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응?”
“아까부터 묘하게 기분이 별로 같네.”
“......”
“무슨 일 있어요? 묻지 마?”
“어때?”
“맛있는데. 왜, 이상해요?”
“아니. 당신 글. 사람들이 뭐래?”
“응? 갑자기 웬?”
“그동안 지나가듯이 얼핏얼핏만 들어서 이번 기회에 제대로 들어보려고. 사람들이 당신 글에 대해 뭐라고 그래? 전반적으로?”
“좀 화나 보이는데, 맞아?”
“아니라고는 못 하겠어.”
“‘왜 당신이 화를 내’라고 하기엔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서 그렇게 말 못하겠네.”
“응, 근데 명분도 당위성도 없다는 걸 아니까 그냥 혼자 생각만 하고 있었거든.”
“혹시 고거 마시고 취했어?”
“안 취했어요.”
“...내 생각에도 화날 일도 아니고, 더욱이 당신이 화낼 일은 더더욱 아니야. 그런 자격이 없다 뭐 그런 말이 아니라....”
“알아요. 그런 쓰잘데없고 명분도 없는 일에 괜히 힘 빼고 속상할 필요 없다는 말이잖아.”
“빨라. 확실히 빨라졌어. 원래 빨랐지만.”
“내 반응은 내버려둬. 나도 파악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건 치우고 그냥 궁금한 거 대답만 해줘요.”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언제나 내 기꺼움이지. 근데 그 전에....”
“응?”
“좀... 고맙네. 고마워.”
“우리 둘 다 사람 차이인 거 알지만, 속상한 건 속상하네. 게다가 우리 도령, 외로웠잖아.”
“조금 그렇지.”
“돌려받지도 못할 거 뭐 좋다고 그리 퍼줬을까. 알아주지도 않을 사람들한테, 쓴 정성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손가락질로 휙휙 읽힐 거 왜 부탁받지도 않은 걸 그리 준다고 외로웠을까 싶어. 그게 화나. 그들이 몰라주는 거나 제대로 안 읽어주는 게 아니라, 그건 사실 별 관심도 없어. 그보다 십 년이나 봐와놓고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인지, 무엇 때문에 계속 글을 쓰고 그걸 굳이 아까운 시간 들여 드러내는지 고민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뭐 한다고 그렇게 정성이었어? 그런 도령이 화나고, 잘못도 없는 당신한테 이러고 있는 나한테도 화가 나고 그래.”
“응. 그러네.”
“모르겠어, 아까 당신이랑 걸어오는데 갑자기 너무 울컥 화가 나는 거야. 당신이 너무 바보 같았어. 이 사람 왜 이렇게 사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릴 것도 아닌데 뭐 한다고 그랬나.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됐는지는 내가 작년에 뻔히 다 봤고. 베프 씨도 유리 씨도, 보답 받지 못할 걸음이니 그만 가라고 했다면서. 근데 그거 듣고도 뭘 위해서 그리 웃으며 갔나 싶고. 왜 사서 고생하고 상처받는 건지. 그냥, 전부 다 화가 났어. 내가 화낼 일이 아닌데도 마음이 안 좋았어. 이런 마음, 도령이 느낀 거에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아닐 텐데. 도령은 어땠을까 생각해봤더니 눈앞이 캄캄해지더라. 보답 받지 못할 걸 알면서 그것을 계속 하는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 나는 모르겠어.”
“......”
“......”
“날 생각해준 거네. 그래서 안타깝고, 그래서 대상 없는 무엇에 화도 나는 거고. 고마워. 근데 괜찮아. 얼굴 봐, 이게 거짓말 같나. 결국 막다른 골목이었다 해도 분명 그 길을 걸었던 걸음에는 가치와 의미가 있으니까. 그리고 전부 다 그런 것도 아니었어. 그 중에 쓴 노력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열심히 읽어준 사람도 분명 있었거든. 백중일, 100명 중에 그런 사람 하나만 있어도 괜찮았으니까. 그래, 딱 까놓고 그래도 내가 괜찮았으니까 계속 그랬던 거야. 당신 말대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 혼자 계속 묵묵히. 그리고 절대 그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엄밀히 말하면 날 위해서가 99%지. 그러니까 괜찮아.”
“미안해. 내가 감정 정리 못하고 더 짐 지운 것 같네.”
“아 해. 진짜로 고마워서 주는 거야.”
“...정리 다 했어요. 이제 진짜 대답해줘요.”
