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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얼 Dec 30. 2024

[그데담 062] 감동의 무게

 [1/4]






 “...치사하네.”


 “음.”


 “일 년 동안 입 간지러워서 어찌 참았대?”


 “마음에 드나보네. 계속 찌르는 거 보니까.”


 “솔직히 말해 봐요. 여기가 남자들이 하나씩 숨겨둔다는 바람의 성지예요?”


 “바람의 성지는 뭐야?”


 “뭐긴. 여자들은 절대 모르는 남자들의 시크릿 플레이스지.”


 “비밀의 시크릿은 맞긴 한데, 바람의 성지 같은 그런 고전 알피지 게임스러운 곳은 아니에요.”


 “뭐. 아무튼 참 좋다. 노을 지니까 더 좋은 것 같아.”


 “마음에 드니 다행이네.”


 “나는 저....... 저거 뭐였지?”


 “어떤 거?”


 “그 왜 지난번에 말해준, 저거 호수에 빛 비치는 거.”


 “물비늘?”


 “그거 말고.”


 “아, 윤슬.”


 “응. 저 윤슬도 예쁜데, 나는 저기 노을 받은 산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더 좋다.”


 “여기보다 더 빨개지는 곳도 있어요. 다음에는 거기 가자.”


 “좋아, 좋아. 딱 좋다. 날씨, 햇살, 바람 뭐 하나 빠지는 거 없이 다 좋다.”


 “그러다 빠진다.”


 “......”


 “왜? 왜 그런 눈빛으로 봐요?”


 “솔직히 말해요. 무슨 바람이 불었어?”


 “무슨 바람은. 호수 바람이지.”


 “......”


 “아, 왜!”


 “보니까 여기가 거기야.”


 “어디?”


 “당신 글에 가끔 나오는 곳. 물어보고 싶었는데 왠지 묻지 말라는 뉘앙스라서 참고 있었거든.”


 “잘 참았네.”


 “근데 궁금한 걸 어째. 그래서 가끔 찔러봤지. 카페 가고 싶다, 바람 쐬러 가고 싶다, 근처 어디 갈 데 없나.”


 “완전 티 나는 떡밥을 맹렬하게 던졌지. 직구밖에 모르는 바보처럼.”


 “그러니 괘씸하지! 모를 사람도 아닌데!”


 “그래서 우리 자주 여기저기 나갔었잖아.”


 “느낌 상 그곳들은 아니었으니까 그렇지.”


 “누가 직관적인 사람 아니랄까봐.”


 “이건 직관이 아니라 육감이거든요.”


 “내가 아니라 당신이 입 간지러워서 어찌 참았대?”


 “그냥 그러려니 한 거지.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난 당신의 그런 현명함이 참 좋아요.”


 “그건 당연한 거니 말 돌리지 말고.”


 “아니, 이 여자 오늘 왜 이렇게 집요해. ㅋㅋ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여태까지 그래놓고, 왜 지금이냐 이거지.”


 “오늘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안 넘어갈 눈빛이네.”


 “따지는 건 아니에요. 그냥 참았던 궁금함이 폭발한 거지.”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그냥?”


 “지금 나는 그동안 당신에게 받은 감동 덕에 서있는 셈이야.”


 “응?”


 “아니면 나는 예전에 주저앉았을 거야. 이런저런 이유로 진작 엉덩이를 붙이고 낮아진 시야로 지금과 다른 것을 보고 있었겠지.”


 “나한테 무슨 감동을 받았어요?”


 “나는 금전적인 것을 베풀 때는 별로 받을 생각 없이 베푸는 편이에요. 물론 돈 거래는 조금 다른 문제지만, 무엇을 사거나 먹을 때는 대부분 그래요. 그리고 반대일 때도 마찬가지예요. 얻어먹으면 응당 내 쪽에서도 뭐라도 사는 게 맞지만, 그도 사실 별로 신경 안 써. 얻어먹었으니 사주기 전까지 계속 마음이 불편하거나 결국 못 사주면 두드러기가 나거나 그러진 않아요.”


