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백 중 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한얼 Dec 30. 2024

[그데담 059]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겠어요.

 [1/3]






 “도령은 주는 게 더 좋아요, 받는 게 더 좋아요?”


 “주고받음에 대한 글 봤나 보네!”


 “어? 어떻게 알았지?”


 “킬킬. 난 둘 다 좋아요.”


 “뭐가 더 좋아요?”


 “엄마 아빠 다른 버전이에요?”


 “그런가?”


 “상호불가분이니까. 정상적인 환경이라면 아빠가 좋기 때문에 엄마도 좋은 거고, 반대로 엄마가 좋기 때문에 아빠도 좋은 거니까. 주고받는 문제도 똑같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도령은 우열을 나눌 수 없이 똑같이 좋다?”


 “아니요. 사실은 받는 게 더 좋아요.”


 “......”


 “이거 봐. 때리든가 째려보든가 둘 중 하나만 하지, 지금 둘 다 하잖아. 이래놓고 결국 때릴 거면서. 이게 지금 내 대답이랑 뭐가 다르나.”


 “말이나 못하면.”


 “근데 갑자기 왜요?”


 “받는 게 왜 더 좋아요?”


 “내 질문은 가뿐하게 씹어드시... 악! 이건 진짜 아팠다.”


 “진짜 요즘 장난기가 너무 심해졌어.”


 “그렇긴 한데, 이건 진짜 내가 먼저야.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해졌어요?”


 “그냥. 도령은 둘 중에 뭐가 더 좋은가 해서.”


 “그건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더 좋을 거라는 가정에서 나온 거죠?”


 “그...렇지?”


 “그럼 당신 역시 둘 중에 더 좋은 하나가 있을 거고?”


 “......”


 “찬찬히 생각해봐요.”


 “...나는 지금 주는 게 더 좋아. 근데 이유는 아직 모르니 묻지 마!”


 “이제 미리 방어도 하네. 근데 이유 물어볼 생각은 없었으니까 걱정 마요. 아무튼 그렇구나.”


 “뭐가 그래요?”


 “둘 중에 하나가 더 좋은데 이유는 모르는구나 싶어서. 그럼 하나만 더 질문. 둘 중에 뭐가 더 싫어요?”


 “응?”


 “주는 것과 받는 것 중에 뭐가 더 싫으냐고.”


 “둘 다 안 싫은데.”


 “나도 엄마 아빠 다 안 싫어. 그래도 뭐가 더 부담스러워요?”


 “음, 아무래도 난 받는 건 조금 부담스러워요.”


 “좋은 대답이다. 대답과 이유가 함께 있는 훌륭한 문장이야.”


 “이유? 부담스럽다는 거?”


 “응. 풀어서 이야기 하면 ‘받는 게 더 싫다. 그 이유는 부담스러워서.’가 되잖아.”


 “그건 도령이 뭐가 더 부담스럽냐고 물어봐서.......”


 “부담스럽지 않았으면 ‘부담스러운 건 아닌데, 이게 더 싫긴 해.’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근거에 대해 정정하지 않고 그대로 대답했다는 것은 근거가 옳다고 인정한 거잖아. 지금 생각하기에 받는 게 더 싫은 이유랑 부담스러운 것과 상관이 없어요?”


 “...뭔가 유도신문 같은데.”


 “비슷하게 느낄 수도 있겠다. 근데 아니야. 그럼 그냥 이것저것 다 집어치우고 생각해봐요. 내 말이나 질문 다 잊어버리고, 받는 게 싫은 이유가 뭐인 것 같아요?”


 “...그건, 부담스러워 그런 거 같아요.”


 “뭐야, 결국 맞네.”


 “그렇긴 한데, 원래 내가 먼저 질문하고 있지 않았나.......”


 “맞아요. 근데 내가 가로채서 역으로 질문한 거야. 그것도 순서까지 뒤집어서.”


 “무슨 순서?”