“그러니까 저런 사정 빼고 그냥 담백하게, 보편적 주변에게 내 글이 어찌 보이고 받아들여지는지, 그걸 물어보는 거죠?”
“응.”
“간단해. 재미없다. 읽기 힘들다. 대중성 없다. 끝.”
“.......”
“생각 중?”
“생각 중.”
“.......”
“왜일까?”
“왜라는 의문이 필요할까. 그냥 그렇게 보이니까 그렇게 받아들이고 그리 표현한 것뿐인데.”
“그러니까 왜 그렇게 보일까? 아니, 똑같은 건가.”
“그렇지. 당신은 어때? 똑같은 질문이면.”
“재미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어. 읽기 힘든 것도 있고 쉬운 것도 있고. 대중성은 모르겠어.”
“대중성의 정의는 어때?”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성향?”
“당신만의 정의가 있는데 모르겠다는 건 파악하기 힘들다는 뜻이겠네.”
“응. 대중성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지만 실제 대중들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니까.”
“맞아, 나도 그래.”
“도령이 보면? 멍청한 질문인가?”
“아니, 나도 똑같아. 재미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고. 읽기 힘든 것도 쉬운 것도 있어. 대중성은 나도 모르겠고.”
“도령이 보기에 재미없거나 읽기 힘든 것도 있어?”
“그럼, 당연히 있지.”
“그럼 그런 건 왜 써?”
“필요에 의해 쓰기도 하고, 재미있을 주제인데 아직 부족해서 재미없게 되는 것도 있으니 기록을 위해 적어두기도 하고 그래. 읽기 힘든 것은 실력 부족일 것도 있겠지. 그래도 초고는 중요하니 재미가 없고 읽기 힘들어도 일단 적어두려고 해요.”
“대중성이 없다는 말 많이 들었어요?”
“그럼. 그 말을 제일 많이 들었는데.”
“의외네. 왜?”
“각자 이유가 달라. 각자 대중성이라 생각하는 바가 다르듯이.”
“대중성이라는 건 어느 정도... 공통분모가 큰 성향 아니에요? 그러면 대중성이 없다며 제시하는 근거들이 어느 정도 겹쳐야 하는 거 아닌가?”
“맞아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사람들이 내 글에 대중성이 없다고 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예요.”
“뭔데요?”
“익숙하지가 않아.”
“이 대답이 도령이 가진 대중성의 정의와도 같겠네.”
“정확히 맞아요. 내가 내 글을 볼 때도 여러 가지 느낌이나 감상이 들어요. 필자이자 당사자라고 일관적이진 않은 것 같아. 어떤 글을 보면 ‘잘 썼다. 내가 어떻게 이런 글을 썼지? 읽기도 쉽고 이해도 잘 되고 주제를 풀어가는 방식도 매끄럽고 문장도 예뻐’ 이런 생각이 드는 글도 있고, 반대로 ‘내가 썼지만 엉망이다. 재미도 없고 읽기도 힘들고. 마음 같아선 확 지워버리고 싶지만 이런 거라도 있어야 다음에 더 잘 쓸 수 있으니까, 또 중요한 주제니까 일단 가지고 있자’ 싶은 글도 있어. 소설이든 시든 수필이든 아니면 단순히 생각을 정리해둔 사상문이든, 주제나 장르에 구분 없이 막 왔다 갔다 해. 근데 대중성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 아직 잘 알지 못하고. 잘 모르는 것을 너무 의식하기 시작하면 내 스타일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거든. 지금은 글쓴이로서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뜻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이는 거지. 아직 내 스타일과 대중적 취향을 예쁘게 섞지 못하는 거야. 그러니 나 좋은 대로만 써 갈기는 거지. 그리고 내 글을 보는 사람들도 그럴 거라 생각해. 재미있기도 없기도 하고, 읽기 쉽기도 어렵기도 할 테지. 근데 입을 모아 말하는 건, 내 글에는 대중성이 없대. 나는 그렇게 생각하거든. 대중성이라는 건... 딱 정해져있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냥, 뭐랄까... 익숙함인 거야. 많은 사람들이 익숙한 것을 선호하고, 익숙하면 읽기 쉽고, 익숙해야 이해도 빠르고 재미도 더 느끼는 것 같아. 그러다 보니 익숙한 것이 대중성이 되는 것 같아. 물론 지속적인 익숙함은 식상함이 변질되니까 계속 옷을 갈아입듯 익숙함도 조금씩 모습을 바꿔가는 거고. 하지만 어쨌든 70%는 익숙함이어야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낯설음이 70%인 것보다는. 근데 내 글은 익숙하지 않은가봐. 물론 아직 실력이 일천하니 못 쓰는 부분도 있을 거야. 근데 사람들이 하나 같이 돌려서 말한 게 아니라면, 그들이 말하는 대중성은 내 글이 ‘못 썼어’라는 느낌보다는 '안 익숙해'라는 말인 것 같아.”
