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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얼 Dec 29. 2024

[그데담 054] 생각, 글, 말 (2)

[2/3]






 “2부 시작하기 전에 궁금한 거.”


 “뭔데요?”


 “무슨 고기 먹고 싶어요?”


 “음머냐 꿀꿀이냐 묻는 거?”


 “아니, 음머 먹기로 했잖아. 부위.”


 “난 목살.”


 “음머에 목살은 없습니다, 손님.”


 “지금 지쳐서 빠릿빠릿하게 구울 체력이 없다. 그냥 두툼한 목살 사서 천천히 구워먹자.”


 “내가 구워주면 되지.”


 “고기를 굽는데 남에게 집게를 맡길쏘냐!”


 “나 참, 알았어요.”


 “근데 그건 갑자기 왜?”


 “시간이 애매해서. 마트가 열까 싶네.”


 “괜찮아. 의지와 돈만 있으면 고기는 언제 어디서든 구할 수 있어.”


 “오케이. 그럼 2부 시작.”


 “하던 얘기로 돌아가서, 방금 이야기를 쭉 듣다가 뭔가 이상한 게 있지 않았어요?”


 “응? 뭐지?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뭘 못 알아들었나?”


 “잘 따라오는 것 같던데. 그거 말고, 주변 사람들이랑 당신이랑 반대 아냐?”


 “...아! 그러네!”


 “그래. 그래서 처음에 당신 이야기 듣고 드문 케이스라고, 주변이랑 반대라서 금방 흐름을 못 잡았다고 한 것도.”


 “그게 그 얘기였구나.”


 “당신은 내 말이 듣기도 어렵고 이해도 어려워. 다른 사람들은 그나마 말이 더 쉬운데 말이지. 반면 글은 읽기는 어려운데 왜인지 이해는 쉬워. 다른 사람들은 읽기도 어렵고 이해도 어려운데.”


 “응.”


 “그럼 지금까지 내가 내린 나에 대한 전제, 그리고 당신에 대한 전제도 모두 옳다고 가정할 때, 그럼 당신의 성향도 나오겠다.”


 “그건 모르겠어.”


 “나는 해설적이어야 하는 말을 함축적으로 해. 근데 당신은 내 말이 어려워. 그럼 당신의 성향은 말이 함축적이어야 돼. 당신은 그게 듣기도 편하고 이해하기도 쉬운 거지.”


 “...응? 반대 아니에요? 도령 말대로 내가 말에 대해 함축적인 성향이라면 함축적으로 말하는 도령 말이 듣기도 쉽고 이해도 잘 돼야 하잖아. 나는 둘 다 어려운데?”


 “그 이유는 두 가지라고 보는데. 당연하지만 내 추측이야.


 “응.”


 “잘 생각해봐. 내 말이 어려운 이유가 함축적이라 그런 거야?”


 “응?”


 “그냥 내용이 어려운 게 아니라?”


 “......그런가?”


 “말은 원래 해설적 특성이 있으니까 모든 사람들은 해설적인 말이 듣기도 쉽고 이해도 편해. 물론 적당한 양이어야 하지만. 근데 내가 보기엔 당신은 말이 함축적이어야 이해가 편해. 당신의 연역적인 성격과 직관력이라는 특성 때문에. 그래서 내 말이 함축적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이해가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지. 이게 내 말에 대해 이해가 어려운 이유.


 “...일단 그건 알겠어. 내용 자체가 어려워서 이해가 어렵다는 거지? 그럼 듣는 건? 이해야 그렇다 해도 듣는 건 쉬워야 하잖아. 함축적인 사람에게 함축적으로 말해주는데 왜 듣는 것도 힘들어?”


 “아까 말했잖아. 전부터 당신에게는 내 특성과 달리 최대한 해설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그것이 아무리 함축적 언어를 여럿 늘어놓은 것이라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말은 충분히 해설적이지.”


 “음?”


 “내가 역순으로 말해서 좀 헷갈릴 수가 있겠다. 순서대로 말하면 당신은 말이 함축적이어야 편한 사람인데, 내가 당신에게 해설적으로 말을 하니 그동안 듣기 어려웠던 거야. 게다가 내용이 어려우니 이해도 힘들지. 게다가 원래 함축적으로 말하던 내가 해설적으로 말하려고 하니 전달률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고. 이게 내 말에 대해 듣기가 어려운 이유.”


 “...근데 왜 나한테만 해설적으로 말해주는 거야?”


