는지 결혼을 했다. 결혼 준비는 시어머니 바람대로 할 수 없어 힘들었다. 잔치 음식이며 식장을 준비하는 것 모두 맏아들, 큰 오빠라는 이유로 책임져야 하는 현실이 팍팍했다.


시동생의 성적도 나쁘지 않았지만, 농고를 진학했다. 당시 농고는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이 다녔기에 반대도 많았지만 당사자 뜻이 확고했다. 다행히 성적이 좋아 고3이 되자 추천으로 바로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막내 시누이는 줄기차게 선을 보았으나 짝을 잘 찾지 못했다. 거기다 중병이라는 의사의 선고에 집을 팔아서라도 수술을 하겠다던 시어머니의 고집을 뜯어말렸다. 가족 모두가 길거리에 나 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독한 년'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다행히 수술 없이 병은 완치가 되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고는 끈 떨어진 진세라는 생각에서인지, 챙김 받는 게 당연해서인지 오랜 시간 곁에서 계속 손이 갔다. 11살 때부터 챙겼으니 딸 같은 관계가 될 법도 한데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몇 년의 실랑이 끝에 중매로 만난 막내아들과 결혼을 했다.  막내 시누이까지 시집보낼 때  큰 딸아이 나이가 열일곱이었다. 결혼생활 18년간 시동생 4명을 출가시킨 것이다.




친정엄마의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잊힌 분홍빛 추억,  주홍빛 석양의 기억을 엄마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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