“왜 그럴까?”
“그건 아마도 읽기 어렵다는 말이 아닐까 싶은데. 읽기 편한 스타일이 따로 있는 건 아니라고 봐요. 익숙한 스타일을 편하다고 느끼는 거지. 그게 결국 대중성이 되는 거고. 그럼 내 글은 익숙한 스타일이 아니고 그래서 읽기 어려워서 대중성이 없다는 말이겠지.”
“아까 말한 해설적으로 쓰는 것도 분명 영향이 있겠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크게 작용하겠지. 읽기 힘들다는 것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싶어. 대표적으로 해설적인 것도 그렇고, 전투적 단어, 압축된 한자어, 글 같지 않고 말에 흡사한 문장이나 전개 방식, 그리고 여백의 유무, 문단의 속성 등등.”
“전투적 단어는 뭐예요?”
“그걸 설명하려면 글에 대한 속성부터 이야기해야 하는데. 아까 그 말 기억나요? 말에 대해 ‘설명이 필요한 사람’과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으로 나눴던 거.”
“응. 전자가 해설적 특성이고 후자가 함축적 특성이었잖아. 나는 후자였고.”
“맞아. 글에도 그런 게 있어. 표현하면 ‘여백이 필요한 사람’과 ‘여백이 상관없는 사람’으로.”
“전자가 함축적이고 후자가 해설적이에요? 반댄가?”
“이건 함축과 해설이라는 단어로만 설명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으니 다른 단어를 쓸게요. 이건 글의 속성, 정확히는 어떤 구조로 글이 짜여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예요. 예를 들어서 하얀 종이 위에 한두 개의 단어와 문장만 딱 배치해놔요. 내가 말하고 싶은 주제와 요지만 딱. 거기에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째서인지, 어떻게 생각이 흘러가고, 무엇이 어떻고 이런 건 다 치워버리고. 이건 함축적임과 동시에 뭐랄까, 생각의 입구와 출구가 모두 열려있는 거예요. 주제, 내용, 결말이 똑같아도 중간에 읽는 이가 끼어들 틈이 많아. 이걸 보고 자신의 생각을 개진할 여유도 많고, 그럴 수도 있어. 한 마디로 ‘토론를 할 수 있는 글’이에요. ‘끼어들 여백’이 많은 거지. 나는 전하고 싶은 중심 사상만 떡 하고 박아놓았으니, 나머지 여백을 활용해서 자기들이 알아서 알아들어. 나름대로 해석해서 자기 식으로 받아들이지. 물론 좋은 의미로.”
“무슨 느낌인지 알겠다. 그럴 수 있는 것을 여백이라고 표현했구나.”
“응, 보통은 이런 글을 선호한다고 봐요. 근데 내 글은 반대 속성이 주로 많아. 어떤 거냐면, 내 생각이 가득 들어찬 글이야. 여백도 없고 빈 공간도 없어. 하얀 종이 위에 엄청 많은 글자들이 그들만의 의미와 사상을 품고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빽빽하게 박혀있는 거야. 이것은 해설적이지만 동시에 폐쇄적이야. 폐쇄적이라 함은 생각이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가 거의 막혀있다는 뜻이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도록’ 한다는 거야. 그 끄덕임은 설득도 동조도 아니고, 그렇다고 압박이나 강요도 아니야. 그냥 일방통행의 받아들임이지. 그들의 생각이 나와 같든 아니든, 여기에 동의하든 아니든 상관이 없어. 주제에 대해 내 생각을 개진하고, 논리적으로 짜맞춰놓고, 반론이 들어올 구멍이나 허점을 미리 매워놓고, 그리고 ‘이건 내 생각이야’라는 말로 다른 견해를 개진할 가능성을 차단해놓는 거야. 그러니 이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글 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글이지. 그런 끄덕임이야. 그렇잖아. 글쓴이의 생각이 옳든 그르든, 그걸 읽는 사람 생각과 같든 아니든 필자가 이건 자기 생각이라는데 그걸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어. 그냥 ‘그렇구나.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수밖에 없지. 만약 이게 말이었으면 ‘그래? 근데 나는 이렇게 생각해’라며 반론이라도 할 수 있을 거야. 근데 글은 그것도 안 되잖아. 그냥 읽고 땡이니까. 즉, 내가 쓰는 글은 굉장히 해설적이나 폐쇄적이에요. 닫힌 글이고, ‘여백이 없는’ 글이지. 이건 ‘토론 주제’가 아니라, 마치 ‘선언문’이나 ‘사설社說’ 같아. 단지 주장하고 표명하는 거니 상대는 읽는 것 외에는 다른 할 수 있는 게 없어. 나는 주로 이런 글을 많이 써요.”