 “가장 큰 이유는 이해를 위해서야. 내용이 어려우니까 풀어서 반복하는 거지. 비슷한 예시를 계속 들면서 이해를 돕는 거야. 또 그럴 수 있는 게, 당신은 해설적인 말에 대해 부작용이 적은 사람이니까. 보통 오해와 곡해는 말이 함축적일 때 자주 생기지만, 반대로 해설적일 때 그러기도 하거든. 말이 길어지다보면 상대가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점차 모호해지다가 결국 듣는 이가 알아서 해석해버리는 상황도 있으니까. 근데 당신은 말이 길어졌다고 헷갈려 하거나 전혀 다르게 알아듣지 않아. 사실 해설적인 말로 대화를 할 때 내가 가장 경계하는 부분이 뭐냐면, 앞에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사실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경우거든. 특히 이런 사상이나 추상적 소통은 더욱 그러고 쉽고. 근데 당신은 안 그러니까 이해를 위해 해설적인 말을 해도 부작용이 없는 거야. 평균화해야 하는 내 기준만 살짝 무시해주면 되지.”


 “응, 이해했어. 이게 하나에도 제반 사정과 근거가 많구나.”


 “그런 셈이지.”


 “근데 내가 함축적인 말을 선호하는 것을 알면서 왜 계속 해설적인 말을 해준 거예요? 단지 어려운 내용의 이해를 위해? 차라리 함축적으로 말해주는 게 이해하기 더 쉽지 않을까?”


 “나도 당신의 특성을 최근에 깨달았거든. 말을 듣고 이해하는데 해설과 함축 중에 뭐가 더 편한지 몰랐어. 그래서 일단 보통의 기준대로 해설적으로 한 거지. 또 내용 전달을 위해 반복하다 보니 더 해설적으로 된 부분도 있고. 그냥 함축적으로 말을 하고, 그 뒤에 당신이 먼저 물어오기 전까지 혼자 생각하게 두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이걸 요즘에서야 생각해보게 된 거야. 그래서 부분적으로 바꾸는 중이었고. 이해를 위해 해설적이어야 하는 부분은 그대로 하고, 안 그래도 되는 부분은 원래대로 함축적으로 말하고. 혹시 요즘 그런 거 못 느꼈어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왜인지 이해했어요.”


 “당신은 보통 사람이랑 반대인 거야. 많은 사람들이 해설적 말을 선호하는 ‘설명이 필요한 쪽’이지. 반면 당신은 ‘설명이 필요 없는 쪽’이고. 근데 이건 단지 서로 다른 거야. 상하 관계나 우열 관계가 아니라 연역과 귀납이 서로 다른 것처럼.”


 “이 성향이 내 연역적인 성격과도 연관이 있을까?”


 “아마. 그렇다고 ‘오직 그것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 당신이 지금껏 받은 교육, 접한 환경, 주변인 등의 영향 역시 있을거야. 단지 이 성향에 가장 직접적으로 연동되는 당신의 특성이 연역과 직관이겠지.


 “응.”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아주 간혹 당신보다 더 소수가 있어. 어떤 거냐면, 입력과 이해가 반대 방향인 거야. 예를 들어보면 당신은 보통 사람들과 반대이긴 하지만 어쨌든 듣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같은 방향이잖아. 함축적 언어에 대해 입력도 쉽고 이해도 쉬운 것처럼. 근데 그 소수는 이게 반대인 거야.”


 “누군가는 함축적 언어에 대해 입력은 쉬운데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거야?”


 “정확해. 혹은 입력은 어려운데 이해가 쉬울 수도 있고.”


 “그럴 수가 있어?”


 “그럴 수 있지. 엄밀히 말하면 입력과 이해는 별개야. 대다수가 같은 것뿐이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야. 그러니 누군가는 그조차도 다를 수도 있지. 함축적 말을 들었을 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안 들어오는데 왠지 이해는 된다든가. 반대로 말이 귀에 탁탁 박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든가. 글을 읽었을 때 잘 읽히는데 이해가 안 되고, 안 읽히는데 다 읽고 나면 어째선지 이해는 되는 식으로.”


 “그럴 수가 있나.”


 “내가 본 당신은 입력과 이해가 같은 방향인 사람이니까 그런 성향이 잘 그려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근데 그런 사람도 있더라고.


 “부정하는 건 아닌데, 그런 건 그냥 경험이나 센스 등으로 알아먹는 거 아니야? 저 사람이 말하는 방식이 나와 안 맞고 답답하고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눈치껏 어떤 내용인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이해하는 것처럼.”


