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팬이랑 다 놀았니? 현실로 나가자

최예지 작가 개인전에 다녀와서

by 시드업리프터

제주에 정착한 최예지 작가를 알게 된 건 몇 년 전이다. 인스타그램에 빼곡히 적은 고민과 진심의 글이 공감이 되면서 좋아요를 한 번씩 누르기 시작했는데, 그 뒤로 나는 그녀의 팬이 되었다. 육지에 살다가 제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정착하게 된 이야기. 소중한 사람을 만나 아이 둘을 갖고 있는 그녀의 사생활도 있지만 무엇보다 작가로서, 엄마로서, 계속 일궈가는 그녀의 삶의 궤적을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겪는 것 같았다.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지만 매번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적는 글이 매번 좋았다.


그러다 탁상달력을 사게 됐는데 최예지 작가가 그린 삽화가 마음에 들어서 한 해의 쓸모가 지난 달력을 뒤집어서 계절마다 그림을 바꿔보는 매력이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포근한 그림체가 생활 속 은근한 긴장감을 녹여주는 그런 존재였던 것 같다.


최예지 작가가 서울 무서록에서 <열 번째 사계절, 그려진 마음> 전시를 열게 된 것도 똑같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통해서였다. 전시 시작일로부터 한참 이른 시기였지만 몇 주 전부터 날짜를 못 박아뒀다. 이 날은 경복구으로 외출코스를 일부러 짰을 만큼 그녀의 전시를 보는 게 그만큼 진심이었으니까.


골목길이라 조금 헤맸는데, 발견하고 나니 그 전시장 건물 만의 운치가 있었다. 볕이 좋았던 한낮에 그녀의 전시장은 햇살이 한가득 들어와 공간을 한껏 따스하게 만들어줬다. 나는 작가님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오래 봐왔지만 작가님은 나를 모른다. 그래서 작가님과 눈을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반가운 눈인사를 건네야 할지, 내 텐션만큼 밝게 작가님!!! 하고 쪼르르 달려가야 할지, 말없이 전시만 보고 조용히 나가면 될지 같은 작은 상상을 했다. 정작 말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나에게 작가님은 눈을 맞추며 진하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당황하는 속마음과 달리 마치 웃어른이 인사받는 듯한 뉘앙스가 돼버렸다.

옛날의 가정집 같은 주택식 구조에 방이 여러 개였다. 벽을 따라 걸려있는 그림 작품이 펼쳐져 있었는데 기다렸던 시간이었기 때문에 진심을 다해 눈에 담는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작가의 말_어린 시절의 경험을 돌아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모두에게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그대로 기억하는 그 시절의 ‘내면 아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면 아이는 과거에 치유하지 못한 상처로 마음속에 자리 잡아 이따금 우리를 괴롭힙니다. 내면 아이의 상처를 치유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장 가까운 관계인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말이지요.


#작가의 말_상처받은 마음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치유는 시작됩니다. 우울증을 앓다가 심리상담가를 찾아갔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과거의 내면 아이를 충분히 다독여주는 일이었어요. 그게 어떤 거냐고 상담사님께 물으니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를 떠올리며 마음껏 슬퍼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중략) 그 과정의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습니다. 그림 속 아이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자라고 있는 것을. 그 아이는 우리 모두의 내면 아이입니다.


언젠가 마크로스코 내한 전시가 열렸을 때, 무의식의 상처를 치유해 준다, 그림 앞에서 펑펑 울었다는 등의 반응이 실린 기사를 접한 적 있다.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단조로운 페인팅이 캔버스를 한가득 채워져 있는 단조로운 한 단면일 뿐인데 치유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 사실일까? 그 심오함을 이해하지 못한 대중의 나는, 오늘 최예지 작가가 ‘내면 아이’를 마주하기 위해 글과 그림을 적었다는 도입부부터 울컥해 버렸다. 목 울대가 꺼이꺼이 하려는 느낌이 제법 낯설었고 눈물이 고이려는 내가 쑥스러워서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숨길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감정이람. 예술을 통해 원작자의 진심이 나에게 와닿았던 순간은 처음이었다.


#작가의 말_(아이는 나를 비춰주는 관계였다.) 타인이 있어야 나다움에 대한 디테일을 알아갈 수 있다는 것. 관계를 통해 더 나답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 엄마로서의 나, 아내로서의 나, 작가로서의 나. 내가 가진 모든 역할 속의 나는 모두 나다. 곡 나 혼자 동떨어져 있어야 온전한 내가 되는 건 아님을 알았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아름다운 해방이었다.


관계를 생각하면, 우리는 늘 어딘가에 매여있다. 엮임 상태를 의식하는 순간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힘 빼고 그대로 수용하다 보면 관계라는 게 나를 가두는 벽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바람에도 살랑이고, 물에도 흠뻑 젖기도 하는 유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최예지 작가님의 그림은 천진난만한 내면 아이를 나타내는 동심과 단순한 선, 면이 모여 서정적인 동화로 완성되는데, 글은 참 담백하다. 고민의 매듭을 잘 풀어서 차분하게 그 실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수납장에 정리한 것 같이 정돈된 상태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시간은 절대 되돌릴 수 없고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고,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여전히 똑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이번 해의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볼 수 없기에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삶의 일부라는 것. 인생의 어느 지점까지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 내 안에 생긴 고통은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기에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깨달음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랬구나. 아팠구나. 잘하고 싶었구나.’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선택할 수 있다. 더 안고 갈 것인가, 놓을 것인가 – 경계를 지을 수 있다.


좋은 영향일까? 전시 자체는 마음이 따뜻하고 힐링이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내 마음에 내면아이의 존재가 꼼지락 틈을 비집고 나왔다. 나의 내면 아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게 요즘 들어 자꾸 존재감을 드러낸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해줘야 할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전시를 보고 온 이후로 이 생각 저 생각이 스치고 있다.

밝고 쾌활한 나, 알고 보면 내 부정적인 모습을 스스로가 안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쿨하고 털털한 나, 알고 보면 낮은 자존감이었던 것은 아닐까? 특히 연애에 있어서.

왜 나는 이런 점이 부족할까? 지금까지 내가 장점을 묻어두고 단점만 고치려고 나를 다그쳤을까?

정서적인 대화가 부족하고 무조건적 지지가 부족했던 어린 시절의 나, 지금 와서 부모님께 원망감이 드는 게 무슨 감정일까? 감사함 보다 아쉬움과 미움이 서려있다. 너무 늦은 나이에 들어온 오춘기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처럼 살게 되겠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그 마인드셋이, 이제는 내가 반복하지 말아야겠다고 대물림을 끊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점도 그렇다.

물음표를 던지며 스스로 성찰하고 사색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어떡하지? 그러면 뭐가 달라지지?


#작가의 말_어린 시절 수용 경험이 없었던 아이가 자라 여전히 많은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특히 과거에 벌어진 일과 스스로 선택한 것을 후회하니,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한 채 우울했다. (중략) 내가 처한 상황과 감정을 판단하거나 단정 짓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첫 번째 치료 순서였다.


최예지 작가 전시를 계기로 내면 아이를 인지-내면 아이의 감정 확인하기-내면아이를 이해하기의 과정을 지나고 있다. 올해는 유독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소득이 없었다가, 방향을 찾게 됐고, 깊이감이 생겼다고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 이번 전시는 피터팬과 놀이를 끝내고 현실로 나오라는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서대문역 길바닥에서 입맞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