“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여러 이유가 있지. 모호한 개념을 정리하거나 추상에 대해 내 생각을 명확히 밝히는 주제일 때가 대부분이고, 또 워낙 내 생각과 네 생각을 구분 못하는 환경에서 자라온 것도 있어. 애당초 토론이나 여백 자체가 필요 없는 글들도 있고, 내가 토론보다 선언을 더 선호하는 영향도 있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벽돌’ 역할을 하는 글이 많아서야. 나는 성인이 되기 전부터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졌고, 그래서 가장 먼저 내 나라부터 세워야 했으니까. 그러니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의 근거가 되어야 하기에 ‘나는 이런데 너는 어떠니?’라는 것보다 ‘나는 이래’라는 글이 더 필요했어. 물론 보는 입장에서도 내 사상이 보편성보다 특이성이 강해서거나, 따끔거리고 거북한 내용이 많아서 더 불편하게 느낀 부분도 있을 거야.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들이 겹쳐져서 나는 주로 여백이 없는 사설 같은 글을 써. 그리고 그런 글에는 내 주장과 의사를 명확히 밝히고 고정할 수 있는 단어들을 주로 쓰지. 같은 단어라도 내용에 따라 굉장히 공격적으로, 때로는 수비적인 뉘앙스도 풍기기도 해. 혹여 다른 뜻으로 오해하거나 곡해하기 어렵도록 범위가 좁고 날카로운 단어이기도 하고. 이게 ‘전투적 단어’야.”
“그런 뜻이구나.”
“그런 글은 보통 읽기 힘들어 하는 것 같아. 주장이 강할수록, 주제가 난해할수록, 게다가 생각이 들어갈 틈이 없을수록 더 답답해하지. 생각이 다른데 반론할 여백도 없이 그냥 읽기만 해야 하니까. 게다가 나와 견해가 다른 글은 그 자체만으로도 읽기 어렵지. 견해차이는 독자가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니까. 오해할까봐 덧붙이면 다른 뜻이 아니라, 상대의 뜻이 내 생각과 다르면 머릿속에서는 그와 맞대응하는 생각이나 의견들이 막 떠오르잖아. 말을 하는 도중이라면 자르고 내 의견으로 반론하고 싶고, 읽는 입장이라면 그럴 수 없으니 답답해서 덮어버리고 싶으니까. 뭐가 되었든 집중해서 상대의 이야기를 듣기는 힘든 상태가 되죠.”
“제대로 알아들었어요. 안 덧붙여도 되는데.”
“응. 근데 ‘견해차이가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라고만 말하면 ‘견해차이가 나쁜 거라고?’라고 시비거는 사람이 너무 많았거든.”
“그러니까... 서로 생각이 차이나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말한 줄 안다고? 그게 말이 돼?”
“그러니까. 근데 그렇게 되묻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 토론이 조금 격해지거나 이미 열이 오른 사람들은 당연한 것도 곡해해서 말들을 많이 하더라고. 그러다 보니 추가 설명 붙이는 게 습관이 됐어. 지금 당신이 저렇게 알아들었을까봐 걱정한 건 아니고.”
“들어서는 믿기지 않을 스토리다. 진짜 그러고 어떻게 살았대.”
“나야 워낙 오해와 곡해를 달고 사는 사람이니까. 실제로 분란을 불러오는 건수도 많았고. 그러다 보니 전혀 논란이 없을 부분에도 저런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생기지. 아무튼, 이 얘기 하고 있던 건 아니니까.”
“어쨌든 정리하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글을... 뭐랄까,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글이 아니라 도령이 쓰고 싶은 글을 써왔다는 말이구나.”
“정확해요. 흥미도 없고, 재미도 없어. 그리고 너무 딱딱하고 본인 생각과 달라. 그래서 눈이 가지 않지.”
