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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얼 Dec 31. 2024

[그데담 065] 정체성

 [4/4]






 “왜 투고 안 해요?”


 “스스로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있으니까 만약 당선이 된다 해도 납득할 수 있을까 싶어요. 당선되기 위해 내는 건데 당선되는 것을 우려하니 웃긴 일이죠. 이건 정체성의 문제라고 봐요. 오랜 기간 동안 꽤 많이 써왔지만 ‘이게 내 글이요’ 하고 내밀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쓰고 싶은 것을 써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쓰고 싶은 것을 써왔나 싶기도 하고.”


 “......변명이네?”


 “변명이죠.”


 “그래서 어쩌게요?”


 “우선순위가 필요할 것 같아요. 글에, 나아가 나에게도.”












 <별첨>


 “말이라는 게 무섭긴 하다. 서울 오는 내내 말한 걸 3문답으로 줄여놨네. 한 시간은 했던 거 같은데.”


 “함축이 뭐 그렇지. 이건 압축의 성격이 더 강하지만.”


 “어쨌든 주제는 같네.”


 “그래야지. 더 빼면 주제까지 손상되겠다 싶은 부분 직전까지만 쳐내는 거니까.”


 “음.”


 “원하는 대로 쓴 건지 모르겠지만, 막상 보니 어때요?”


 “생각보다 괜찮은데? 나만 볼 거면.”


 “처음 보는 내용이었다면?”


 “그럼 나도 지금 이걸 보는 다른 사람처럼 답답하겠지. 근데 소재 발상의 방향만 빼면 역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지. 함축으로 출발해서 당신 찍고 해설로 오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아, 그렇게 말하니 이 방법도 이미 하고 있었구나.”


 “그도 그렇지.”


 “...중간이 가장 좋을까요? 함축과 해설을 모두 담아서 표현하려면 글도 그 모습을 따라가야 할까요?”


 “어느 것 하나 좋지 않은 것 없고, 방법 아닌 건 없겠죠. 단지 모든 것에는 그만의 의미가 있고, 그에 따른 장단점만 달라지는 거니까. 지금 이건 이것대로 맛과 아쉬움이 있고, 자잘하게 길었던 이전의 담화도 역시 그렇죠. 사설에 비해 담화는 내용전달방식에 있어서 스토리의 역할과 그 의존성이 강한데, 그 스토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주제보다 앞뒤의 것들이니까. 그래서 담화에 있어서는 시작과 마무리가 주제만큼 중요한 셈이죠.”


 “시작과 마무리라면 정확히 어떤 것들이에요?”


 “방금 말한 저런 자잘한 것들이요. 지금까지의 담화에서 보면 주제를 제외한, 굳이 필요할까 싶은 나머지 대화들 있잖아요. 그것들이 주제의 범위를 정해주는 거예요. 주제 주변에 명확하게 둘러놓은 이 가이드라인은, 그저 개념일 뿐인 단순한 이야기를 스토리라는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어줘요. 그럼 그 공간 안에 생긴 여백으로 읽는 이의 생각이 끼어들 수가 있죠. 주제에 범위를 정하면 공간이 되고, 공간이 여백을 만들면 여백은 다시 주제와 연동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있던 담화 앞뒤에 이런저런 수다 같던 글들이 괜히 붙인 게 아니라는 말이네요?”


 “그렇죠. 쉽게 설명해서 만약에 주제와 본론, 그리고 풀이만 적어놓은 사설이라면 그 양과 길든 짧든 그것을 부정하려면 통짜로 전부 부정해야 해요. 부분적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이 별로 없죠. 물론 하고자 한다면 문장 하나씩 조목조목 따져가며 부정과 수긍을 나눌 수도 있겠죠. 방법적으로야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만, 쉽지는 않아요. 하지만 담화는 이 부분이 훨씬 쉬운 거예요. 그게 담화가 가진 특성이자 장점 중에 하나니까. 정해놓은 범위가 주제에 명확성을 주고, 스토리라는 공간이 내용의 특수성을 규정해줘요. 사설로 썼다면 이 글의 제목처럼 ‘정체성’에 대해 딱 저만큼의 주제와 풀이만 적어놨을 거야. 근데 담화니까 그냥 ‘정체성’이 아니라, ‘글에 대한 정체성’으로, 더 나아가 ‘글의 정체성과 투고의 상관관계’로 점차 좁고 명확해지는 거죠. 마치 예를 드는 것과 똑같아요. 사설이라면 ‘예를 들어’ 혹은 ‘이 상황이라면’ 이런 전제를 붙여야 하는 것을 담화에서는 범위와 공간으로 미리 깔고 가는 거죠. 게다가 담화에는 사설에 없는 것이 하나 있잖아요. 뭐일 것 같아요?”


