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령.”
“응?”
“내 친구 있잖아요.”
“내가 아는 당신 친구라면 한 명 밖에 없는데. 오냐오냐 그 친구?”
“응. 그 친구.”
“그 친구 왜요?”
“이번에 남자 친구랑 헤어졌나봐.”
“아. 결국 헤어졌나 보네.”
“그러게. 나도 이번엔 결혼할 줄 알았는데.”
“어제 그래서 거기서 잤구나.”
“응, 얘기가 길어져서.”
“친구가 술 많이 마셨나 보네. 얘기 많이 했어요?”
“얘기라기 보단, 그냥 같이 욕해주고 왔지.”
“맞아. 아가씨들은 그게 중요하지.”
“그리고... 소개팅 해달라고 그러네.”
“그냥 말이 아니라?”
“아니, 진짜로.”
“사귄지 얼마나 되었죠?”
“일 년쯤 됐지.”
“언제 헤어졌는데?”
“지난주에.”
“차였구나.”
“어떻게 알았어요?”
“소개팅 해달라는 거 보니 넥스트가 없다는 건데. 넥스트 없이 헤어진 경우는 차였을 때가 많으니까.”
“...모두가 다 그러진 않아요.”
“맞아요. 근데 경험 상 다수가 그렇고, 또 그 친구도 그럴 것 같아서.”
“......”
“내가 실수했네, 미안해요.”
“결과적으로 내 친구가 그런 건 맞는데. 그래도 내 베프인데... 기분이 좋진 않네.”
“맞아. 이건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아무튼 한 번은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알기론 도령은 소개팅 주선 안 하죠?”
“나한테 부탁하려고 했구나.”
“그럼 넷이서 놀러 다닐 수도 있고 그러니까.”
“그건 좀 아쉽게 됐다. 기본적으로 난 소개팅 하지 않고 해주지도 않는 주의라서.”
“맞아. 전에 그렇게 들었어. 혹시 이유에 대해서 내가 들었어요?”
“말 안 해준 것 같은데.”
“왜?”
“한 문장으로 하면, 인위적 인연에 거부감이 있어요. 정확히는 그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럼 누구 소개로 사람을 만나고 하는 걸 아예 안 하는 거예요?”
“추가 설명이 필요하겠다. 그러니까 이런 거죠. 예를 들어 두 가지 상황이 있다고 해봐요. 첫 번째는 소개팅을 했는데 그 사람이랑 사귀게 되었다. 두 번째는 나랑 내 친구가 같이 술을 마시다가 ‘근처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다는데 합류해도 돼?’라고 해서 알게 된 사람이랑 어쩌다 보니 사귀게 되었다. 그럼 이 두 가지 상황은 비슷하잖아. 소개팅으로 만나서 사귄 거든, 합류하다가 눈 맞아서 사귄 거든. 주선자와 남녀가 있는 소개팅이든, 친구와 친구의 지인과 내가 있는 상황이든. 첫 만남에 앉아있는 위치와 만나게 된 방식만 다를 뿐이지. 근데 나는 후자는 괜찮은데 전자는 안 되는 거예요.”
“도령 말대로 비슷한 상황 아니에요?”
“비슷한 상황인데, 다른 목적이죠. 내가 소개팅을 좋아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만남 자체가 특정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사실 모든 관계에는 목적이 있죠. 특수한 경우 말고는 목적 없는 관계는 없으니까. 근데 그 목적이 특정 목적, ‘연인으로서 만남과 사귐, 나아가 결혼’이라서 싫은 거예요. 이 사람과 잘 될지 안 될지 결과는 모르지만 어쨌든 소개팅은 양쪽 다 ‘마음에 들면 상대와 사귈 작정’으로 만나는 거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그럴 수 있어. 나랑 생각이 다르니까. 근데 나는... 내가 정의하고 나에게 적용되는 인연은 그런 게 아니라고 봐요. 특히 다른 연이 아닌 붉은 실을 맺는 연은 더더욱 그럴 수도 없다 생각하고. 생물과 생물 사이의 ‘연’은 필멸자의 의도를 벗어난 좀 더 큰 그림이라고 봐요. 거기엔 단지 노력만 개입할 수 있는 거지. 근데 내 기준에 소개팅은 노력의 범주가 아니에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 결국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게 되는 거대한 의도에 개입하려는 작고 발칙한 발상이지.”