“다른 이유들은?”
“압축된 한자어를 많이 쓰는 것도 있어요. 아직 필력이 부족해서 문맥이나 읽는 흐름에 따라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지를 못하거든. 그래서 길이를 위해 단어를 대체하는 경우가 많아. 그러다보면 주로 흔하게 사용하지 않은 어려운 한자 단어들을 많이 쓰게 돼요. 이해를 위해 좀 과한 예를 들면... ‘생각 없이 무조건 흐름을 거부하고 저항하다 보면 그것이 좋지 않은 버릇으로 굳어져서 결국 모든 일에 적당한 상태를 놓치게 된다.’라는 말은 ‘반사적 반골은 타성이 되어 중용으로 수렴을 방해한다.’가 되는 식이에요. 이런 영향도 있죠.”
“그랬나? 의식하지 않아서 몰랐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게 꽤 큰데, 내 글은 블럭식으로 되어 있어요.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식으로?”
“그러니까 의도한 건 아닌데. 문장, 문단, 단락, 전체 글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나는 그냥 쭉 써내려가는 건데, 다 쓰고 읽어보면 어떤 문장들은 귀납적인데 그것들이 모인 문단은 연역적이고, 또 그 문단 몇 개가 모이면 귀납적인데 전체적으로 보면 연역적인, 뭐 그런 요지경 같은 글이 나와.”
“......그건 뭐야.”
“아무리 쭉 써내려 간다 해도 글이라는 게 컵라면처럼 3분 만에 나오는 게 아니잖아. 보통 좀 길다 싶은 사상문이나 담화록 같은 건 두세 시간 정도 걸리니까. 물론 개요나 전체 틀은 한 번에 쭉 쓰는 건 맞아요. 근데 생각을 정리하고 논리를 짜 맞추고 말을 다듬는데 오래 걸리는 거야. 그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은 얼마나 휙휙 온갖 방향으로 돌아가겠어. 머릿속에서 정리해서 적어 내려가던 중에 갑자기 방금 썼던 곳을 수정하고 아까 앞부분에 뭔가를 덧붙이고 빼고, 거기서 바로 후반으로 가서 몇 줄 적다가 일단 건너뛰어 결말부터 맺어놓고 다시 중반으로 돌아오고. 순차적으로 안 써. 생각, 글, 말이 다 같다고 여기니까, 글도 생각이 떠오르는 순서대로 쓰는 거예요. 물론 글이니까 말할 때처럼 중구난방이 되진 않아요. 근데 쓰는 순서는 중구난방이죠. 그러다 보면 각 단락의 성향과 문단의 속성이 제멋대로 바뀌는 거야. 어느 것은 귀납적 해설이었다가, 어느 것은 연역적 함축이고, 또 연역적 해설이었다가 귀납적 함축도 되지. 또 어떤 것은 귀납인 듯 연역 마냥 해설 같은 함축이 되기도 하고.”
“나 갑자기 빵 터짐. ㅋㅋ”
“웃기지만 진짜 그래. 전체적으로 총합해보면 결국 내 성향대로 연역적 해설이 되지만, 어쨌든 중간 중간은 그런 식인 거야. 내가 글을 해설적으로 쓴다는 것은 전체적인 성격이지, 모든 단어와 문장을 전부 해설적으로 쓴다는 말이 아니니까. 그래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혼란을 불러오는 것 같아. 더욱이 간단하고 가벼운 주제라면 모를까 추상에 관련되면 헷갈림 두 배, 게다가 읽는 사람과 다른 생각에 견해라면 집중 방해 두 배, 여백까지 없으면 답답함 두 배, 중간 중간 모르는 한자어가 나오면 다시 어려움 두 배, 마지막으로 재미없는 주제라면 지루함 두 배. 이러다 보면 ‘이 글 뭐야, 재미없고 안 읽히네. 대중성 꽝이다’라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끝.”
“...이렇게 분석해서 들으니 당신 글 되게 엉망진창인 것 같다.”
“그치? 지금 예시를 내 글과 상성이 가장 최악인 사람을 기준으로 말해서 그래. 실제로 아무 무리 없이 읽는 사람도 있으니까. 당신처럼.”
“그러게. 나 참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취했네, 취한 거 맞아.”
“안 취했다니까. 그럼 나는 왜 당신 글이 안 어려울까?”