 “도령은 그렇죠?”


 “그렇죠.”


 “근데 보통 다들 그렇지 않나?”


 “보통 그렇지. 당신 말고는.”


 “나? ......나는 왜?”


 “당신은 안 갚으면 두드러기가 나잖아.”


 “그냥 마음이 좀 불편한 거지. 이거 도령이 말한 대로라면 받는 것에 대해 온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해서겠지?”


 “그런 셈이지.”


 “근데 알아도 잘 안 되네.”


 “그도 그렇지.”


 “도령은 받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죠?”


 “일단 부담에 관해서는. 지금 내가 느낀 완전한 깨달음이 정말 ‘완전한 깨달음’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내가 정한 규정 안에서는 누락이나 손실 없이 제대로 된 기쁨을 누리고 있죠.”


 “도령은 어떻게 얻었어요?”


 “글에 적힌 대로예요. 별다른 방법은 없어.”


 “...뭐였더라. 받는 것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주는 것과 받는 것의 온전하지 않은 깨달음을 섞으라고 했었나.”


 “정확히 기억하네.”


 “근데 그것만 가지고는 모르겠으니까 그렇지.”


 “그 방법이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뭐랄까....... 일단 온전하지 않아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왕창 해봐야한다고 생각해.”


 “많이 하다 보면 섞인다고?”


 “그런 셈이지. 어쩌다 보니 나는 모자라지 않은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잘 자랐잖아.”


 “뻥치지 마. 대외용 인터뷰도 아니고 감히 내 앞에서.”


 “속사정이야 어쨌든 겉으로는. 체크 리스트에는 나나 당신이나 뭐 빠지는 거 없이 다 들어가 있잖아.”


 “...아무튼.”


 “아무튼 그랬고, 또 태어나자마자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받는 것’에 대해서도 인복도 많은 편이라서 왕창 받은 것 같아. 다시 생각해도 확실히 이것저것 많이 받았어. 그럼에도 내가 부족함을 느낀 이유는 그 종류와 타이밍, 방향성 등의 어긋남으로 느끼는 결핍감과 외로움이었지, 그 가짓수와 절대평가의 양으로는 부족하지 않았던 것 같아. 그러니 어쨌든 왕창 받은 게 맞지. 그리고 내가 철들면서 했던 게 또 왕창 주는 거였어. 물론 다음 단계의 깨달음을 위해서 한 건 아니야. 그때는 아직 이런 개념조차도 확립이 안 될 시절이었으니까. 그냥 어쩌다 보니 상황이 그랬고, 다행히 내가 여건이 괜찮았고, 또 내가 그런 성향의 사람이다 보니 그리 된 거야. 물질적인 거, 심리적인 거, 행동이나 감정, 시간이나 정성 등 가리지 않고 몽땅 퍼줬어. 아무 계산도 없이.”


 “이십 대 초반에?”


 “아마 그 무렵부터? 정확히는 그 전부터 그랬지. 다행히 19살부터 일을 하면서 나는 어지간한 또래보다는 자금도 넉넉한 편이었거든. 통장에 얼추 몇 백 정도가 항상 쌓여있었고, 또 매달 계속 벌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큰돈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뭔 짓을 해도 다 쓸 수 없을 만큼의 액수였지. 어렸으니 금전 감각도 별로 없지, 살다 보면 통장에 돈은 계속 쌓이지, 마침 주변에 애들은 많지, 나는 시간도 많고 손도 크지, 그러니 이래저래 막 퍼주는 시절이었어.”


 “아쉽네. 그때 도령을 만났어야 했는데.”


 “반응이 어쩜 이리들 똑같데. ㅋㅋ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꼬꼬마로 교복 입고 용돈 받으며 살다가, 처음 사회에 나와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며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에 그런 버릇이 들어버린 거야.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내가 가진 게 많든 적든, 그 양과는 상관없이 그냥 있으면 퍼주게 돼. 통장 잔고가 100만원이면 10만원만 쓰고 10만원이면 만원만 쓰는 게 아니라, 100만원이면 10만원 쓰고 10만원이면 10만원 쓰는 버릇이야.”