“이걸로도 사람들과 겁나 싸웠겠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에요. 내 기준인 것뿐이지. 그렇게 만나서 사귀고 결혼하고 아이낳고 백년대계를 잘 이룩하는 사람들도 많잖아.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아. 다만 내가 생각하는 인연론은 그런 게 아닌 거야. 만날 연이라면 소개팅을 하든 하지 않든 결국 만난다고 믿으니까. 그래서 나는 굳이 소개팅까지 하지는 않지. 여기까진 ‘불필요’의 영역. 게다가 그 짝 맞추기 같은 시스템에 거부감도 있어요. 여긴 ‘불호’의 영역. 그러니 0과 -,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가부에서 ‘불가’가 되는 거야. 미팅도 마찬가지예요. 뷔페에 가서 초밥 쟁반 중에 그나마 멀쩡한 초밥 고르는 것도 아니고. ‘연인의 사귐’을 위해서 그러고 싶지는 않아.”
“무슨 뜻인지 알겠어.”
“당신이랑은 생각이 좀 다르지?”
“응, 이건.”
“나는 그래요. 물론 내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아. 내 기준이니까. 당연히 내가 이렇다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비난하지 않아. 그것을 괜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업신여기지도 않고. 이건 서로 다를 뿐이니 각자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되는 거야.”
“반대로 말하면 누가 도령에게 강요할 수도 없다는 뜻이고.”
“일단은. 반면 합류하는 상황은 똑같은 그림인데 목적이 다르잖아. 어쨌든 뉴 페이스가 등장하는 이유가 ‘나랑 사귈지 말지’ 결정하려고 오는 건 아니니까. 물론 속사정이야 모르는 거지만 어쨌든 겉으로 드러난 의도로 따지면 그렇잖아요. 그러니 괜찮은 거야. 인연론에 의하면 이 역시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될 테니, 합류를 무조건 승낙해야하는 건 아니지. ‘필요’가 아닌 건 아까와 같아요. 근데 불호는 아닌 거야. 오히려 ‘호’지. 누군가의 소개로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는 건 싫지 않고, 오히려 반가운 일이니까. 그러니 0과 +가 합쳐져서 가부의 ‘가’가 되는 거죠.”
“그럼 만약에, 소개팅을 하는데 주선자가 ‘꼭 사귀라는 게 아니라, 좋은 사람 만난다고 생각하고 나와라. 잘 되면 좋은 거고, 안 되어도 친구로 잘 지낼 수도 있지 않냐’고 말하면?”
“그래도 어쨌든 나는 안 하지. 만남에 절반이라도 ‘사귐’이 목적으로 들어있으니까. 만약 소개팅의 형식이어도 ‘그냥 소개야, 사귀라는 게 아니라 100% 그냥 친구 소개야’라고 하면 상관없겠지. ‘사귐’이 목적이 아니니까. 근데 그러면 이미 소개팅이 아니지 않나? 내가 가진 소개팅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연인으로서의 사귐을 가정하고 그 목적을 위해 모르는 사람을 소개 받아 만나는 것’이니까.”
“그게 소개팅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아요? 그런 마음으로 소개팅 하는 사람도 많잖아. 그게 소개팅이 아닌 건 아니지.”
“맞아요, 말을 정정해야겠다. 모두에게 아닌 게 아니라 나에게 아닌 걸로. 그들과 내가 가진 소개팅의 정의가 서로 다른 것뿐이니까. 정확히는 나에게는 아닌 거예요. 문제될 거 없지. 내가 말하는 ‘소개팅’은 특정 목적의 특정 상황이고, 난 그게 싫은 거니까. 그 사람들이 어떤 정의를 가지고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하는지는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죠. 나한테 피해주는 것도 아니잖아.”
“...혹시 내 대꾸가 좀 날카로웠어요?”
“나도 지금 그 생각하고 있었어요.”
“좀 그랬죠? 미안해요.”