“아까 말한 거에 반대라고 생각하면 간단하겠지. 일단 당신이 좋아하고 궁금해 하는 주제잖아. 그럼 주제나 내용 패스. 그리고 내 말이나 글을 접할 때 여백을 이용해서 알아서 알아듣거나 본인의 의지를 개진하는 것보다는, 말하는 이의 생각을 듣고 싶은 게 더 큰 편이잖아. 그러면 여백도 패스. 여백이 필요 없으니 전투적인 단어도 상관없어서 패스. 한자어 같은 경우는 말할 때 미리 풀어서 말해주거나 여러 의미 중 어떤 뜻으로 쓴 건지 바로 해석해주니 상관없어서 또 패스.”
“음.”
“문단별 속성이 가장 문제겠지. 당신이 내 글을 읽을 때 가장 걸리는 부분도 여기일 테고. 나사 열 개를 푸는데 어떤 건 왼쪽으로 돌려야 하고 어떤 건 오른쪽으로 돌려야 하고, 또 몇 개는 그냥 당기고 어떤 것은 도로 눌러야 뽑히는데 그게 전부 무작위로 섞여있는 셈이니까.”
“맞아, 읽는 입장에선 그런 느낌이겠네.”
“근데 이것도 사분의 일은 이미 말로 들었으니 상쇄되고, 사분의 일은 당신이 가진 직관적 통찰력으로 씹어 먹으니까. 그럼 이분의 일이 남지. 원래 이게 가장 큰 이유인데 또 별로 상관이 없어. 왜냐면 당신은 기본적으로 내 글을 최소 두 번씩은 읽잖아. 문단 속성이 계속 뒤집힌다는 건 사실 별 거 아니야. 아까 예를 비유로 들면 미리 한 번 나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풀리는지 직접 해보고,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하는 거야. 나는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방식 중에 하나라고 보지. 쭉 쓰는 것도, 이렇게 쓰는 것도 각각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 내가 쓰는 이 블럭 방식의 단점은 한 번만 읽었을 때 가장 어렵다는 거야. 한 번 더 읽으면 오히려 통일된 문단 속성보다 받아들이는 것도, 추후에 그것을 활용해서 자신의 생각과 섞는 것도, 그것을 활용하는 것도 더 쉽다는 게 장점이고.”
“어... 혹시 그 사람들.......”
“그치. 물론 아닌 사람도 있지만 보통은 한 번도 겨우 읽거나 반도 안 읽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근데 어쩌겠어. 처음부터 재미있게 못 쓰는 내 능력 부족이 문제지. 내 글을 두 번씩 읽어야 하는 의무는 그들에게 없으니까.”
“어렵네, 나는 글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글 쓰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아.”
“어렵지. 모든 일이 그렇지만 글도 참 어려운 것 같아. 근데 점점 나아질 거야. 포용력과 수용력도 점차 늘어날 거고, 전개도 주제를 다루는 요령도 나아지겠지. 그렇게 계속 쓰다보면 십 년 후쯤에는 제법 그럴듯한 글을 꽤 괜찮게 쓰고 있을 것 같아. 그 무렵이 되어야 내 글에도 대중성을 논할 수 있겠지. 지금은 일단 잘 쓰든 못 쓰든, 읽어주는 사람이 있든 없든 내가 매일 쉬지 않고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음에 집중하고 있어. 중요한 건 ‘쓰고 싶다’라는 마음과 ‘써야겠다’라는 의지, 그리고 ‘쓴다’라는 행동인 것 같아. 이 세 개만 계속 하다보면 나머지 자잘한 건 크게 상관없는 것 같아. 설령 죽을 때까지 인정받지 못해도... 물론 그건 좀 슬프겠지만. 그래도 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거니까 어찌 괜찮을 것 같아.”
“괜찮아. 나 같은 사람 많을 거야, 도령.”
“절대 많지는 않을 걸. 어떻게 보면 많아도 곤란해.”
“왜?”
“그런 게 있어. 아, 고기를 왜 치워. 뭔 줄 알고.”
“난 직관적 통찰력이 있어서 지금 이게 욕인 줄은 알겠다.”
“욕 아니거든, 이 여자야. 이러니 많으면 안 되지.”
“욕 맞네!”
“빨리 딱 갖다 놔. 바지런히 먹어야 오늘 안에 다 먹는다.”
“내일 아침에 먹어. 구워먹든 된장찌개에 넣어서 먹든.”
“어허, 고기는 남기는 게 아니야. 남을 순 있어도.”
“이러니 사람들이 무슨 말인가 하는 거잖아.”
2015. 늦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