 “재무적으로 봤을 때 큰일 날 버릇이네, 도령.”


 “맞아. 예닐곱 명씩 끌고 다녔더니 혼자는 못 쓰는 돈도 금방 쓰고, 통장도 비었다가 다시 찼다가 그러더라고. 근데 그때는 그냥 그랬어. 없으면 뭐 어때. 돈이야 또 벌면 되지. 있으면 내고, 없으면 말아. 너도 그렇고, 나도 그래. 당장 배고프면 누구한테 얻어먹어도 되고, 둘 다 없으면 다른 있는 사람 불러. 이런 식인 거야. 재무 설계 측면으로 보면 ‘오늘만 살고 죽을 거냐?’ 싶은 거지. 근데 잘 살았어.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결혼은 한 것도 아니니까 아무렴 어때. 내가 그렇게 먼저 베풀면 어지간하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해. 애들도 땡전 한 푼 없다가 5만원이 생기면 4만원 꼬불쳐놓고 만원만 들고 오는 게 아니라, 케이크 하나랑 분식 잔뜩 사들고 오는 거야. 있으면 좀 더 풍족하게 먹고 마시는 거고, 없으면 좀 부족하게 노는 거지. 그래서 그 무렵에는 오늘은 양주 까고 다음 날은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밤새 수다 떠는 날들이었어. 어렸으니 가능했고, 다들 그럴 수 있으니 괜찮았어. 그러다 보니 어찌 되었을 것 같아?”


 “다 같이 망했어?”


 “나 참, 뭘 망해. 이거 진짜 웃겼다. ㅋㅋ”


 “나도 가끔 한 번씩 쳐줘야지. 아무튼.”


 “이미 당신이 궁금한 거에 대해 답 나오지 않았어?”


 “아, 그런가.”


 “풍족하게 받다보면 나 역시 풍족하게 퍼주게 돼. 풍족하게 못 받고 자랐으면 내가 먼저 넉넉하게 퍼주면 돼. 그러면 선순환이라는 눈덩이가 시작되고, 나는 그 순환을 시작한 사람이 되는 거야. 퍼준 만큼 돌아오게 되고, 돌아온 만큼 더 퍼주면 돼.”


 “이거....... 인과의 격리구나.”