“아니, 아니. ㅋㅋ 그 생각이 아니라. 나 역시 방금 ‘내 대답이 좀 날이 서있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아.”
“혹시 그랬어요?”
“방금 우리 둘 다 약간 그랬던 것 같아.”
“맞아, 그럴 일 아닌데. 생각이 많이 다르다보니까 서로 의사표현이 약간 격양된 것 같아. 나도 미안해요. 이거 전혀 그럴 일 아닌데.”
“맞아! 좀 무서웠어!”
“끄응... 미안. 아마 내가 먼저 좀 흥분한 것 같아. 사실 이 소개팅이라는 주제... 내가 진짜 싫어하는 주제야. ㅋㅋ 정말 많이 싸웠거든. 정확히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아니고 좀 다른 것 때문인데, 아무튼 그간 좀 트러블이 많았어.”
“생각 차이로?”
“아니, 그러니까... 뭐랄까, 유독 내 주변에 매주 주구장창 소개팅을 하고 있으면서, 그렇게 소개팅을 여러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 상황에 불만족스러우면서, 그럼에도 계속 소개팅을 강행하고 있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면서, 게다가 소위 말해 까였든 상대가 별로였든 아무튼 이번 역시 결과가 좋지 않아서, 결국 처참한 마음으로 나한테 소개팅에 대해 찡찡대던 친구 동생 누님들이 되게, 되게 많았거든.”
“...거기서 도령 신명나게 깠구나.”
“응, 완전 영혼을 불태웠지. 지가 생각하고 지가 선택해서 지가 해놓고, 밥 잘 처먹고 와서 왜 이제야 그딴 하소연이나 지껄이고 있냐고. 그럴 거면 안 하면 되지 않느냐고. 으아, 엄청 싸웠어. ㅋㅋ”
“그랬겠다. 틀린 말은 아닌데, 음.......”
“그래. 내게 기대했던 바는 알아. 근데 알다시피 난 ‘답정나’ 스타일이잖아. 아무튼 방금까지 우리가 하던 말들이, 그렇게 싸울 때 주로 나왔던 흐름 중 하나였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날카로워졌나봐.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니 나 말하는 동안 좀 열받아있었구나. 진정하고 나서 보니까 확실히 그러네. 미안해요.”
“나도. 나도 도령이 내 생각이랑 너무 달라서 좀 흥분했어. 평소에는 ‘도령 생각이구나’ 하고 잘 듣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계속 부정하고 싶고 반론하고 싶더라. 그러다 보니 방금 깨달았어요.”
“뭘?”
“도령이 말하고 있는데 나 제대로 안 듣고 속으로 계속 반론할 거리만 찾고 있는 거야. 그거 깨닫고 깜짝 놀라서 사과했어요.”
“맞아, 말로 싸울 때 그거 있어. 나도 자주 그러고, 또 싸우다가 상대 눈빛 봤을 때 ‘이 사람 지금 내 얘기 안 듣고 있구나’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고. 아무튼 싸우던 중에 그거 알아채기도 어렵고, 열 오른 상태에서 먼저 사과하기는 진짜 더 어려운 건데. 고마워요.”
“......”
“그럼 둘 다 사과하고 둘 다 정리했으니 이건 퉁. 뭐, 별로 심각한 문제도 아니고, 너무 과열되기 전에 잘 멈췄고.”
“응.”
“하던 얘기 마저 하자.”
“그럼 내가 정리 좀 해볼게요. 그러니까 도령의 기준은, 친구나 다른 관계가 만남의 목적이면 괜찮은데 연인이 목적이면 싫다는 거네요? 도령이 생각하는 인연론은 인의의 개입을 아예 부정하는 게 아니라, 사귐을 목적으로 하는 인의만 거부한다는 거지? 좋지도 않고 그럴 이유까지도 없어서? 그리고 소개팅이나 미팅은 노력보다는 발칙한 인위라고 보고. 그 시스템이나 모양새도 좋지 않으니까 거부한다는 거네.”