 “호불호를 묻고 그 이유를 듣는 정순이 아니라, 이유를 먼저 유추해서 호불호와 이유를 함께 듣는 역순을 사용했다고.”


 “왜요?”


 “그 전에 정순으로 물었을 때는 호불호에 대한 대답은 해도 이유는 말을 못했으니까. 근데 내가 보기에는 당신은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역순으로 물어본 거예요. 역순으로 물어도 이유가 나오지 않으면 그때는 진짜 모르는 거라고 여기니까.”


 “그러니까 뭐가 더 싫으냐고 먼저 물어보면 부담스럽다는 이유까지 끌어내기 어려운데, 뭐가 부담스럽냐고 물어보면 이유와 함께 대답까지 함께 끌어낼 수 있다고?”


 “정확해. 이제 정리 참 잘해.”


 “게다가 그 예측한 이유가 아니면 아니라고 대답할 거고.”


 “맞아요, 이 역시 정확하네.”


 “음... 근데 그건 도령이 유도신문까지는 아니지만, 뭐랄까... 어떤 견본을 먼저 제공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가? 그런 건가? 하고 휩쓸려가는 거 있잖아. 도령 스타일로 얘기하면, 좌표를 고정해서 그쪽으로 유도하는, 뭐 그런 식?”


 “우리가 오래 만나긴 만났네. ㅋㅋ 비슷하긴 한데 달라요. 내가 자주 쓰는 ‘좌표유도’는 단 두 가지 용도예요. 첫 번째는, 이게 주된 용도이긴 한데,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방향을 잡아 일단 어디로든 움직이기 위해서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가상의 답을 정해놓는 거예요. 혼란스러우면 이도저도 못하는 경우가 가장 많으니까. 그래서 이때의 좌표는 고스란히 어떤 '지향점'이 되는 거지. 그 좌표가 맞든 틀리든 상관없어. 일단 방향을 찍어서 움직이면, 다른 말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면 혼란스러운 건 금세 풀리고 이전의 가정이 옳았는지 아니었는지 아주 쉽게 알 수 있거든.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게 핵심이야. 그러니 일단 벗어나기 위해서 오답이라도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게 좌표유도의 첫 번째 용도. 그리고 두 번째 용도는, 지금 당신이 말한 것처럼 어떤 것을 끌어오기 위한 자석처럼 쓰이는 용도야. 답이 있을 거라 예상되는 근처에 가정을 하나 던져서 답과 서로 밀어내는지 끌어당기는지, 그 상호작용을 확인하는 거예요. 이때의 좌표는 '유도점'이 되는데, 이 유도점의 특징은 비슷한 것은 끌어당기지만 반대의 것을 오히려 세게 밀어버리는 성질이 있어요. 말 그대로 자석처럼. 그래서 던진 근처에 답이 있으면 어떤 반응이든 나오는 거야. 던진 가정과 답이 아주 비슷하면 끌어당겨. 근데 약간 아니다 싶으면 오히려 밀어내. 아무 반응이 없으면 답 자체가 없는 거고. 그러면 다른 예상지에 다시 던지는 거야. 즉, 얼추 답이 있을 '예상 지역 축소'와 '답의 유무'을 찾아내는 게 좌표유도의 두 번째 용도예요. 그래서 비슷해 보이지만 좌표유도는 유도신문하고는 목적이 달라. 유도신문은, 상대가 무슨 생각이든 내가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것이잖아. 근데 좌표유도는 내가 원하는 바와 상대의 생각이 다르면 오히려 반대로 튕겨내버리니까 유도신문의 목적과 상충되지. 게다가 유도신문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해요. 첫째는, 강압적으로 원하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는, 대답하는 이가 답을 가지지 않은 채 혼란스러운 중이다. 말하는 이에게 듣는 이가 원하는 대답을 하게 만들려면 둘 다 있는 게 가장 좋고, 아니면 최소한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해요. 즉, 명확한 답과 의지가 있어도 강압하거나, 답이 없어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살살 꼬드기거나. 가장 좋은 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의 강압이지만. 근데 어쨌든 당신은 답을 가지고 있잖아. 게다가 내가 강압적이지도 않았지. 그러니 개론적으로 유도신문을 할 수도 없고, 먹히지도 않겠지.”


