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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팔룡 Jul 30. 2021

에스키모는 이글루에 살지 않는다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사례로서 에스키모의 이글루가 종종 거론된다. 30년 전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에스키모는 자신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얼음으로 집을 짓고 살아간다는 식의 서술이 나왔다. 아마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대부분 에스키모가 얼음집을 짓고 살아간다고 믿을 것 같다. 문명이 도입되면서 과거의 풍습이 사라졌다는 것은 나름 짐작하겠지만 에스키모가 이글루를 전통적인 가옥구조로 삼았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크나큰 오해이자 편견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얼음덩이로 온 사방과 지붕까지 둘러쌓아 삶의 보금자리로 삼는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최소한의 난방과 취사를 하면 얼음이 녹아내릴 것인데 이런 곳에 사시사철 사람이 기거를 할 수가 있을까? 북극에 얼음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소박하나마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건축 자재를 구해다가 따뜻한 집을 짓고 살겠지, 객기 부리듯이 얼음집에 사는 게 좋은 사람이 어딨겠는가. 

실제 그들과 장기적으로 접촉해본 사람들에 따르면 이글루는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고 사냥이나 야외활동을 위해 임시로 구축한 오두막 같은 시설이라고 한다. 사냥을 나왔는데 썰매 같은 운반수단이나 사냥도구들을 잠시 보관해놓을 곳도 없다면 활동을 하다가 소지품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안정적인 활동을 위해 베이스캠프 같은 것을 차려놓은 것이 이글루다. 이런 것을 주거 공간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수박밭에 잠시 와서 원두막에 머물러본 사람이 한국 사람은 원두막에 산다고 하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실제 그들을 만나서 생활해보는 정도의 검증을 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체온, 자연환경, 최소한의 인간 생존 조건을 생각해보기만 해도 이글루에서 사람이 산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진짜 북극 체험을 해보지 않아서 편견을 걷어내지 못한 것이 아니다. 중등교육 정도만 받은 사람도 스스로 익힌 지식과 추론을 통해 터무니없는 편견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나는 타인의 삶에 대해 경험해보지 않고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정형화된 경험과 타성에 젖은 행동양식과 권위주의가 우리를 얼마나 망가뜨리고 있는지 쓰고 싶다. 

체험을 통해 지식을 확정짓고 검증할 수 있겠지만 꼭 체험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성과 추론을 통해 사고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근시안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이글루에 에스키모가 산다는 명제에 의문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북극에서 가서 에스키모를 접해봐도 여전히 편견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어디엔서가 이글루를 보면 즉시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된다. 교과서에서 에스키모가 이글루에서 산다고 그랬는데 진짜 그런가 보네? 진한 체험을 해봐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성과 추론이 없는 경험과 체험은 이와 같이 사람을 마비시킨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 중에 한 사람은 과거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로 운을 떼는 습관이 있었다. 현장에서 근무를 해봤기 때문에 누구보다 현실을 잘 안다는 그의 말은 진실성이 있다고 보인다. 땡볕에서 노가다를 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 건설현장에서 몸담아 보기도 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런 식의 현상 집착은 권위주의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연역법으로 구성되는 인간의 이성은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어 준다. 세부적인 지식이나 체험이 부족하여도 논리적인 체계를 갖추어 과감한 추론을 하도록 인간에게 용기를 준다. 가설에 모순되는 지점이 목격되어도 아인슈타인은 이성과 보편성의 힘을 믿고 상대성 이론을 제출하였다. 수학적으로 계산된 포탄의 궤적을 확신하기 때문에 처음 보는 지형에서도 포병이 포를 쏠 수 있다. 경험론의 함정을 벗어나 이성과 추론을 멋들어지게 적용하는 사례들을 일일이 거론할 필요도 없다. 인류가 이루어온 대부분의 성취는 반복적인 연산 학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과감한 가설 제기에서 나온다.

국토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주택공급을 아무리 확대해봐도 가진 자들의 독식구조만 강화할 뿐 서민의 주거안정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가설이 있다. 공간의 제한성을 무시하고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까지 자유경쟁 시장에 맡겼을 때 사회가 더욱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런 저런 사례 같은 것을 찾아볼 것도 없다. 그런데 단기적으로 경험을 해보면 공급 확대가 집값을 떨어뜨리는 게 맞다. 그러다 보니 늘 과거의 실수를 반복한다. 짜내고 또 짜내는 방식으로 국토가 일부 사람들에게만 편중된다. 애초에 이성과 추론, 문제의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고통이 심해도 어쩔 수 없이 또 감내하게 되어 있다.

호흡기 질환에 대처한다면서 불평등한 방식으로 일부 계층만 짜내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 2년이 다되어간다. 종교, 집회 등 기본권까지 포기하고 일부 사업자의 경제활동까지 완전히 봉쇄하고 있지만 이에 상응하는 정도의 보상은 주지 않은 채 말이다. 학생들이 학교에 제대로 출석 못 한 것이 3학기가 넘었고 이제 2년을 채울 기세다. 과연 이것이 세계가 극찬하는 K-방역인가? 이쯤 되면 기본적인 개념이나 원리를 잘못 채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법한데 그렇지 않다. 확진자 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마른 수건을 짜듯 더욱 고립시켜서 해결책을 찾는다. 

설령 이렇게 해서 숫자가 주는 불안공포에서 잠시 빠져나온다고 해서 기뻐할 것은 없다. 집단적으로 경험한 마른 수건 짜내기식 동원체제가 언제라도 등장할 수 있는 선례가 되기 때문이다. 계기판에 나온 숫자는 그저 조종사의 혼란만 조장할 뿐. 이성과 추론의 동력을 애초에 장착하지 않았던 비행기가 제멋대로 날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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