 “맞아, 그런 사람도 있지. 근데 생각해봐. 경험과 센스를 가지고 듣기 어려운 말도 이해를 할 수는 있어. 근데 듣기 쉬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건 이상하잖아. 그러니 센스로 알아먹는 사람과 방향이 반대인 사람은 서로 다른 성향이야.


 “음.”


 “아주 드물지만 그런 사람도 있었어. 폐가 한쪽은 정상위로 다른 한쪽은 역위로 붙어있는 것처럼 보통 같은 맥락으로 흘러가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사람. 근데 이건 곁가지 주제니까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응.”


 “그럼 이제 글. 당신이 내 글을 보면 읽는 것은 어려운데 이해는 쉽다고 했지?


 “응.”


 글은 말처럼 사람마다 개개인 별로 따로 주고받는 게 아니잖아. 그냥 쓰면 다 같이 보는 거니까. 말은 내가 당신과 할 때, 저 사람과 할 때, 다른 이와 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데 글은 그냥 딱 써놓으면 당신도 쟤도 걔도 이미 정해진 같은 활자를 보는 거잖아. 당신만을 위한 글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말과 다르게 나는 그냥 모든 글을 해설적으로 써. 아까 두 가지 이유로. 내 딴에는 특성을 맞추기 위해 글이 약간 말 같아지지. 말이 가진 특성을 가져와 글에다 묻히는 거야. 말을 하듯 글을 써. 쉽게 설명해서 함축적 글이 ‘3’이고, 해설적 말은 ‘1 2 3 4 5’ 이런 거라고 치자. 이게 글과 말이 가진 각자의 특성이지. 근데 글을 ‘2 3 4’ 정도로 늘려 쓰는 거야. 글과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하도록. 반대로 말을 할 때는 ‘1 3 5’ 이렇게 줄여서 하고. 글과 말을 중간 지점으로 평균내서 ‘말 같은 글’과 ‘글 같은 말’로 만드는 거야. 그러다보면 글은 양이 늘어나. 주제라는 본체가 늘어나는 게 아니야. 부가설명, 주석, 사족 같은 것들이 늘어나. 전달이나 이해를 위한 것도 있지. 일방적 통보 과정에서 오해나 곡해를 줄이려는 의도도 있고. 근데 글이 글 같지가 않아서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다른 스타일의 글이라서 그런지, 그도 아니면 줄었는데도 여전히 양이 많고 난잡한 설명도 많아서인지 사람들은 이걸 읽기 어려워해. 그들에게 글은 함축적이어야 하는데. '함축적'이라는 한 단어로만 말했지만 풀어서 설명하면 글에 필요한 요소만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거야. 글이 글 같지 않은 거지. 한 문장을 길게 늘여놓은 것 같고 이런저런 주제가 막 뒤섞여있는 것 같지. 그 사이사이에 잡소리도 끼워서 말이야. 그래서 그들은 내 글을 읽기 힘들어하고 이해도 어려워 해. 물론 어려운 주제나 견해 차이 때문이기도 하고. 근데 당신은 반대야.”


 “내가 글에 대해서 해설적인 특성이라서?”


 “맞아. 당신에게 글은 해설적이어야 해. 그게 당신의 특성인 거야. 근데 이상하지? 그런 성향이니 해설적이 내 글이 이해가 쉬운 건 알겠어. 근데 왜 읽기 힘들까? 지금 그 생각하고 있지?”


 “맞아. 그건 왜 그런 거야?”


 “...솔직히 말하면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어.”


 “그럼 내가 혹시 아까 말한 그 극소수의 그런 건가? 글에 대해서는 읽는 건 함축이 쉽고 이해는 해설이 쉬운 거.”


 “당신 생각에 그런 것 같아?”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왜 그런 거야? 반대로 내가 글에 대해 함축적 특성인 건 아닐까?”


 “그러면 이해가 잘 되는 게 이상하지 않아?”


 “예를 들어... 내가 이미 아는 내용이라서, 내용이 어렵지 않으니까 해설적이어도 이해가 잘 된다거나. 아니면 아까 말한 것처럼 경험과 센스로 이해한다던가.


 “......”


 “...아닌가?”


 “잘 듣고 있으니 계속 해봐.”