 “그런가.”


 “나는 방금 당신 말대로 좌표유도를 쓴 건 맞는데, 유도신문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오히려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데 모른다고 여기는, 보통 사람들이 으레 ‘잘 모르겠네’ 하고 넘어가는 것을 끌어오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 거지. 그래서 질문을 먼저 한 번 뒤집은 거예요. 무엇이 더 좋은지가 아니라 무엇이 더 싫은지. 이미 ‘무엇이 더 좋은지는 아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으니 묻지마’라고 스스로 도장 찍은 부분에는 이 좌표유도가 잘 안 통하거든. 아까 비유대로 말하면, 이 근처 답이 있겠거니 하고 가정이라는 공을 던졌는데 방망이를 든 당신이 그 앞에 서서 내가 던진 걸 3루타로 날려버리는 거야. 방어가 든든하니 예상 지역 축소는 고사하고 거기에 답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가 없지. 물론 하고자 하면 또 방법은 있어. 방망이 들고 모르겠다는 도장 찍어놨다고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근데 엄청 어려워. 무엇보다 그렇게 찾아낸 답은 스스로 잘 믿지 않아. 신뢰받기 힘든 방식이지. 그래서 나는 그런 우격다짐 비비기는 거의 안 써요. 겉모습만 보면 강압적 유도신문, 딱 그 짝이거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무슨 그림인지는 그려진다.”


 “그치? 그래서 나는 주로 유도신문, 아니지, 유도신문이란다.”


 “ㅋㅋ 말이 꼬였어요?”


 “옆에서 떠드는 바람에, 킬킬.”


 “...불륜인가 봐.”


 “법 없어졌다고 아주 제 세상이구먼. 아무튼 그래서 나는 주로 좌표유도를 우선 사용하고, 만약 이미 방어가 있으면 빙 돌아가는 방법을 써요. 아까 한 게 그거예요. 사람의 인식이라는 게 참 재밌게도, 종이만 살짝 뒤집어놓으면 그 전에 찍어놓은 도장이 눈에 안 띄거든. ‘뭐 던지기만 해봐, 다 날려줄 테니까’ 하면서 눈 부릅뜨고 벼르고 있는데 뒤에서 날아온 것에 엉덩이를 맞은 식인 거야. 그래서 질문을 좋은 것에서 싫은 것으로 바꾼 게 한 번, 다시 정답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을 만한 가정인 ‘부담스럽다’는 단어를 넣은 게 또 한 번, 총 두 번을 비튼 거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도법이 아니에요. 그 전에 방향을 바꿔서 인식을 초기화시키는 게 가장 중요한 거야. 초기화한 후에 유도법을 써야 시스템이 작동하고, 그 확률도 높아지니까. 정리하면, 당신이 받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가 부담스러워든 아니면 전혀 다른 이유이든 그건 상관이 없어. 비틀어서 던진 질문으로 인해 직전에 당신이 자신에게 찍어놓은 ‘모르겠다’라는 도장이 초기화된 후이니까, 그 뒤에는 뭐가 되었든 아무거나 툭 던져 놓으면 돼. 그럼 거기 답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건지 당신이 알아서 말해줄 거거든. 그래서 나는 그냥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부담이라는 단어를 던진 건데, 잘 찍은 건지 그게 답과 아주 가까운 가정이었던 거야.”


 “음.”


 “물론 이 좌표유도에는 유의점이 있어요. 어느 정도 그럴듯한 것을 던져야해. 전혀 엉뚱한 것을 던지면 올바른 답으로의 수습이 어려워지니까. 당연히 튕겨나갈 거니 던진 의미도 별로 없고. 물론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게 필요한 순간도 있지만, 보통은 그럴듯한 것을 던져야 답의 모양을 찾아내는 게 쉽고 편하지.”