“맞아요. 이건 뭐가 옳고 그른 시비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개인 정한 가부의 차이예요. 그게 괜찮고 좋은 사람은 그냥 하면 돼. 그들을 비난하거나 무시하거나 매도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각자의 사상에 기인한 기준인 것뿐이야. 내 주변에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소개팅을 하고, 그렇게 사귀고 결혼도 하니까. 단지 나는 싫은 거야. 시비가 아니라 호불호와 그에 연동된 가부의 영역에서. 안 그래도 다른 쪽에서 이미 충분하게 나를 상품화하는데 이런 부분까지 그러고 싶지 않아. 그냥 자연스럽게 살다가 자연스럽게 만나서, 그래서 연이 닿고 뜻이 맞으면 자연스럽게 사귀고 결혼하고 그랬으면 좋겠어. 솔직히 막말로, 세상만사는 다 영업이지. 영업 아닌 게 어디 있겠어요. 소개팅을 하나 안 하나, 어차피 만나고 나면 이후 연인으로서의 모습은 똑같아지는 건 마찬가지고. 다만 만나고 나서 사귀는 동안 서로 영업을 하게 된다 해도, 만남까지의 방식과 과정에서만이라도 영업적 인의를 배제하고 싶은 거야. 우리만 해도 그렇잖아. 얼마나 영화처럼 만났어.”
“좀 노골적이긴 했지만 말이지.”
“그것도 결국 큰 흐름 중에 하나였지. ‘우리가 몇날 며칠 어디에서 서로가 가진 상품을 비교하러 만납시다’ 하고 약속한 건 아니잖아. 그렇다고 이렇게 만났으니까 우리만 순수하고 깨끗해? 소개팅 하는 사람들은 더럽고 속물이고? 그렇지 않지. 소개팅 없이 만났다고 서로 뭐 따질 거 안 따지고 조건 안 보고 그러는 건 아니잖아. 이렇게 만난 우리도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영업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그냥 만나게 된 방식의 차이인 것뿐이야. 다만 애써 나서서 ‘여기 이런 상품 있어요. 관심 있으면 한 번 둘러보고 가세요’라고 진열하듯 광고하고 싶지는 않아. 그것도 벼륙시장에서 직거래 상품비교 하듯 노골적인 맞대응으로는 더욱.”
“생각이 확고해서 그런가, 도령 방식대로 표현하면 공격적 단어들이 엄청 많구나.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도령한테 있는 그 ‘격한 트러블을 유발하는 주제’중에 하나인 것 같네.”
“맞아, 지난번에 말했던 기념일에 관한 그것처럼.”
“주변 사람들이랑 정말 많이 싸웠겠다. 곡해도 많이 받고.”
“근데 아까 말했던 식의 트러블은 많았지만, 사실 이 개념 자체로는 별 트러블은 없었어.”
“왜? 여기까지 얘기를 안 해서?”
“응. 그냥 ‘소개팅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라고 말하면 더 물어보지 않거든. 말한다 해도 문제가 될 개념도 아니고. 상황이 문제라 싸운 거지. 그리고 소개팅 얘기 자체가 나올 일도 별로 없었어요. 소개팅 없이도 알아서 잘 만나고 잘 사귀고 그랬거든.”
“나 참, 기승전자랑이네.”
“주변에서 가만히 안 두는데 어떡해.”
“1절만 해요.”
“킬킬, 그래서 어쩌게요?”
“어쩌긴. 도령은 숭고한 이상 때문에 주선도 안 해주신다는데, 다른 사람 알아봐야지.”
“뭐야, 왜 이렇게 까칠해?”
“글쎄, 나는 세속적인 상품영업으로 소개팅하고 주선도 해주는 여자라 그런가 보지.”
“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뭘 어떡해, 몰라.”
“화난 건지 장난인지 진짜 모르겠네.”
“...진짜 살면서 소개팅 한 번도 안 했어요?”
“응. 대학 때 미팅은 몇 번 했는데, 소개팅은 진짜 한 번도 안 했어.”
“미팅 안 했다면서!”
“미팅은 싫어한다고 했지, 언제 안 했대. 머릿수 채우려고 몇 번 했어.”
“다른 속셈 없이?”
“진짜 머릿수 채우러 나간 거야.”
“더 악질이다. 만날 마음도 없이 나가는 게 더 나빠.”