 “그러니까, 정리하면 나는 글도 함축적인 것을 선호하는데, 도령은 해설적인 글을 쓰잖아. 그래서 원래는 읽기도 힘들고 이해도 어려워야 정상일 텐데 도령 글은 대부분 내가 아는 내용이잖아. 글로 보기 전에 말로 미리 들을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아까 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성향이 일치해도 내용이 어려우면 이해가 어려울 수 있다며. 그럼 반대로 아는 내용이면 해설적인 글임에도 이해가 쉬울 수도 있지 않을까?


 “......”


 “......”


 “왜 내 눈치를 봐. ㅋㅋ


 “대답 없으니까 괜히 주눅 드네.”


 “내 생각에는... 완전 그럴듯한데?”


 “맞아? 그거야?”


 “말했잖아. 솔직히 나도 확실히는 모른다고.”


 “진짜 몰랐던 거야? 모른 척 하는 줄 알았어.”


 “그렇게 생각 안 해봤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


 “이 반응은 뭐지, 이 칭찬 같은 욕인가.”


 “욕 같은 칭찬이야. 논리에는 허점이 없어.”


 “다른 데는 있다는 걸로 들리는데.”


 “당신의 대답에 따라. 그 가정이 참이려면, 말로 미리 듣지 않아서 내용을 모르는 해설적 글은 이해가 어려워야 해. 그래?


 “......”


 “찬찬히 생각해봐.”


 “......아니, 그건 또 아닌 것 같는데. 모르는 내용이니까 당연히 이미 아는 내용만큼 쉽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나와 맞지 않다고 느낄 만큼 어렵... 지는 않은 것 같아.”


 “그래?”


 “응. 도령 글들은 내용을 알든 모르든 읽기만 어렵고 이해는 다 잘 되는 편이야.”


 “그렇지? 내가 봐도 그래.”


 “그러네, 아닌가 보네.”


 “표정 봐. 실망했네. ㅋㅋㅋㅋ”


 “...아니거든.”


 “근데 대단하네. 이 상황에 남에게 뭔가를 듣다가 순간적으로 저런 추정을 반사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게. 게다가 상대와 반대되는 주장을 논리적 허점 없이 재빨리 구성하는 건 특히 어려운데.”


 “옜다 칭찬, 이런 거야?”


 “아닌데. 완전 감탄인데. 뼛속까지 옹골찬 특급 감탄. 나도 잘 못해.”


 “뭐, 아무튼 저건 아니라 이거지?”


 “저게 맞으려면 내용을 모르는 글은 이해가 어려워야 해. 당신이 말했듯이 약간 어려운 게 아니라 감 떨어지듯 팍 하고 어려워야 하는데, 안 그렇다면서.”


 “응.”


 “그럼 일단 아닌 거지.”


 “그럼? 이건 모르고 넘어가는 거야?”


 “여기서부터는 내 추정이야.”


 “무슨 가정?”


 “글이 해설적이어야 하는 당신에게 해설적인 글이 왜 읽기 힘들까? 에 대한 가정. 표절하는 것 같지만 표절 아님을 미리 밝힙니다.”


 “응.”


 “우선 첫 번째. 난 글을 해설적으로 써.”


 “잘 모르겠지만 도령이 그렇다니까 그렇겠지?”


 “나는 그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보인데. 근데 그 글이 당신에게도 해설적으로 보여?”


 “...이건 진짜 모르겠는데.”


 “내 글은 해설적이야. 그래서 당신은 이해가 쉽지. 근데 읽는 것도 해설적으로 보여? 혹시 굉장히 함축적으로 보이지 않아? 정확하게는 함축적으로 읽고 있지 않아?”


 “그런가? 모르겠어, 그런 생각을 안 해봐서.”


 “왜냐하면 당신 말대로 대부분 아는 내용이잖아. 내용이 이미 들었거나 그냥 들은 것뿐만 아니라 같이 나눴던 내용들이잖아. 그래서 해설적으로 적어놔도 아는 정보는 금방 넘기고, 새로 적힌 정보만 흡수하고, 동시에 주제와 관련없는 잡소리는 무시하고, 그렇게 자체적으로 스킵하면서 함축적으로 읽고 있는 거 아닐까?”


 “모르겠어.”


 “추정이야. 첫 번째 가정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


 “계속 강조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응. 근데 그 이유는 조금 있다 말할게. 아무튼 그래야만 당신이 해설적인 내 글을 읽기는 어렵고 이해는 쉬울 테니까. 물론 제일 처음 말했던 당신이 글에 대해 해설적이라는 특성이 옳다는 전제하에.”