 “...나?”


 “정확해요. 즉, 질문을 하거나 대답을 듣는 상대방이죠. 그는 담화 속에서 존재만으로도 여백의 역할을 해요. 사설이라면 내 생각과 맞지 않을 경우 통짜로 부정하게 되기 쉬운 것과 달리, 담화는 상대가 질문이나 대꾸를 할 때마다 끼어들 틈이 생기는 거죠. 그래서 사설은 부정과 수긍을 부분적으로 나누는 일이 어려워도, 담화는 그게 자연스럽고 편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담화는 보통 주제 말고도 다른 요소들이 함께 있어요. 물론 다른 구성의 글도 그렇겠지만 담화는 특히, 이유 없이 붙는 건 없어요. 전부 그것의 의의가 있죠.”


 “앞에 말한 것처럼 말이죠?”


 “응. 이번에 쓴 것은 글로고치면 정말 개론만 있는 것과 같아요. 본론과 결론만 뚝 떼어서 놔둔 거지. 근데 글, 달리 말하면 사설이고, 내 식대로 정확히 이야기해서 ‘사상문’이라면 그래도 괜찮아. 다른 거 없이 이것만 있어도 돼요. 그래도 하고자 하는 주제 전달에 전혀 문제가 없으니까. 근데 담화는 좀 달라. 물론 하고자 하면 이번처럼 할 수야 있겠지. 주제 전달을 할 수 있는 건 사설과 같아. 근데 이렇게 쓸 바엔 굳이 담화라는 방식을 사용할 필요가 없잖아. 담화를 선택하는 건 주제 전달뿐만 아니라 사설에서는 풀어내기 번거로운 그 안의 세세한 물결까지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니까. 누구랑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어쩌다가 이런 주제가 나왔는지. 어떤 문답들이 오가는 사이에 어떤 반응들이 나왔는지. 그 반응, 다른 말로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은 주제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상대의 반응에 따라 서술 중인 화자는 주제에 대해 어떤 사상의 흐름을 보이고 있는지. 그래서 결국 어떤 결론으로 귀결되었고, 그것은 화자에게 있어 그 주제에 대한 얼마큼의 범위인 건지. 청자와 담화를 하고 나서의 화자가 주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이 달라지는지 등등. 글 속에 주제와 함께 이런 것들까지 함께 담아두고 싶어서 담화라는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물론 이런 의도라면 담화의 방식보다는 시나리오 방식이 더 적합하긴 해. 대사만 있는 것보다는 배경과 상황에 대한 지문과 해설까지 있다면 스토리 형성과 전달이 더 용이하고 자세하니까.”


 “그럼 왜 시나리오로 안 하고?”


 “그건 그냥 데이트 생중계잖아. 당신과 한 대화를 글로 써서 올려도 된다고 허락한 게 설마 1인 방송국 수준까지는 아닐 거 아냐.”


 “아, 그러네. 그건 좀 그렇겠다.”


 “그러니 덜 효율적이어도 시나리오가 아닌 담화로 하는 거예요. 대사만 있으면 누락되는 것도, 고의로 누락시킬 수 있는 것도 많으니까. 그건 반대로 말하면, 누락되지 않고 담화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전부 필요해서 넣은 장치적 요소들이라는 거지. 어딘가에 무슨 의미로든 반드시 쓰이는.”


 “어찌 생각하면 시나리오보다 담화가 더 어렵겠네요. 아니, 어렵다는 표현보다는 번거롭다? 손이 많아 간다?”


 “맞아. 둘 다 어렵긴 하지. 그래도 있는 그대로 쭉 옮겨 적을 수 있는 시나리오보다는,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여러 요소들을 신경 써서 퍼즐처럼 끼워 맞춰야 하는 담화가 지금 내 수준에 좀 더 난해한 건 사실이지.”


 “그렇겠네. 구조적으로 더 복잡한 것 같아.”