“그래도 ‘비싼 게 먹고 싶어서 소개팅하고 왔어’ 이러지는 않잖아.”
“그런 건 진짜 소수라고! 그런 사람 보면 나도 열 받아.”
“알아요, 소수인 거.”
“가끔 보면 도령은 진짜 극심한 인간 혐오자 같아.”
“전혀 아니지. 난 누구나처럼 ‘무개념 혐오자’야. 그 대상이 여자일 때도 있고 남자일 때도 있고, 또는 남일 때도 있고 나일 때도 있고 그런 거지. 단지 표현하는 방식이 좀 센 것뿐이에요.”
“어쨌든 도령이 좋아하는 그 ‘보통’은 좋은 의도로 소개팅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맞아, 동의해요. 아까 거듭 설명했듯이 소개팅 하는 사람이 무개념이라고 말한 게 아닌 거 알죠?”
“알아요. 아는데.”
“...아, 왜 화 난지 알겠다. 나한테 화난 게 아니구나.”
“으악! 도령 이럴 땐 진짜 재수 없어.”
“끙.... 이 여자 진짜 화 났네.”
“처음에는 반쯤 장난이었는데, 방금 진심 울컥했어.”
“인정. 이놈의 입이 화근이지.”
“알면 좀! 그냥 좀 넘어가!”
“.......”
“...막말한 건 미안.”
“그게 아니라... 어떻게 풀어주지 고민하고 있었어.”
“뭐야, 화난 줄 알았네.”
“아니, 전혀. 오히려 내가 미안해. 말하느라 당신 감정 흐름을 전혀 못 읽었네.”
“만약에.......”
“응?”
“내가 이번 한 번만 주선에 달라고 부탁하면, 잘 안 돼도 더 부탁 안 할 테니까. 그러면.”
“음.”
“그래도 당연히 안 되겠지?”
“아니, 왜 안 돼. 그러면 당연히...는 아니어도 하겠지.”
“아니, 왜?”
“깜짝이야, 왜 화내요?”
“화낸 거 아니에요. 의외라서.”
“왜 안 돼. 그게 내 기준인 건 맞는데, 신념 같이 절대 꺾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시비도 아닌 단지 내 호불호와 가부의 문제니까. 지난번에 말했던 내 ‘원래의 기준’에 의하면 안 하는 게 맞지만, 평소에 부탁도 안 하는 당신이 이렇게까지 말하면 못 할 이유가 뭐야.”
“완전 의외네.”
“...그렇구나. 당신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뭘?”
“5%와 95%에 대해 말한 거 기억나요?”
“네.”
“뭐야, 갑자기 공손해졌어. ㅋㅋ 아무튼 나는 기준이 명확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거지, 내가 정한대로 무조건 변경 없이 독불장군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관계고 인연인 거잖아. 그건 우리 둘이서 맺는 거고. 그러니 내 뜻대로만 하고 살 수는 없지. 내가 지금껏 당신에게 이 많은 내 얘기를 했던 이유는, 알아달라는 뜻이에요.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런 생각으로 이렇게 살고 있다’라고. 좀 복잡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이니까 오해하지 않도록 미리 밝혀놓는 거예요. 그게, ‘나는 이러니 그렇게 알고! 어? 바꿀 생각도 하지 말고! 어? 알아서 잘 맞춰라! 으이?’ 이런 뜻이 절대! 절대로 아니라.”
“......아.”
“지금까지 거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뭐라고 해야 하지....... 딱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당신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지?”
“...응.”
“좋은 기회였다. 서로 오해가 더 쌓이기 전에 이렇게 드러나서 정말 다행이야.”
“응. 사실 나 조금 답답했던 부분도 있었거든.”
“말을 해야 알지, 이 여자야.”
“응.”
“하긴 쉽게 말 못한 건 90%가 내 태도 탓이겠지만. 이제부터라도 담아두지 말고 바로바로 말해요.”
“알았어요. 그럼 부탁해도 돼요?”
“그래요, 한 번 알아볼게요. 잘 되면 넷이 놀러도 가고 그러자.”
“히히.”
“이 여자, 이게 제일 아쉬웠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