 “응.”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알고 있는 내용이나 직접 대화한 주제에 대해 읽는 것은 어쩌면 며칠 전에 봤던 책을 다시 읽어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하고. 단어 하나, 문장 하나씩 곱씹는 게 아니라 문단 자체를 꼬집듯이 흡수하지 않을까. 하나의 문단이 당신의 머릿속에 이미 있는 한두 줄의 문장으로 대체되어서 받아들여지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러면 나는 해설적으로 쓴 글이어도 당신은 충분히 함축적으로 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근데 이것도 아까와 마찬가지인 거 아니야?”


 “맞아. 아는 내용은 함축을 해서 읽기 어려워졌다지만, 모르는 내용은 어떤지를 말하는 거지? 그 대답은 당신이 줘야지. 어때? 내용을 모르는 글을 읽을 땐 어때?”


 “모르는 내용은 함축 안 하니까, 정확히는 내용을 몰라서 할 수 없으니까 해설적인 내가 해설적인 글을 보는 거잖아. 그럼 잘 읽혀야 하는데, 그런가? 아닌가? 이건 모르겠어. 애당초 모르는 내용도 거의 없고, 모르는 거라고 해봤자 자잘한 일기나 워낙 짧은 것들이라서 그건 해설이고 함축이고 안 읽힐 리가 없고.”


 “그럼 소설은 어때? 단편이든 중편이든 처음 보는 소설, 아니면 처음 보는 양이 많은 수필이나 시나리오, 처음 보는 사상문 같은 건?”


 “......”


 “헷갈려? 아니면 잘 모르겠어?”


 “둘 다. 두 번째 가정은 뭐야?”


 “그건 아까 당신 말이 옳다는 가정이야.”


 “그건 아니라고 판명난 거 아니었어?”


 “일단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지, 조건이 맞으면 그럴 수도 있으니까. 예를 들어 이 역시 말과 반대인 경우야. 당신이 글에 대해서는 함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고. 그럼 당연히 해설적 글은 읽기 어렵겠지. 근데 이해는 잘 돼. 왜? 아는 내용이니까. 그럼 모르는 내용은? 그것도 이해가 잘 돼. 왜? 그건 당신이 어떤 요건 때문에.”


 “어떤 요건?”


 “내가 봤을 때 당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장점은 직관성이야. 이건 전부터 종종 말해왔었는데.”


 “B랑 C 거르고 A에서 D로 점프하는 그거?”


 “당신은 D가 아니라 E까지도 가지. 아무튼 그거 맞아. 그래서 원래는 이해가 어려워야 하는 글인데 직관적 통찰력으로 그냥 ‘아? 아... 아!’ 하고 이해해버리는 거야. 중간 절차나 과정값은 다 무시하고 우격다짐으로 그냥 씹어 먹는 거지. 지극히 연역적으로.”


 “.......”


 “그렇다면 문득 의문이 들지. 그럼 아까 말은? 당신이 특성을 무시할 정도로 내용 이해에 대한 직관적 통찰력이 있다면, 해설적 글뿐만 아니라 해설적 말에도 이해가 쉬워야 하는 것 아닌가?”


 “응. 지금 그 생각 하고 있었어.”


 “이 부분은 ‘능력의 개체 우위도’가 아닐까 싶어. 쉽게 말해 당신은 굉장히 연역적이고 직관적인 사람이고, 그래서 당신은 높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통찰력이 말보다 글에 대해 훨씬 높은 호응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말보다 글에 대해 이해가 높다는 말이지. 함축인지 해설인지의 상태보다는 말인지 글인지의 특성이 당신의 능력에 더 영향을 주는 거야. 그렇다면 당신이 똑같은 직관적 통찰력을 가지고도 말은 이해 못해도 글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성립되지.”


 “가정이지만 기분은 좋다. 칭찬 받은 것 같네.”


