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선생님의 <우리글 바로 쓰기>를 추천합니다
저는 1993년에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입학 후 첫 학기에 구내서점에서 ‘민법총칙’이라는 전공서적 한 권을 샀습니다. 책을 사서 가방에 넣고 집에 왔습니다. 집에 와서 책을 펼쳐보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정신이 몽롱한 것이 아니라 읽을 수 있는 글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 한자어가 많기는 하지만 그렇게 많을 줄 몰랐습니다.
“社會生活의 準則은 ‘當爲의 法則’이다. 當爲의 法則에는 法, 道德, 慣習, 宗敎 등이 있다. 이 中에서 法의 槪念에 關한 定說은 아직 없지만, 法은 그것을 지킬 것이 社會力(國家權力)에 의하여 强制되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을 읽기 위해서 한자사전을 10번은 넘게 펼쳐야 했습니다. 읽기는 읽었지만 이해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민법총칙 책에는 조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글자가 한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한글로 된 문장도 이해하기 어렵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 이 문장을 읽고 타당하다고 말하는 것인지, 타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다 알다시피 한국 법학은 역사적으로 일본 법학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는 근대법 체제 도입 과정에서 일본 법을 모법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민법, 형법, 상법 등이 그대로 시행되면서 한국 법체계의 기반을 형성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일본 법의 영향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많은 한국 법률 용어가 일본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예를 들어, '검사', '변호사', '재판', '소송' 등의 용어는 일본식 한자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공소시효', '증거능력', '소유권' 등도 일본 법학에서 유래된 용어들입니다.
앞서 말한 "하지 않을 수 없다"와 같은 표현도 일본어의 문법적 구조와 표현 방식을 반영한 것입니다. 일본어에서는 이중 부정 표현을 통해 강한 긍정의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이 일반적인데 일본어의 ‘〜しないわけにはいかない’라는 말을 그대로 해석해서 우리말로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법학을 공부하기 전에 법학을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저는 입학과 동시에 법학이라는 학문을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냈습니다. 겨우 졸업은 했지만 전 어디에 나가서 법학과를 졸업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저같이 한자가 보기 싫고 문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디지털 시대는 혁명과도 같은 편리함을 주었습니다. 인터넷, SNS, 모바일 기기, 유튜브 등의 플랫폼은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바꾸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소통과 정보 습득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측면을 함께 가져왔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문해력 저하입니다.
최근 한 어린이집 교사가 올린 온라인 커뮤니티의 글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글에 따르면 "보통 'OO를 금합니다'라고 하면 당연히 금지한다는 뜻이지 않나. 그런데 일부 학부모들은 '금'이 좋은 건 줄 알고 '가장 좋다'라는 뜻으로 알아듣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우천 시 OO로 장소 변경이라고 공지하면 '우천 시에 있는 OO 지역으로 장소를 바꾸는 거냐'라고 묻는 분도 있다"라며 "섭취·급여·일괄 같은 말조차 뜻을 모르고 연락해서 묻는 분들이 예전에는 없었는데 요새는 비율이 꽤 늘었다"라고 했습니다.
그 어린이집 교사는 "단어뿐만 아니라, 말의 맥락도 파악을 잘 못한다. 'OO 해도 되지만, 하지 않는 것을 권장해 드립니다'라고 했더니 '그래서 해도 되냐, 안 되냐'라고 문의한 학부모가 네 명이었다"라며 "최대한 쉬운 말로 풀어내서 공지해도 가끔 이런다"라고 불만을 이야기했습니다.
문해력 논란은 이번만이 아닙니다. 한 유명 유튜브 업체의 ‘모집인원 0명’ 논란, ‘사흘’을 4일로 이해한 네티즌의 에피소드, ‘심심한 사과’에 대한 해석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웃지 못할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이번에 언론들에 의해서 재소환된 지난해 3월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한양대 국어교육과 조병영 교수의 방송 내용도 다시 화제가 되었습니다. 조병영 교수는 "수학여행 가정통신문에 '중식 제공'을 보고 '왜 중국음식을 제공하냐, 우리 아이에게는 한식을 제공해 달라'라고 하고, '교과서는 도서관 사서 선생님께 반납하세요'라는 글을 보고 교과서를 사서 반납하는 일도 벌어졌다"라고 말하며 요즘 세대의 문해력 논란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문해력 저하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인터넷과 모바일에 익숙해지다 보니 짧고 간결한 콘텐츠가 대세가 되었습니다. SNS와 유튜브에서는 짧은 텍스트와 영상이 넘쳐납니다. SNS에서 긴 글을 쓰면 그 긴 글은 쓴 사람만 읽는 일기가 되어버릴 정도로 사람들은 긴 글을 읽지 않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정보를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두다 보니 사람들은 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점점 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수시로 울리는 디지털 기기의 알림은 복잡하고 긴 텍스트에 대한 집중력을 떨어뜨리며 사람들의 주의 집중 시간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주말 아이들과 경주 불국사에 갔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말해 주기 위해 책을 찾거나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검색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곧바로 유튜브 검색창에 '불국사'를 입력했습니다.