 “담화의 구조는 시나리오와 다르고, 사설과는 또 다르지. 담화라고 단지 대사를 이어붙이며 질문과 답만 나열한다고 완성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는 정보 전달은 할 수 있겠지만, 단지 그것뿐이야. 내가 원하는 사상 표명은 되지 않지. 한 마디로, 내용이 ‘정보’가 될 뿐 ‘개념’으로 만들어지지가 않는 거야. 그래서 내가 쓰는 담화는 이런 모습인 거야. 글을 크게 나눠서 기승전결의 구조로 ‘개론+풀이’의 모습이라면, 담화는 스토리의 개념으로 ‘무대+개론+풀이+마무리’의 흐름이 되는 거예요.”


 “연극처럼?”


 “그렇지. ‘개론’ 부분은 양쪽 다 똑같지만 ‘풀이’ 부분이 서로 다른 거야. ‘글의 풀이’에는 풀이만 있어도 되는 반면, ‘담화에서의 풀이’는 풀이뿐만 아니라 무대와 마무리도 함께 있어야 돼. 식으로 표현하면 ‘글의 풀이=풀이’와 ‘담화의 풀이=풀이+무대+마무리’가 되는 거야. 여기까지는 연극과 비슷한 부분. 그리고 다른 부분은 담화는 말 그대로 대화만 있는 형태니까 배경과 상황을 대사 중에 직접 드러내거나 은연중에 짐작할 수 있도록 장치해야 하는 점이 다르지.”


 “미묘하게 크네.”


 “맞아. 그래서 전달의 측면에서 보면 글로 하는 게 쉬운 주제가 있고, 담화로 전하는 게 쉬운 주제도 있지. 아! 물론 앞서 말했던 이 모든 건 내가 쓰는 방식일 뿐이야. 내가 정리해서 혼자만 사용하는 개념이에요. 단지 나는 이런 식이고,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의도로 나눠서 쓴다는 거야. 보편성을 취합한 학술적 개념, 소위 정론과는 다를 수 있어.”


 “그건 당연한 소리고. 그럼 여기도 호불호가 있을까?”


 “절대적 호불호는 없지. 앞서 말했듯이 주제나 사상에 따라 상대적 호불호만 있는 거야. 같은 표명이라도 보는 입장에서 그 구조가 일방적 나열이 나을지 쌍방적 대화가 나을지. 하는 입장에서도 골프 같은 기술(記述)이 나을지 탁구 같은 서술(敍述)이 나을지, 단지 그 차이인 거야. 이런 구분이 주제의 구조역학을 바꿔서 느낌상의 차이를 크게 만들거든.”


 “아, 그래서 도령 사설과 담화에서 주로 말하는 주제가 서로 좀 나뉘는 거구나.”


 “그렇지. 심지어 같은 주제라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모습이 나오기도 하지. 또 간혹은 아예 다른 뜻처럼 보일 때도 있고.”


 “이게 사설과 담화만 그런 게 아니라 수필은 또 다르고, 소설은 또 다를 거 아냐. 시나리오나 시에서는 또 다른 모습과 느낌이 될 거고.”


 “맞아요. 그래서 장르라는 건, 사방에서 공의 중심으로 찔러 넣은 꼬챙이 같은 거야. 같은 주제를 찔렀으니 뭐든 ∅, 이런 경단 모양의 구조지만 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거지. 어떤 건 꼬챙이가 짧아 보이는 경단, 길어 보이는 경단, 가로로 누워있는 경단, 세로로 서있는 경단, 그리고 꼬챙이랑 몸통이 겹쳐져서 그냥 동그랗게만 보이는 모습까지. 그게 같은 주제인데도 각자 있는 위치나 견해에 따라 장르 별로 다양한 모습으로 보이는 이유인 거야.”


 “여기서 이제 대중성까지 둘러 입힌다 이거지? 그럼 기성작가들은 진짜 대단한 거네.”


 “내 말이. 작가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는 예술가들은 전부 대단하지. 대중성이 있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지만, 내 근본을 헤치지 않는 이상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지. 물론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게 가장 좋고.”


 “대중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아주 드문 경우만 빼면 그 둘을 조율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 개인성이야 노력 하지 않아도 드러나고, 하기 싫어도 드러나는 부분이니까.”


 “맞아. 무게 중심을 잃고 스스로를 놓치지만 않는다면, 보통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은 대부분 그 중간쯤에서 나오는 것 같아.”






 2015. 늦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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