 “정확해. 글 올리는 보람이 있네. 만약 내가 퍼준 만큼 상대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사람 잘못 만나고 있는 거야. 괜찮아, 그냥 다른 사람 만나. 물론 그 기대를 하고 퍼주는 건 아니지. 물질적이든 심리적이든 가진 재산이 각자 다른 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관계에서는 어떻게든 형평성을 맞출 수 있어. 무조건 맞출 수 있는 거야, 그게 관계니까. 돈이 많으면 돈을 쓰면 되고, 시간이 많으면 시간을 쓰면 돼. 둘 다 없으면 다른 정성을 쓰고, 진짜 형편상 이도저도 다 없으면 감사와 인사만이라도 쓰면 돼. 그럼 괜찮아. 퍼준 만큼 돌아오지 않으면 만나지 말라는 건 이런 종류의 사람인 거야.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무엇을 돌려줄 수 있을까 고민조차 안 하는 사람들. 없다는 걸 핑계 삼아 들러붙으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만 안 만나면 돼. 세상에 만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근데 그런 게 아니라면 굳이 같은 종목에, 같은 색깔을, 같은 무게로 맞추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내가 만원 냈으니 너는 9천원이라도 내, 이러지 않아도 돼. 주머니가 비었어? 그럼 내가 돈을 낼 테니 너는 맛있게 먹는 리액션을 내. 다음에는 반대일 수도 있고, 그게 몇 년 뒤일 수도 있어. 근데 상관없어. 어쨌든 내가 이걸 할 테니 너는 뭐라도 다른 걸 해. 그게 나한테는 Give&Take인 거야. 서로 손해 보지 않겠다고 판단되는 것을 최대한 등가에 가깝게 교환하는 것이 아니야. 그냥 내가 뭘 주면 상대도 뭘 주면 돼. 아무거나. 막말로 내가 밥 얻어먹으러 갔으면, 가는 길에 버들잎 하나라도 따서 상대 귀밑머리에 꽂아주라는 거지. 실제로 그랬어. 배고파? 근데 돈이 없어? 그럼 사줄 테니 맛있게 먹어. 오늘 집에 가기 싫어? 그럼 술 마시고 방 하나 잡을 테니 놀다 가. 혼자 있기 싫어? 그럼 같이 있어줄게. 둘만 있는 게 좀 그러면 애들 불러. 오늘 다 같이 놀자. 갑자기 가야 돼? 그럼 택시 타고 가. 뭐, 이런 식이야. 그러다 이십 대 중반 이후로는 여러 사정으로 인해 돈도 없고 시간도 없었어. 일은 매일 했지만, 심할 때는 48일 동안 휴일 없이 출근 전철을 탔지만 사정상 늘 가난했어. 그래도 여전히 당당해. 어디야? 나 배고파. 밥 사주러 오면 내가 맛있게 먹어주마. 바람 쐬고 싶다. 너도 생각 있으면 차 가져와. 회 한 접시 하고 해돋이나 보고 오자. 노래방. 양주 생각난다. 돈 있으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전부 고개를 끄덕일 테지만, 정말 토씨 하나 안 다르고 저랬어. 주머니에 달랑 오백 원 들고 말이야. 나는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지냈어.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는 어느 것도 손해 보지 않았어. 우리 중 누구도 손해 본 사람 없고, 이익인 사람도 없었지. 내가 얼마를 썼고 무슨 짓을 했든, 뭘 얻어먹고 빈손으로 돌아다녔든 손익을 따질 게 아무것도 없었어. 단지 그들을 만나 즐거웠을 뿐이야. 그게 관계지. 그래서 관계인 거야. 손이 없는 사람과 함께 한 게 아니라면 관계는 자연스럽게 놔둬도 알아서 균형을 향해 흘러가는 거야. 그건 섭리니까. 그러다 보니 나는 주는 것에도, 그리고 받는 것에도 아무런 부담이 없어졌어. 얼마를 줬으니 무엇을 얼마나 받고, 그런 계산할 이유도 없고 고민할 필요도 없지.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를 하는 것. 이게 내가 생각하는 교환관계의 모든 것이야. 그러다 보면 받는 것의 깨달음을 온전히 얻게 되는 거지.”


 “듣다 보니, 그럼 도령은 받는 것뿐만 아니라 주는 것에도 온전한 깨달음을 얻은 거 아니에요?”


 “그건 몰라. 내가 그랬는지, 아닌지는. 근데 내 기준에는 내가 아직 4단계는 아니라고 봐요. 아직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한 거니 정확한 설명은 못하겠지만, 지금 어렴풋이 느껴지는 바로는 4단계, ‘주는 것의 온전한 깨달음’은 아마 이런 Give&Take에서 벗어나서 주는 행위라고 생각해.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을지 그런 고민조차 없이 그냥 완전한 무위(無爲)에서의 주는 행위,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싶어. 그리고 섭리가 신기한 것은, 그렇게 아무런 계산이나 고민 없이 하는 행위는 받는 것의 온전한 깨달음과 융화해서 결국은 또 다시 교환의 균형을 맞춰줄 거라는 거야. 그게 섭리의 오묘함이자 대단함이지.”


 “......음.”


