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의 폭주 그리고 감독과의 대화
너무 더웠다는 것 말고는 생각이 안 날.. 줄 알았는데 덥고 힘들어 죽을 것 같은 훈련들이 머릿속에 또렷하다. 우리는 8월 말 어느 풋살장에서 모였다. 오후 3시에. 이제 날씨가 좀 선선해져서 괜찮을 거란 ㅋ의 말을 믿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대는 했는데, 그냥 한여름 오후 3시의 날씨였다.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뜨거운 기운을 느끼고,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저 멀리 풋살장에서 여태까진 본 적 없던 접시콘과 훈련용 사다리를 보고야 말았다. 한층 철저해진 모습이었다. 왜 하필 오늘 이렇게 철저한 구색을 갖추었지..?
우리는 오늘도 둥그렇게 모여 스트레칭을 하고, 제자리 뛰기로 훈련용 사다리의 좌측, 중앙, 우측을 옮겨 다녔다. 깨금발로도 사다리의 좌측 중앙 우측을 옮겨 다녔다. 사다리를 아주 알차게 쓰는 것 같았다.
접시콘의 활약은 더 대단했다. 폴짝폴짝 뛰는 훈련은 물론(나는 접시콘마저 밟아서 찌그러뜨리고 말았다) 풋살장 여기저기에 사선으로 놓인 접시콘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방향을 틀어야 할 때엔 속력을 조절해가며 뛰는 훈련을 했다. 또 콘을 따라 공을 몰고 가는 훈련, 감독과 패스를 주고받다 슈팅하는 훈련 등을 했다. 접시콘과 사다리를 활용한, 한껏 다양해진 훈련을 하나씩 끝낼 때마다 우린 자연스럽게 그늘을 찾아 모이게 됐다.
이날은 청소년 3명이 팀에 합류한 날이었다. 지메시와 천채와 여님이 그들이다. 여님은 중학교 축구팀 주장이라고 했다. 그는 드리블하면서 절대 공을 뺏기는 법이 없었다. 수비를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고 느꼈지만, 방법을 모르니 그냥 무작정 쫓아다녔다. 그날 찾은 풋살장엔 시계가 있었는데 나는 시계를 보며 얼른 시간이 지나가기를, 얼른 여님의 폭주도 지나가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첫 뒤풀이
우리는 이날 처음으로 뒤풀이를 가졌다. 풋살장 맞은편 스타벅스에서 **FC의 회원들은 회비를 인상하자는 데 합의를 봤다. 그렇게 정해진 회비는 성인 2만 원, 청소년 1만 원이었다. 1회만 경기에 참여할 시 5천 원의 참가비를 내기로 했다.
이날 나는 훈련 전 물놀이를 다녀와 위의 속옷 없이 경기를 뛰었는데, 그 얘기를 하니 ㅋ이 눈치 아닌 눈치를 줬다. 앗,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감독님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스포츠 매장에서 알바를 할 때, 손님들에게 러닝할 땐 이 스포츠 브라를, 트레이닝용으론 이 브라를 해야 한다고 권했지만, 내가 뛰어본 바론, 그것들은 오히려 없는 것이 도움이 됐다. 내 가슴은 좀 출렁이더라도 압박감보다는 해방감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내가 노브라 이야길 하자, 팀원 두 명이 자신도 노브라인 채로 뛰어보고 싶다고 했는데, 왜 한국에선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감독님은 당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말없이 쿨라임피지오를 들이키던 감독님….
감독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감독님도 팀원과 똑같이 회비를 낸다는 데 나는 꽤 놀랐다. 감독님한테 훈련비를 내는 것도 아니고, 회비를 받는다니..! 나는 이 시스템이 너무 놀라웠고, 궁금했다. 이 감독님은 왜 회비까지 내면서 우리 팀을 맡는지, 구단주 ㅋ은 어떻게 이분을 섭외했는지(회비까지 받아가며), 왜 이분이어야 했는지, 코치인 ㅁ은 왜 서울에서 원주까지 와 가며 코치를 한다고 한 건지!!(ㅋ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의문은 뒤풀이 2차에서 풀렸다. 감독을 섭외한 ㅋ은 지금의 감독님이 우리와 잘 어우러지고, 코드가 맞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축구를 처음 접하는 우리에게 감독님만큼 적격인 사람은 없었다. 감독님은 섬세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우리에게 예의를 갖췄고, 우리가 답답한 플레이를 해도 갑갑해하는 법이 없었다. 경기 후 총평을 할 때는 ‘좋은 말’이 97프로를 차지했다(얼마 안 가 우린 그가 칭찬봇이라는 걸 알게 됐다). 훈련을 거듭하자 나도 감독님이 꼭 우리 감독님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론 감독님이 표정 관리해야 할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장담은 못 하지만).
아, 감독님에겐 왜 우리 팀을 맡은 건지 물었다. 감독님은 축구가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성인 남성 축구팀은 원주에도 많거니와 지금 감독님은 우리랑 축구를 하는 게 아니지 않나. 감독님에 대한 의문은 뭔가 풀리려다 만 느낌이었지만, 난 감독님이 우리와 계속 코드가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언젠간 감독님과 꼭 축구를 할 날이 오기를. 감독님을 위해서라도.
이날의 메모
계단 올라갈 때, 러닝할 때 뒤꿈치 들고 뛰기
개인 공을 갖고 연습하면 볼을 다루는 데 감이 잡힌다.
2019년 8월 25일의 풋살 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