이와 같이 정보에 대한 습득도 책과 같은 텍스트 매체보다는 유튜브와 같은 비디오 플랫폼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정보 전달의 대명사인 신문의 경우도 요즘은 문자로 된 기사보다는 유튜브 영상 제작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이러한 세태의 반영일 것입니다. 알다시피 영상은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각적 요소와 음성을 사용하므로, 독해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독서와 글을 통한 학습의 기회는 점점 더 줄어들고 사람들의 문해력도 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왜 사람들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인 '문해력(文解力)'에만 집착하고 글을 짓는 능력인 '문장력(文章力)'에는 관심을 가지 않을까요? 문해력 논란이 있는 문장이나 어휘들을 우리말을 사용하여 아름답고 쉽게 바꾸는 노력은 왜 하지 않을까요?
어린이집 교사가 말한 'OO를 금합니다'라는 문장은 ‘금(禁)'이라는 한자어를 사용하여 읽는 사람에게 금(金)으로 오해하지 않게 'OO 하지 못합니다'라고 쉽게 쓰면 됩니다. ‘OO 해도 되지만, 하지 않는 것을 권장해 드립니다'라고 쓰는 것보다 'OO 해도 되지만, 안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 듣는 사람이 훨씬 더 정겹게 느끼고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요?
조병영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말한 '중식 제공'이라는 말도 점심이라는 보통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을 놔두고 왜 '중식'이라는 혼동을 야기하는 단어를 쓰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도서관 직원'으로 쉽게 쓰면 될 텐데, 굳이 '도서관 사서(司書)'라는 잘 안 쓰는 말로 어렵게 표현할까요?
'우천 시'는 '비가 올 경우'로, '심심한 사과'는 '진심 어린 사과' 또는 '깊은 사과'라고 하면 됩니다. 한자를 사용하면 있어 보이겠지라는 잘못된 인식과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온 일본식 한자어의 오남용 때문에 우리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한자어를 쓰고 있습니다. 요즘은 우리말로 순화가 많이 되었다고 하지만 공무원들의 문서나 정치인들의 발언 등을 보면 우리말로 써도 충분히 가능한데도 일부러 한자어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휘는 언어의 재료이다. 신선하고 다양한 재료가 있어야 국도 끓이고, 찌개도 끓이고, 볶음도 하고, 찜도 한다. 어휘도 마찬가지로 내가 여려가지 말들을 많이 알고 있으면 나의 감정을 잘 설명할 수 있고, 상황도 잘 설명할 수 있고 감정 교류를 잘할 수 있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조병영 교수가 말한 내용입니다. 조병영 교수는 문해력에 대한 중요성을 말하며 이야기했지만 문장력에도 저 말은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소통은 듣고 읽고 이해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하고 쓰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글 바로 쓰기>라는 책의 서문, 아니 들어가는 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어려운 말, 남의 나라 글자말과 남의 나라 말법을 자랑삼아 쓰고 싶어 하는 미친 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람대접을 받고 살아갈 자격이 없다…. 밖에서 들어온 잡스런 말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는 중국글자말이요, 둘째는 일본말이요, 셋째는 서양말이다. 이 세 가지 바깥말이 들어온 역사도 중국글자말-일본말-서양말의 차례가 되어 있는데, 중국글자말은 가장 오랫동안 우리말에 스며든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일본말은 중국글자말과 서양말을 함께 끌어들였고 지금도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깊은 뿌리와 뒤엉킴을 잘 살펴야 한다. 정말 이제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넋이 빠진 겨레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겠다."
‘거버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바로 레귤레이션’이라고 말하는 윤석열 대통령을 포함한 우리나라 정치인들과 공무원들, 교수님들, 그리고 문해력과 문장력 모두 키우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 쓰기> 책을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