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도둑은 잡혔어요?”
“무슨 도둑?”
“냉장고 도둑. 어제 덫 치고 왔다면서.”
“아. 응, 잡은 건 아닌데 누군지 알았어요.”
“누구였어?”
“그냥....... 전혀 그럴 만하지 않은 사람.”
“의외였겠네. 상사였어요?”
“상사는 아닌데, 나보다 연차는 많은 여자야.”
“그래서 어떻게 됐어? 대판 싸웠어?”
“아니, 그냥 지나가면서 미안하다고만 하고 말았어.”
“남의 거 훔쳐 먹고 그게 땡이야?”
“미안하다고는 내가 그랬어.”
“당신이 왜?”
“생각해보니 그냥....... 음, 그냥 좀 김이 빠지더라고.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어. 아니, 못 버는 사람들도 아니고 적잖게 벌면서. 그거 음료수, 샌드위치 뭐 얼마나 한다고 남의 걸 손대나. 이건 돈이 문제가 아니라, 점심으로 먹으려고 넣어뒀는데 막상 점심시간에 휑하니 없으면, 사람이 되게 벙 찌잖아.”
“맞아. ‘뭐야, 이거?’ 싶지.”
“처음 한두 번이야 당연히 누가 실수로 먹었나 보다. 모르고 먹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지. 아니, 누가 사무실에서 남의 거 손댈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냐고. 그래서 이름 쓴 포스트잇까지 붙여놨는데 그래도 날름 잘도 먹는 거야. 그것도 주인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차장님 두유부터 신입들 커피까지 홀랑. 아니, 우리야 그렇다 쳐도 월급도 적은 애기들 건 왜 먹어. 걔들 커피도 없어졌다는데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리더라고. 게다가 또 얼마나 신출귀몰한지. 나만 해도 하루에 몇 번씩 오가는데 안 걸리고 어찌 먹는지, 참. 조직적인 게 아닐까 하는 비약까지 들더라고. 그래서 처음에는 괘씸하기도 하고 화가 많이 났는데, 막상 누군지 알게 되니까 왠지 짠하더라고.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닌데. 그것도 애 엄마가.”
“연차 좀 되겠네. 그럼 적은 월급도 아닐 텐데.”
“그러니까. 그 모습 보는데 문득 마음이 좀 그렇더라고. 화나서 덫을 놓아 둔 게 괜히 미안해지더라.”
“그래서 미안하다고 한 거야?”
“그것도 있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나야 사실 별 타격 없어요. ‘왜 그런다니?’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야. 그거 천 얼마, 이천 얼마짜리. 그래, 남이 좀 먹으면 어때. 나는 그냥 남 줬다 치면 돼. 근데 그 사람은 자기 인성이 드러난 거잖아. 고작 삼천 원에 자기 인성을 팔아먹은 거잖아. 내가 놔둔 물건이, 그리고 악의적으로 쳐놓은 덫이 그 사람을 인성의 단두대 위로 밀어올린 거니까. 그래서 좀 미안했어.”
“흠.”
“그래서 어제 퇴근길에, 지나가면서 그냥 미안하다고 했어요. ‘뭐가?’라고 되묻는데 그냥 대꾸 안 하고 나왔어. 모르는 척 하는 얼굴이었는데, 느낌 상 왠지 무슨 말인지 아는 것 같더라고.”
“그랬구나. 잘했어, 아주 현명하게 대처했네.”
“그냥 착한 사람 콤플렉스도 아니고, 좋은 사람이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그 순간에는 진짜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내 물건에 손댄 건 그 사람인데, 손대게 놔둔 내가 미안해지더라. 서로 잃은 것에 너무 차이가 나잖아.”
“맞아.”
“도령도 그럴 때 있었어요?”
“있었지.”
“도령은 그럴 때 어떻게 했어?”
“나도 그럴 땐 그냥 그랬어. 널 시험에 빠트려서 내가 미안하다, 이런 식으로. 나는 당신과 달리 그런 걸 직접 대놓고 얘기하는 편이라 상대가 보기엔 고차원적 비꼼으로 받아들였지만.”
“난 대놓고 얘기하면 앞으로 어떤 얼굴로 봐야할지 모르겠더라고.”
“맞아. 뒷일은 그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지만, 말끔히 잘 하는 사람은 많이 없지. 웃기게도 그런 마무리를 잘할 사람이면 애당초 그런 짓부터 안 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게, 어렵더라. 내가 도둑질한 것도 아닌데.”
“잘 대처한 거야. 액수가 작을 때는 그러는 게 차라리 속 편해.”
“맞아, 몇 천 원이니까 그랬지, 만원, 십만 원 단위였으면 못 그랬을 거 같아.”
“힘들지. 내가 손해 본 게 월등히 적으니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도 드는 거지, 나 역시 큰 손해를 봤으면 그렇게 대처 못해. 똑같이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미안한 마음만 들지는 않지. 어쨌거나 잘못은 상대가 한 거잖아. 도둑질하라는 의도로 놔둔 것도 아니니까.”
“응.”
“내 손해가 작으니까 그럴 수 있는 거고,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해.”
“나 잘한 거죠?”
“응, 잘한 거야. 상대를 용서하는 만큼 당신의 소갈머리도 넓어지고, 반대 상황에서 용서받을 기회도 생기는 거니까. 잘 대처했어. 착하고 현명하네.”
“아, 근데 내일 가서 어떤 얼굴로 마주봐야 할지 모르겠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해요. 어제 아무것도 못 봤고 아무 말도 안 한 것처럼. 그럼 서로 마음에 약간의 이물질은 끼겠지만 그래도 서로 너무 부대끼지는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거야. 만약 그쪽에서 먼저 말을 꺼낸다면 그때는 당신 나름대로 받아주면 돼. 그럼 어쩌면 이런 일이 있기 이전보다 더 친해질지도 모르지.”
<별첨>
“그러고 보니, 무슨 덫을 놓은 거야?”
“...안 물어보면 안 돼? 좀 부끄러운데.”
“그러니까 더 물어보고 싶네.”
“그냥.......”
“뭔 짓을 했기에 그래? 설사약이라도 섞어놓은 거야?”
“......”
“......헐.”
“...아니, 그때는 너무 화가 나서.”
“우와....... 이 여자 대단하네.”
“나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 화장실 다녀올 때마다 얼굴이 핼쑥해지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그래, 그거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들 만하네.”
2015.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