 “내 생각은 그래.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 주고받음의 4단계 중에는 3단계고, 받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깨달음과 기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 주는 것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이 보이고.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고민이나 계산 없이 주고 받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 같아. 관계에 대해, 교환에 대해, 그리고 교환관계에 대해 아주 최소한의, 내가 용납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기준 하나만 딱 세워놓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그냥 하는 거야. 그 가장 작은 기준이 내게는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를 하는 것’과, ‘뭐라도 하나는 하는 것’이야. 그 이외는 아무려면 어떠냐는 식으로 대하는 거지. 물론 이런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되도록 지양하면서.”


 “모르겠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은 감도 안 와.”


 “일단 나는 그래. 근데 나도 못 갚으면 두드러기가 나는 게 딱 하나 있어요. 관계에 대해서는 작은 기준 외의 인위(人爲)는 최대한 배제하려고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든 여기도 예외가 있는 거지.”


 “뭔데요?”


 “상대의 어떤 행동이나 베풂으로 감동을 받으면, 그건 반드시 꼭 갚으려고 해요. 원래의 교환관계론에 따르자면 굳이 그러지 않고 놔둬도 알아서 비슷한 양의 감동을 돌려주게 될 테지. 근데 이 부분만큼은 인의(人意)적으로 꼭 갚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감동을 받는다는 건 어떤 거예요? 예를 들어?”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예요. 상대의 베풂으로 내가 단순히 이롭거나 고마운 게 아니라, 받는 순간이나 혹은 받고 시간이 지나서라도 가슴에 싸릿한 감동이 퍼지는 그런 행동이요. ‘정확히 어떤 것이다’라고 규정할 순 없지만, 행위의 크기와 상관없이 나는 그런 감동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 기준은 상대도 모르고 나조차도 몰라요. 성의나 마음이 듬뿍 들어간 행위에 주로 느끼는 편이지만,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지는 않아. 단지 행위자의 의도나 목적과는 관계없이, 수혜자 입장에서 감동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가 있어. 아! 물론 직접 한 음식 같은 건 반칙이야. 그건 먹을 때마다 매번 코끝이 찡해지니까.”


 “그런 느낌이구나.”


 “그런 감동을 느꼈다면, 똑같이는 불가능해도 되도록 무엇으로라도 되갚으려고 해요. 내게 있어 감동을 받은 것은 은혜를 입은 것과 같은 급이고, 심지어 같은 급수 안에서 은혜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어요. 어찌 보면 웃긴 기준이지. 객관적 은혜보다 주관적 감동을 더 높게 치니까. 이건 지극히 이기적이고 또 부분적으로 강하게 드러나는 내 의존적인 성향 때문이에요. 은혜를 입었을 때 100%의 의지로 갚으려고 한다면 받은 감동은 120%의 의지로 되돌려주려고 해요. 근데 이 감동이라는 건 꽤나 얇고 변칙적인 골대를 가지고 있어서 내가 어디서 어떻게 느끼는지도 잘 몰라. 당연히 상대가 감동을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는 더 모를 수밖에 없지. 그래서 주로 내가 감동을 느꼈던 것들을 상대에게 똑같이 하는 편이에요. 아까 말한 성의나 마음 등, 한 마디로 하면 ‘신경 쓰는’ 행동들 있잖아. 원래 정확한 의미 전달로는 ‘신경 써주는’이라 표현해야 할 텐데, 알다시피 나는 ‘~해준다’식의 어미는 뉘앙스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변환할게.”


 “내가 너에게 뭘 해준다는 식의 표현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죠? 그래서 ‘같이 가줄게’보다 ‘같이 갈게’라고, ‘내가 해줄게’보다 ‘이거 내가 할게’라는 식으로 쓴다면서. 그래서 이것도 같은 의미로 ‘신경 써주는’ 게 아니라 ‘신경 쓰는’으로 말했다는 거죠?”


 “정확해요. 어쩔 수 없이 써야하는 상황이라면 쓸 수밖에 없지만, 가능한 것은 되도록 변환하는 편이에요. 이 역시 물론 옳고 그른 게 아니라 단지 내 기준이니 남이 나에게 그렇게 쓰는 건 별개니까 전혀 상관없지.”


