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도망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내가 힘들어지고 그 일로 인해 나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도망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들 것이다. ‘인간이니까’라는 이유로 이해도 되고 용서도 된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여 주셨다. 그는 신성이 아닌 인간과 똑같은 조건에서도 우리와 같지 않으셨다.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올 때 그 희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그분도 두렵고 떨렸다고 한다. 사탄이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예수께서는 그 잔을 피할 수 있는 선택권을 여전히 가지고 계셨다.
그대의 교훈을 듣고 교회의 활동에서 선두를 차지하고 있던 제자 중 하나가 그대를 배반할 것이다. 그대를 가장 열심히 따르던 자 중에 하나가 그대를 부인할 것이다.모든 사람이 그대를 버릴 것이다. 그리스도의 온 영혼은 그 생각을 몹시 싫어하였다. 그분이 구원하시고자 했던 자들, 그분이 그렇게 극진히 사랑한 자들이 사탄의 음모에 연결되리라는 사실은 그분의 영혼을 깊이 찔렀다. 투쟁은 무서웠다. 그 투쟁의 크기는 유대 민족과 그분을 고발하고 배반한 자들과 죄 가운데 놓인 이 세상의 죄악을 합친 크기였다. 사람들의 죄악이 그리스도를 무겁게 억눌렀으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의식함으로 그분의 생명은 파쇄(破碎)되고 있었다 (DA, 687).
극도의 고통과 두려움이 가련한 예수님을 뒤흔들었다. 그때 인간 예수님은 나보다 25년쯤 젊은 나이였다. 이제는 그만 아버지께로 돌아가고도 싶으셨을 것이다. 너무나 피하고 싶었던 순간이었으리라. 그동안 수많은 병자를 고쳤고 이적도 베풀었고 우둔한 사람들을 깨우쳤고 외로운 자들을 위로했으니까,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예수님은 그 위기를 충분히 피하실 수 있었다.
능력이 넘침에도 불구하고 참아주는 것과 무능해서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참아주신 것이다. 그렇게 그분은 참아내고 계셨다.
그런데 한편, 같은 상황에서 그분께 사랑을 공언하던 제자들의 행동은? 좀 납득하기 어렵다. 그들의 선생이 자신들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하셨다는 걸 그분과 함께한 몇 년 동안 수도 없이 들었고 배웠을 텐데…. 그들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저희 생명을 스스로 구원하겠다고 극한의 두려움과 외로움에 놓인 가련한 선생을 버리고 모두 도망한 것이다. 그토록 강하고 담대하셨던 분이 기절할 만큼 연약해졌을 하필 그때 말이다. 곁에 있어 그분을 위로했어야 할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다.
제자들은 그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폭도들에게 굴복하시는 예수님을 힐책하였다. 분노와 공포 가운데서 베드로는 이제 그들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제의하였다. 이 제의에 따라서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DA, 697).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의 안위를 염려하셨다. 자신을 응원하고 격려하고 위로해 주었어야 마땅한 사람들에게 배신당하셨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박한 인류의 운명을 감지하신 그분은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가셨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다. 자애라는 표현으로도, 희생이라는 표현으로도, 그 어떤 인간의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로 뭉뚱그린다.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그 순간에도 인간을 가엾게만 여기신 분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통을 희생으로 치르시고 주저 없이 인류의 구원을 선택하셨던 분이다.
그런 그분에게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그분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위로와 격려와 감사와 사랑을 아낌없이 퍼부었어야 할 제자들도 이제 그분 곁에 더는 없었다. 3년 반이라는 기간을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분이 베푸시는 사랑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이때까지도 구원의 놀라운 계획과 진행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음에도 제자들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기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험에 들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인간이었다. 결국 예수께 힘이 되었던 존재는 늘 함께했던 제자들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와 천사들이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기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요한복음 16:32).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나였으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 믿으며 살아간다. 적어도 나는 제자들과 같지는 않았을 거라 확신하며 착각한다. 때때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았던 많은 순간이, 나를 우선으로 여기며 선택했던 그 순간들이 우리도 제자들처럼 도망하는 순간이었음을 우리는 자주 간과한다.
혼수상태에 빠진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여 스스로 살길을 찾았지만, 그들은 어쨌든 십자가의 길을 지켜보았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참아내시는지를, 십자가 죽음의 순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그들의 눈으로 보았고 깨달았다. 그 깨달음의 경험은 훗날 간증으로 나타났다. 예수님 승천 후 제자들은 현장에 나가 그 경험을 간증하면서 장렬하게 전사한 것이다. 순교였다.
자신들의 배신과 예수께서 용서하신 경험은 그들이 충분히 순교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 되었고 경험이 되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결말을 이어주셨다.
우리도 가능하다. 비록 그동안 자주 도망했을지라도 예수님을 만났던 소중한 경험들은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를 건져낼 것이다. 매일 말씀을 읽었던 경험이 우리에게 닥쳐오는 위기를 침착하고 평화롭게 대처해줄 것이며 꼭 필요한 순간에 악을 저항하는 힘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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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위의 책에 있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