 “그럴듯하다는 것이... 방금 말은 좀 이해하기 힘들어요.”


 “예를 좀 들어볼게요. 당신은 주는 것과 받는 것 중에 받는 게 더 부담스럽다고 했지. 그럼 주는 게 덜 부담스러운 이유가 뭐예요? 주는 것은 스스로의 허영이 충족되니까 덜 부담스러운 건가?”


 “음. 그건... 물론 그런 부분도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아.”


 “주는 것의 결정적인 이유가 허영은 아니라는 말이지?”


 “응. 아무리 생각해도 ‘허영 때문에 주는 게 더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 같아. 물론 그것도 이유 중에 포함되어 있겠지만 절대 크진 않아.”


 “그럼? 당신이 주는 게 덜 부담스러운 이유는 뭘까?”


 “글쎄... 잘 모르.......”


 “잠깐, 여기서 컷. 한 번 초기화.”


 “응?”


 “그럼 받을 때 얻는 물질적 결과물보다 주고 나서 얻는 감정적 결과물이 더 기뻐서 그런가? 내가 좀 더 기뻐하는 행위니까 덜 부담스러운 건가?”


 “음? 그런가? 맞아, 아무래도 그렇지. 근데 글쎄... 기뻐서? 비슷하긴 한데, 뭐랄까. 좀 다른데.”


 “어떻게? 기쁨을 주는 행위자와 느끼는 당사자가 좀 다른 건가?”


 “말하자면 단지 주는 행위가 내가 기뻐서라기보다는, 그것을 상대가 받으면 기뻐하잖아. 그럼 그 모습을 보면 내가 기분이 좋아요.”


 “자기만족에 가까운 건가?”


 “그런가? 응, 그게 가장 비슷하네. 받으면 물론 좋아. 기쁘고 고맙고. 근데 받는 순간 ‘내가 무엇을 줘야 할까?’라는 생각이 불쑥 들어요. 이 정도를 받았으면 무엇으로 되돌려줘야 할까. 내가 지난번에 이 사람에게 무엇을 어느 정도 주었더라. 이 사람은 보통 나와의 관계에서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는 사람이었지. 무슨 의도로 주는 걸까. 받는 순간부터 이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들어. 그래서 기뻐야하는데, 실제로 기쁘면서도 동시에 부담스러운 거야. 그래서 온전히 즐기지 못해요. 근데 주는 건 안 그래. 사실 관계나 상황에 비해 너무 과한 선물이 아니면 별로 부담스러울 필요가 없잖아. 내가 그런 과한 선물을 할 일도 없고. 그냥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마음만큼, 줄 수 있는 것을 주는 거야. 그리고 그것을 줬을 때 상대가 좋아하면 그게 뿌듯하고 기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 단순히 ‘선물을 잘 골랐구나’ ‘마음에 들어 하네’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좋다’ ‘내가 관계를 잘 맺고 있구나.’ 등등. 물론 ‘진짜로 마음에 들어 하는 건가?’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이런 걱정도 들지만 그래도 결국은 주길 잘했다고 결론이 나요. 그러면 기쁜 거야. 그 뒤에 뭘 돌려받기 위해 준 것도 아니고, 다른 뭘 바라고 준 것도 아니니까. 줘서 기쁜 마음 빼고 나머지는 사실 내가 고민할 문제가.......”


 “왜 하다 말아?”


 “...음.”


 “귀여워라. 혼자 신나게 떠들고 놓고, 뭘 이제와 부끄러운 척 하고 그래.”


 “아니, 그냥 말하다 보니.......”


 “아무튼 여기서 두 번째 컷.”


 “응?”


 “말 두 번 자른 건 미안. 방금 이 과정이 아까 말한 그럴듯한 유도법의 의의와 목적이야.”


 “왜?”