 “맞아, 처음 들었을 때 신기했어.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사네, 라는 마음도 들었고.”


 “커스텀이지. 가능한 선에선 내 식대로 바꾸고 조금이라도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고 싶어 하니까. 아, 또 말이 셌네.”


 “응. 아무튼.”


 “그래서 내가 상대에게 이런 행위를 많이 한다는 것은, 반대로 내가 상대에게 이미 그만큼의 감동을 받았다는 척도가 돼요. 사실 받기 전에는 잘 안 하거든. 나는 매너 있는 사람이지만, 배려 넘치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리고 동시에 내가 상대에게 감동을 되갚으려고 하는 행동은, 그대로 뒤집으면 내가 감동을 느끼는 요소들이라는 말도 되지.”


 “문득 궁금해졌는데. 나는? 나는 어땠어요?”


 “......”


 “뭐야, 그 표정은. 굳이 그렇게 안 쳐다봐도 이미 민망하거든요.”


 “아니, 지금껏 내가 준 성의나 마음, 애정과 배려는 다 어디 버려둔 거야? 최근에 ‘답정너’로 전직 했어요?”


 “관둬, 안 들어.”


 “처음 했던 말을 생각해봐요.”


 “......”


 “...이거 기다려주는 것만 봐도 내가 당신한테는 배려가 넘치는 거야.”


 “서있게 한다는 말?”


 “맞아. 사실 이 장소는, 반드시 나 혼자 오는 장소예요. 아무리 친해도 남이랑 안 와. 처음에 누군가와 우연찮게 이곳에 오게 되었을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누구랑 왔어요?”


 “전 여자 친구랑.”


 “아. 말 잘라서 미안해요.”


 “괜찮아. 아무튼 이곳의 존재를 아예 모르고 살다가 우연찮게 여길 들리게 됐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 별 생각 없이 잊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랑 헤어지고 나서 어쩌다 혼자 다시 오게 되었죠. 그때 느낀 게 있어. 여기는 꼭 나 혼자만 와야지. 친하든 뭐든 누구랑 같이 오진 말아야지. 그것은 이 장소가 내게는 감동을, 더 나아가 위안을 주는 장소라서 그래요. 사람마다 타인을 배제하고 그 자리에 오롯이 자신만 놓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잖아요. 내게는 여기가 그런 곳이에요. 장소에 타인의 흔적이 점차 쌓여갈수록 혼자 와서 느낄 수 있는 자신의 몫이 줄어드니까. 흔적이 감상을 침범하는 개념이죠. 물론 언젠가 나 혼자만 아는 또 다른 장소를 발견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전까지 여기는 내게 그런 장소에요. 타인, 정확히는 나를 알고 관계를 맺은 지인의 흔적 없이 나 혼자서 마음을 놓고 위안을 삼고 감동을 얻어가는 곳. 근데 지금 우리는 여기에 나란히 서있지. 그것은 내가 여기서 얻은 위안과 감동 이상을 당신에게 받았다는 뜻이야. 이곳에 당신의 흔적이 덧씌워져도 상관없을 정도로 당신은 내게 아주 크고 반짝이는 그런 감동을 줬고, 지금도 주고 있다는 말이지. 그에 나는 내가 받았던 감동을 당신에게도 주려고 한 거고, 그래서 같이 왔어.”


 “응.”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나오는 카페 가지고 생색이라도 내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이 장소에 당신과 함께 오고 싶었어. 받은 감동을 되돌려준다는 둥, 당신의 감동이 이 장소의 감동을 뛰어넘는다는 둥, 뭐 이런 요상 발칙한 식의 말을 했지만 사실은 그냥 당신과 이곳에 같이 오고 싶었던 내 마음이 가장 커.”


 “...그렇구나.”


 “...너무 솔직했나 움츠러드는 당신 마음이 이런 거구나.”


 “왜? 도령 지금 그런 감정 느껴요?”