 “게다가 기세는 훈련할 수 있고 분위기는 전염이 되니까. 글은 대부분 이미 아는 내용이잖아. 그러니 이해가 쉬운 것만 쭉쭉 읽어가다 보면 거기에 적응하는 거야. 훈련이 되는 거지.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그에 대한 요령이나 노하우가 쌓이듯이 말이야. 계속 쉽게 읽다보니 내 글에 대한 이해도가 전체적으로 올라가. 내가 어떤 식으로 글을 쓰는지 파악하는 거지. 글은 이럴 수 있어. 왜냐면 쉬운 글을 쭉쭉 읽는 훈련이 필요한데, 글은 대부분 아는 내용이니까. 근데 말은 안 그렇지. 대부분 처음 듣는 내용이니까. 보통 말을 먼저 하고 나중에 글로 다시 보는 식이니까 말은 대부분 모르는 내용이잖아. 게다가 해설적 말이라 더 어려운 것도 있고. 그러니 말에 대한 훈련은 글에 대한 훈련보다 약하겠지. 그러면 말이 어렵고 글은 쉬울 수도 있겠지. 이런 가정도 있어.”


 “두 번째 건 생각 못해본 거다. 근데 다른 건 다 알겠는데, 분위기 전염은 뭐야?”


 “쉬운 글도 있고 어려운 글도 있는데 쉬운 글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까 내 글을 이해하는 데 대체로 쉬웠을 거야. 그러면 나중에 전체적으로 평가할 때, ‘나는 당신 글이 얼추 다 이해되던데? 전반적으로 쉬웠어’라고 생각하게 됐을 수도 있지. 이건 일종의 기세 같은 거라, 만약 어려운 글이 이해가 너무 어려워서 많이 헤맸다면 쉬운 글이 훨씬 많았어도 전체적으로 어려웠다고 기억할 거야. 반대로 어려운 글을 이해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면 전반적으로 쉬웠다고 기억할 거고. 이게 분위기의 전염이야. 사람이 정보나 감정을 기억 상자에 넣어둘 때 어느 쪽으로 넣을 건지는 기세가 많은 영향을 준다는 말이야.”


 “아. 이해했어.”


 “굳이 하나 더 해보면 다른 가정도 있어. 당신이 정보를 습득해서 생각으로 전환하는 과정, 즉 ‘받아들임’의 과정이 있잖아. 첫째, 함축적 주제를 얻는다. 둘째, 자유롭게 사유하며 정리한다. 셋째, 자신의 방식으로 변환하여 저장한다. 만약 이렇게 삼 단계라고 해보자. 그럼 말은 함축적이어야 해. 그럼 알아서 정리해서 스스로 결론을 내리니 이해가 더 쉽지. 근데 글은 해설적이어야 해. 질문에서 결론으로 가는 과정이 모두 담긴 해설적 글은 당신이 자신의 결론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보조해주니까. 대신 내 사고 유형과 당신의 사고 유형은 서로 다르니 서로 길항하며 그 과정을 보조하기 전까지는 오히려 불편하고 복잡하게 할 수도 있어. '생각이 튄다' '생각이 튀긴다'라고도 하지. 그래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순간, 즉 글을 읽고 있는 동안은 생각이 튀어서 잘 안 읽힐 수도 있지. 하지만 튀던 생각이 차츰 멎으면 어쨌든 당신이 생각을 정리하는 일을 보조해주니 결론적으로는 이해는 잘 될 수도 있고.”


 “세 번째는 있는 지도 몰랐네.”


 “여기까지가 내 가정. 무엇 하나 빼먹지 않고 전부 내 추측이야. 정리하면 해설적인 사람이 함축적으로 읽고 있다. 아는 내용이라서. 이게 첫 번째 가정. 아니면 함축적인 사람이지만 직관력으로 반대 특성을 씹어 먹고 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개체별 특성 우위, 훈련, 기세로. 이게 두 번째 가정. 그리고 서로의 사고 처리 유형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상대와의 다른 방식인 탓에 오는 혼동, '생각이 튀었다'가 다시 잔잔해지느라 읽는 것은 어렵고 이해는 쉽다. 이게 세 번째 가정. 더 파고 들어가면 네 번째, 다섯 번째 가정도 생기겠지만 오늘은 일단 이렇게만.”


 “말이라는 게 참 무섭다. 이거 들으면 이거 같고, 저거 들으면 저거 같고. 진짜 모르겠네. 작정하고 속이면 속아서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며 살 것 같아.”


 “추상에 관한 거라서 그래. 생각이나 가치도 그렇고, 성향이나 특성도 그렇고, 성격이나 취향도 그래. 여러 가지 부분이 모여 하나가 됐으니까 쉽게 파악할 수 없지. 이미 통 안에서 하나의 빛깔을 내뿜고 있는데 이 색을 만들기 위해 무슨 무슨 페인트를 부었는지 역추적하는 과정이니 당연히 헷갈리지. 그러니 남의 말에 휘둘리는 거야.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유리한 대로 휘두르거나 조종하기 위해 세뇌할 여지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러지 않으려고 지금 이러고 있는 거고.”