 “순서대로 말해볼게. 처음에 내가 갑자기 주는 게 덜 부담스러운 이유가 뭔지 불쑥 물었지? 이 질문을 들을 때의 당신은 모든 것이 초기화된 상태야. 모르겠다는 도장도 방망이도 없는, 답을 내는데 방해할 만한 요소가 전무한 상황이지. 근데 어쨌든 답은 못했어. 당신은 이것에 대한 답을 평소에 정립해놓지 않았으니 갑자기 물어봤을 때 바로 답이 나올 수 없지. 그래서 내가 좌표유도로 뭘 하나 던졌지? 진짜 전혀 아닐 만한 엉뚱한 걸로. 그게 ‘허영’이었어. 그래서 당신의 답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했지.”


 “그래. 답을 찾기 위한 시도를 한 번 했는데 전혀 소득없이 끝나버렸지. 1차 시도는 실패한 거야. 이 '질문을 했는데 답을 찾지 못했다'라는 기록이 당신 머릿속에 저장되었을 테고. 그 상태에서 내가 바로 다시 물었어. 그럼 진짜 이유는 뭐인 것 같으냐고. 그때 당신이 반사적으로 뭐라 말하려고 했는지 기억나?”


 “으음, 그건 기억이 안 나요.”


 “‘잘 모르.......’까지 했어요. 그때 내가 첫 번째 컷을 했지.”


 “아.”


 “그러니까, 이게 전혀 엉뚱한 유도법의 폐해야. 너무 엉뚱한 것을 던지면 답 근처에도 못 가고 튕겨나가니 답을 찾는 것에 하등 도움이 안 돼. 던진 걸로 윤곽조차 밝히지 못하고, 답을 찾는 일만 더 방해하는 거야. 예상 단어를 던졌는데 답을 구경도 못했으니 막연히 어렵다고 생각하고, 아직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쉽게 모르겠다고 답을 하게 되지. 그러면 기껏 초기화한 것이 무색하게 다시 방어체계로 들어가는 거야. 즉, 너무 엉뚱한 유도법은 ‘초기화의 초기화’를 불러오기 쉬워. 도장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놓은 종이를 다시 뒤집는 거야. 이게 아까 말한, 틀린 후에 올바른 답으로 수습이 어려워지는 이유.”


 “...문득 든 생각인데 누군가는 이거 나쁘게 활용할 수도 있겠다.”


 “맞아. 사실 이건 악의적인 유도신문을 할 때 사용하는 기술이기도 해. 내가 원하는 식대로 상대를 세뇌시키려면 그 전에 먼저 혼란스럽게 만들어야 해. 자신의 생각과 그 생각에서 완성된 가치관을 흔들기 위해서는 지금껏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을 잘 모르는 상태로 바꾸는 것, 그리고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을 잘못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필요하거든. 이게 그 과정 중 하나야. 그래서 유도신문이 아닌 좌표유도 중에는 엉뚱한 건 어지간하면 안 던지는 게 낫지. 물론 필요할 때도 있어. 그리고 대안도 있지. 공을 잔뜩 들고 ‘모르겠네’라는 말이 나올 틈도 없이 연달아 막 던지는 거야. 물론 상호간에 정서적 공감대가 충분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그런 사이라면 엉뚱한 공도 나름의 쓸모가 있지. 어쨌든 그만큼 사각을 줄여주는 거니까. 그래서 내가 아까 바로 뭐라고 덧붙였지?”


 “주는 게 기뻐서?”


 “맞아. 모르겠다며 도장 찍으려던 손을 붙잡고 바로 다음 공 던졌지. 근데 정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나 비슷한 쪽이었나 봐. 즉, 그럴듯한 유도법의 공이었다는 거지. 그래서 당신은 도장을 내려놓고 다시 방어를 풀었어. 그리고 고민을 시작했고, 곧바로 가정과 답 사이의 상호작용을 찾았어. 맞지만 약간 다르다며 가정을 답 쪽으로 끌어당긴 거지.”


 “응, 맞아.”