 “어. 내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나 싶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뭐 하나 헛소리였던 건 전혀 없는데.”


 “그럼 다행이고.”


 “나는, 그냥....... 고마워요.”


 “뭐가? 답정너의 모범 답안이?”


 “쑥스러워서 그런 밉살스런 소리를 해도, 표정이 그래서야 이쪽이 속아주기도 힘들겠네!”


 “거참, 그냥 속아주지.”


 “알다시피 내가 그렇게 친절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저작권료 내요. 나 비싸.”


 “나도 드디어 한 번 써먹어보네. 이런 기분이구나! 좋다.”












 <별첨>


 “그러네, 이제 알겠네.”


 “뭘?”


 “처음 만났을 때, 그때 도령 백수였잖아.”


 “그랬지.”


 “근데 나이 어린 사람에게 넙죽 잘 얻어먹는 거 보면서, 생각보다 꽤 뻔뻔한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거든.”


 “엑?”


 “근데 막상 만나다 보니 뻔뻔은 커녕, 자신에게 엄청 엄격한 사람인데 신기하다 싶었거든. 뭐, 초반 이후에는 

그것도 곧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아무튼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았네.”


 “끄응, 맞아. 나 처음에 좀 그래 보이지.”


 “당연히 처음 듣는 말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지. 그래서 대외용 교환관계도 따로 있으니까.”


 “어떤 거야? 보통 사람들처럼 하나씩 교환?”


 “비슷한데 약간 달라. 교환을 등가에 가깝게 하는 건 맞아요. 근데 실제로는 어지간하면 서로 교환할 일 자체를 잘 만들지 않으려고 그래. 초면인 사람에게 내 원래 방식을 설명하거나 납득시킬 시간도 여유도 없잖아. 그래서 대외용 교환방식을 만들어놓고 필요할 때 쓰긴 하지만, 어쨌든 원래의 내 방식과는 위배되는 거니까. 그렇다고 내 방식이랑 위배된다고 아예 안 할 수도 없고. 그러니 무례가 되지 않을 정도만 하는데, 그 관계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거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도령 방식은 설명하면 납득하고 이해하긴 쉬워도, 만나자마자 동참하긴 어렵지.”


 “정확히 그렇지. 이런 부분 역시 내가 4단계가 아니라는 근거 중에 하나기도 하고. 4단계가 되면 이런 것까지 자연스럽게 합쳐져서 지금처럼 굳이 나누지 않아도 될 거야.”


 “어쨌든 그렇게 분리해놨으면 최소한 뻔뻔하다는 소리는 안 듣겠네.”


 “대신 인색하다는 인상을 주지. 주거나 받을 때 고민하기 싫어서 그 행위 자체를 잘 안 하려고 하니까. 어린 애들한테는 짠돌이 형이나 오빠고, 윗사람들한테는 너무 거리감 두는 동생처럼 돼.”


 “아? 그러겠다. ㅋㅋ 생각 없이 사주는 거나 생각 없이 얻어먹는 건 도령에게는 똑같은 걸 텐데 상대 입장에선 다르게 보일 테니. 윗사람에게 사거나 얻어먹는 거야 그렇다 치고, 아랫사람에게 사주는 건 괜찮았겠지만 쉽게 얻어먹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 잠깐.”


 “응?”


 “근데 나한테는 왜 그런 거야? 초반부터 설명도 없이 막 얻어먹고, 이미 납득하고 동참하던 사이처럼 굴었잖아?”


 “그러니까 당신은 이래저래 이례적이었다니까.”


 “그냥 만만해서 그런 건 아니고?”


 “저기, 저기 가면 거울 있으니까 가서 봐봐. 만만해 보이는 여자가 마주봐주는지.”


 “앗! 아니면 내가 이례적으로 예쁘게 생겼나?”


 “......”


 “대답해.”


 “......”


 “대답해, 이 아저씨야. 뭐라도 말해.”






 2015. 늦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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