 “어쨌든... 일단 뭐가 됐든 내 가정보다는 훨씬 있어 보이다.” 


 “있어 보이지도 않고 있어 보인다 해도 뭐할 거야. 그럴듯한 오답보단 초라한 정답이 낫지. 그렇다고 여기서 나올 정답이 초라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제 대답. 여기에 대한 당신 생각은 어때? 이 모든 가정에 대한 정답은 당신이 들고 있어.”


 “......”


 “......”


 “만약 내가 그런 것들도 안 읽힌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첫 번째 가정의 대답으로?”


 “응.”


 “어떻게 되긴. 그럼 내 첫 번째 가정이 틀렸다는 거지.”


 “만약 두 번째 가정도 아닌 것 같다고 하면?”


 “직관력도 아닌 것 같으면? 그럼 두 번째 가정은 틀렸다는 거고.”


 “만약 세 번째 가정조차도 잘 모르겠다고 하면?”


 “그럼 네 번째 다섯 번째 가정을 세우거나, 아니면 글에 대해 당신의 특성 유추를 처음부터 시작하거나 해야겠지.”


 “......”


 “이 여자가 이상한 눈치를 보고 있네. 그래야 하면 그러는 거지. 이건 눈치 볼 일이 아니라 누가 맞고 틀린 것과 상관없이 정확한 것을 찾아야 하는 거야. 틀린 가정을 옳다고 믿고 살 수는 없잖아. 모르면 모를까 알면서는 더욱 그렇고. 그러니까 다른 거 없이 정확하게만 말해봐. 전부 다 아닌 것 같아?”


 “아니, 그건 아닌데... 이건 진짜 모르겠어.”


 “어느 지점이 모르겠는 거야?”


 “첫 번째 것은... 도령 말대로 모르는 내용의 다른 긴 글을 읽을 때 이해가 쉬운 것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어서. 이게 내 특성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말처럼 내용 자체가 쉽거나 어려워서 그런 건지 그 구분을 못하겠어. 그리고 두 번째랑 세 번째는... 이건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 이해가 안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는 생각해보지 않아서 그런지 아닌지 아예 감이 안 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네. 전부.”


 “대답이 이상하지?”


 “아니. 내가 보기에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린 것 같은데. 나 역시 이 자리에서 바로 들을 수 있는 확신 없는 답은 오답에 가까울 거라 생각했으니까.


 “만약 확신이 있었으면?”


 “그건 아마 정답이었을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는 거긴. 그것을 알기 전까지 사건은 미궁 속으로... 는 아니고 그냥 판단을 보류하는 거지.”


 “그럼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야? 더 듣고 싶은데.”


 “그런 것치고 엄청 피곤해보이는데?”


 “엄청. 사실 지금 머리가 지끈거려서 아무데나 눕고 싶은 기분이야.”


 “어차피 당신에게서 답이 나오지 않으면 이 부분에서는 더 할 수 있는 건 없어.”


 “그럼 도령 생각이 옳다는 가정 하에 마저 말해줘. 원래 그랬잖아. 모든 게 전제가 옳다는 가정으로 시작한 거라면서.”


 “그렇지. 근데 거의 종반이야. 마무리랑 종합만 남았어.”


 “그래, 그거. 시작한 거 끝까지 들을래.”


 “나는 내 가정이 전부 다 그럴듯하다고 생각해. 어쩌면 모두 조금씩 섞여있을 수도 있고. 근데 어느 쪽이 더 우세한지 말하자면, 나는 글에 대해서는 당신이 해설적이라고 봐. 읽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모두. 근데 읽는 게 힘든 이유는 대부분 함축해서 읽기 때문에 그래. 모르는 내용보다 아는 내용이 월등히 많으니 전반적으로 ‘내 글은 읽기가 어렵다’고 여기는 것 같아. 읽기 힘든 글만 계속 읽다보니 가끔 나오는 읽기 쉬운 글도 '읽기 어렵다'라는 평가를 깎아내지 못했을 거야.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과 이유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해설적 글이 읽기 어렵다는 반응이 나오는 거야. 실제 다른 사람들도 이런 부분이 있어. 함축적 글을 선호하는 사람들이라 내 글은 읽기 힘들고 이해도 어려운데, 간혹 그들도 읽기 편하고 이해가 쉬운 글이 있다고 해. 그들이 꼽은 글은 보통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나 그들과 했던 대화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럼 해설적인 글을 함축적으로 꼬집어서 읽을 거고, 그들의 함축적 특성과 잘 맞으면 읽기 쉽고 이해도 쉽겠지. 이런 점 때문에 첫 번째 가정에 가장 마음이 가네. 정확히는 첫 번째와 세 번째 가정 둘 다 맞는데, 그중 당신에게 더 영향을 주는 건 첫 번째 같아.”