 “그럼 이 과정을 통해서 당신은 스스로 답을 찾은 거야. 내가 옆에서 약간만 도와주니까 금세. 그건 원래부터 당신에게 답이 있었다는 말이지. 그 뒤에는 내가 뭘 더 안 해도 돼. 이미 답의 머릿실을 잡았으니 알아서 쭉쭉 전체를 뽑아낼 수 있거든. 그게 방금 길게 이야기했던 그 부분이지?”


 “그럼 처음 ‘허영’이 엉뚱한 유도법의 공이었고, ‘기뻐서’가 그럴듯한 유도법의 공이었던 거네요?”


 “맞아요. 그리고 그럴듯한 공으로 답의 윤곽이 나왔으니 ‘자기만족’이라는 좀 더 그럴듯한 공을 던져 좁혀 들어간 거지. 그게 결국 답이었고.”


 “...그런 식이구나.”


 “그럼 이제 정리 해봐요. 주고받는 것에 대해서 당신 다 찾아냈죠? 첫째, 당신은 주는 것과 받는 것 중에 뭐가 더 좋고 뭐가 더 싫은지에 대해. 둘째, 우리가 이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모르겠다며 재빨리 도장 찍어버린 좋은 이유와 중간에 모르겠다며 섣불리 도장 찍으려던 싫은 이유에 대해. 전부 당신 안에 답이 있었고, 결국 스스로 찾았네.”


 “그러네.”


 “그러면 내가 왜 <그데담 1화>에서 ‘아이고, 모르겠다.’라는 말이 행성파괴급 자멸주문이라고 말한 지 이제 이해가 가죠?”


 “고민없이 ‘모르겠다’고 쉽게 말하는 만큼, 나는 나에 대해 진짜 아무것도 알 수가 없게 되는 거네요. 사실은 알고 있는 부분까지.”


 “그게 반복되면 결국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거지.


 “그렇겠네.”


 “모르겠다는 도장은 진짜 가벼워. 그리고 매력적이지. 그래서 조금만 막혀도 쉽게 찍게 돼. 하지만 스스로에게 그 도장을 찍어버리는 순간, 조금만 고민하면 알 수도 있는 것에 대한 너무 많은 가능성들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거야.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나면 결국 알게 되겠지. 하지만 그 전까지 그 사람의 삶은 저 말을 하는 만큼 멀리 돌아가게 되는 거지. 아주 안타까운 노선으로.”


 “......”


 “...일단 끝.”


 “...솔직히 말해도 돼요?”


 “그럼요, 얼마든지.”


 “나 기분이 좀 안 좋아요.”


 “왜? 나 때문에?”


 “.......”


 “음?”


 “으으!”


 “엥?”


 “...아니! 도령 때문은 아닌 것 같아. 지금 뭔가 도령에게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이고, 버럭 화내면 손쉬울 것도 같지만... 나중에는 분명 후회할 것 같아.”


 “맞아. 잘 참았네.”


 “지금 내가 무슨 기분인지 알고 하는 말이에요?”


 “알지.”


 “안다고?”


 “응.”


 “그럼 내가 기분 안 좋을지도 알았어요?”


 “응.”


 “그리고 도령한테 화풀이 안 할 것도 알았고?”


 “아마.”


 “어떻게?”


 “왜 모르겠어. 나도 당했는데 당연히 너무 잘 알지.”


 “...도령도 누군가한테 이렇게 당했구나.”


 “그치. 누가 나를 가지고 캐치볼 하는 기분이었으니까. 아마 지금 마음 안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고 있을 거야. 근데 정확한 대상이 없어서 이런 감정을 불러오게 만든 사람에게 대신 퍼붓고 싶어지지. 뭐... 나는 괜찮아. 그 정도야 당연히 받을 수 있지. 근데 그러면 나중에 당신이 후회할 거야.”


 “......응, 그럴 것 같아.”


 “시간이 좀 필요할 테니, 나 리필 좀 시키고 올게요.”






 2015. 초여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