 “듣다 보니 또 그런가 싶네.”


 “지금 당장 결론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해 어렴풋이 알지만 정확히 모르는 이때가 남에게 가장 휘둘리기 쉬운 순간이라는 거야. 내가 이런 말을 하고 가정을 던져주는 이유는 당신이 진짜 자신을 찾는데 도움을 주고 싶어서지, 내 취향이나 방식대로 당신을 규정하거나 옭아매려는 것이 아니니까. 내 의도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게 차분히, 신중하게 생각해줘.”


 “그래서 아까부터 가정임을 계속 강조한 거구나.”


 “맞아. 그건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아. 내가 아무리 선의였다 해도 그게 상대에게 악의가 되지 말란 법은 없거든. 반드시 선의로 전달되는 것도 아니고. 혹시 주변에 이 부분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혀부터 놀리는 사람이 있으면, 할 수 있는 한 멀리해. 그런 인간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온갖 악의를 퍼부어 당신을 망가트려놓고 나중에서야 모두 선의였다고 발뺌할 놈이니까.


 “ㅋㅋ 알았어요.


 그럼 길고 머리 아팠던 이번 주제에 대한 최종 정리. 나야 큰 차이 없지만, 당신이 보기엔 말이 아니라 글 형식으로 말할게.”


 “왜?”


 “정리니까.”


 “알았어.”


 “나는 글과 말이 같다. 그 둘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비슷해야 편하다 느끼고, 그래서 서로 되도록 같으려고 한다. 그건 근거가 필요 없는 내 특성이고,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내 특성은 굳이 말과 글뿐만 아니라 다른 중요한 가치와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허나, 실질적으로 글과 말은 다른 특성을 가지기에 그 둘이 같도록 변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길고 해설적인 특성을 가진 말은 함축하고, 짧고 함축적인 특성을 가진 글은 해설한다. 이유는 두 가지. 둘을 비슷하게 하기 위해, 또 전달과 탈 곡해를 위해 나름대로의 배려이자 자구책이다. 그런데 이미 사회적으로는 같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같도록 하는 일이니 딜레마가 있다.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 내 의도와 달라진다는 것.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함축한 말과 해설된 글은 읽기 힘들어하고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그들에게는 말이 해설적이고 글은 함축적이어야 하는데, 나는 그 둘을 중간으로 맞춰놨으니 내가 한 배려는 반대로 배려없는 일이 된다. 앞서 말했듯 내게 있어서 글말뿐만 아닌 다른 부분에서도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의도와 수용의 괴리로 인해 타인과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것이 내게는 딜레마다. 근데 당신은 그들과 조금 다르다. 달라서 여러모로 편한 점이 있다. 글도 그렇고 앞서 말한 사상적 부분도 그렇다. 타인과 마찰을 일으키는 대부분의 요소는 당신과의 관계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른 자리에서 정확한 주제로 다시.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서, 당신은 말이 함축적이어야 하고 글이 해설적이어야 한다. 이건 당신의 특성. 근데 내가 이해를 돕는답시고 당신에게 해설적으로 말하니 당신은 내 말이 듣기에 힘들고 이해가 어렵다. 당신에게 있어 해설적 말은 특성이 다르기에 이해를 방해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반복적이라서 이해를 돕기도 한다. 하지만 반복보다 반특성의 요소가 더 강하고, 게다가 내용도 어렵기에 결국 해설적인 내 말은 듣기도 이해도 어렵다. 여기까지가 말. 반면 글은 해설적이어야 하고 내 글도 해설적이니 당연히 이해가 쉽다. 근데 읽기가 어렵다. 이유는 불명. 아마 해설적 언어를 함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서 그럴 것이라 가정한다. 근데 이 부분은 서로의 사고 유형을 이해하는 초기여서 생기는 문제니 시간이 지나면 결국 읽기도 쉬워질 것이다. 여기까지가 나와 당신에게 내린 전제가 옳다는 가정 하에 종합한 당신의 성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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