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여행의 마지막 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제주공항으로 가는데, 바다를 한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빌딩 숲 서울로 돌아가면 아무리 사방팔방 열심히 둘러봐도 푸른 바다는커녕 작은 파도조차 찾아볼 수 없을 테니까. 비행기 출발시간까지는 2시간 정도 남아서 문제가 없었지만, 자동차 렌트 시간은 1시간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1시간 안에 바다를 구경할 수 있을까?" "제 시간 안에 자동차를 돌려주지 못하면 어떡하지?" 제주공항을 3바퀴나 빙빙 돌면서 발은 동동 굴렀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큰 결심 끝에 렌터카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통화연결음 소리가 내 심장을 움켜쥐었다. "여.. 여보세요. 호.. 허.. 혹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 상황을 이야기했고, 직원은 친절한 목소리로 반납 시간이 지날 경우 1시간당 10,000원의 추가 요금만 내면 된다고 말했다. 종종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문제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경우가 있다. 지금처럼 말이다. 누가 제주 바다를 1시간 동안 보는데 10,000원을 아까워할까? 나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반납 시간을 1시간 미루고, 제주공항의 동쪽에 위치한 '용두암'을 향해 핸들을 돌렸다.
인터넷에선 하늘로 승천하는 용머리 모양의 용암 지형을 용두암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용이 아니라 수면 위로 점프하는 고래처럼 보였다. 고래 주위로 튀어 오른 파도를 보면 고래가 얼마나 힘차게 뛰어올랐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용두암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경(고래)두암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용두암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용도 아니고, 고래도 아니고, 사람들이다. 용두암이 활력이 넘치는 이유는 용두암에 있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절벽 밑에 있는 작은 동굴에서 해산물을 파는 할머니들이 보였다. 할머니들은 아궁이 하나를 두고, 주위에 옹기종기 앉아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들 앞에 있는 빨간색 세숫대야에는 해삼, 낙지, 멍게, 개불 등 주로 못생긴 해산물들이 보였다. 손님들이 주문을 하면 할머니들은 무심한 표정을 하곤 빨간색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현란하게 칼춤을 췄다. 비록 낙지 한마디에 3만원으로 엄청난 가격이지만, 할머니들의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소리, 앉아만 있어도 힙업이 되는 목욕탕 의자를 위해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용두암에서 올라와 평범한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추억을 사진에 담고 있는 가족들이 보였다. 아빠는 오른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왼손으로는 다른 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엄마는 그 모습을 사각형 프레임에 담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펴기를 반복했다. 반대편에선 발목까지 길게 올라오는 흰색 양말에 팔랑거리는 파란색 바람막이를 입은 사람이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복장이나 장비를 보니 제주 사람이 분명했다. 바다를 보면서 뛰는 기분은 얼마나 상쾌할까. 괜히 질투가 나서, 입에서 흥하고 소리가 났다. 이번엔 해안도로를 차로 달렸지만, 다음엔 두발로 달리겠노라 다짐을 했다. 계속 걷다 보니 사람이 아니라 재미있는 물건들도 보였다. 오래된 자전거는 해안도로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있었다. 자물쇠는 바퀴가 아니라 안장에 잠겨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훔쳐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단 한 명도 그 자전거를 탐내지 않았던 것 같다. 자전거의 체인은 수많은 해무를 겪으면서 갈색으로 변했고, 뒷바퀴에 달린 고정장치는 힘을 잃어 덜렁거렸다. 그런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바로 뒷좌석에서 발견된 휴지다. 이 휴지는 세월의 흔적이 전혀 없는 오롯이 깨끗한 새것이었기 때문이다. 길게 늘어진 의자 밑에는 텅 빈 막걸리 통도 보였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막걸리를 따라 눈을 굴렸다.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제주 바다는 사이다를 처음 마실 때처럼 신비했다. 물처럼 벌컥벌컥 마시는 사이다도 처음에는 탄산의 톡톡 튀는 목 넘김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모른다. 지금은 너무 익숙한 나머지 특별함이 사라졌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만족스러운 바다 구경을 마치고, 차를 반납했다. 렌터카 업체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제주공항 주차장에서 내렸다. 제주공항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신호등을 하나 건너야 했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보였다.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설렘과 기대감이 묻어났다. 나처럼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피곤함과 아쉬움이 묻어났다. 무엇이 불만인지 입이 뚱~하고 나온 사람도 있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무서워 불안해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신호가 바뀔 때마다 백 명이 넘는 새로운 사람들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새로운 초밥을 계속해주는 초밥처럼, '공항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주제의 사진 작품들이 돌아가는 전시를 보는 것 같았다.
이제는 정말로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다. 공항에 들어가니 Self Check-In라고 적힌 기계가 보였다. 요즘은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직접 승무원을 찾아가 접수하지 않아도 된다. 공항에 있는 셀프 체크인 기계에 예약번호를 입력하니 항공권이 나왔다. 항공권을 손에 쥐고 나니 정말로 여행이 끝이 나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보안검색대로 들어가기 전, 공항 직원에게 항공권과 신분증을 보여줬다. 공항 직원은 "본인 맞으시죠?"라고 물었고, 나는 말없이 안경을 벗어 얼굴을 보여줬다. 공항 직원이 말한 방향으로 걸어가니 보안 검색대가 보였다. 나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마약을 소지하지도 않았는데 왜 보안 검색대에만 서면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짐과 옷을 바구니에 올려두고 보안 요원에게 검사를 받고 있었다. 5분 정도 기다리니 내 차례가 왔다. <알랭드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 보안 요원은 사람들을 항공기 폭파범 후보자로 본다고 표현했는데, 나를 담당자는 보안 요원의 표정이 그랬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열정이 가득한 신입사원 같았다. 그는 전신 검색대, 스캐너 모두 문제없이 검사가 끝나고 나서야 환한 미소를 보이며 내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소명을 가지고 일하고 있는 보안 요원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앞으로도, 수고해주세요."라고 답했다.
보안 요원에게 말하는 순간 입에서 단내가 났다. 화장실에서 치약과 칫솔을 꺼내려고 가방을 뒤지는데, 정말로 위험한 폭발물이 터져있었다. 부산에서 라면과 같이 샀던 계란이 노란색 액체가 되어 가방을 물들이고 있었다. 제일 먼저 필름이 괜찮은지 확인했다. 혹시나 필름 안으로 계란이 들어가서 열심히 찍은 사진을 인화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필름은 모두 보관용 통에 들어있어 무사했다. 다음으로 가방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꺼냈다. 립밤, 로션, 메모장, 옷 등 모든 짐에서 계란 특유의 비린내가 났다. 물을 적신 휴지로 몇 번을 닦아도 비린내는 가시질 않았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편의점에서 비닐봉지를 사서 동봉했다. 가방은 세면대에서 빨아서 손건조대에서 말렸다. "위이잉~" 화장실에는 손건조대에서 나오는 요란한 바람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장실에서 몇몇 사람들은 나를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쯧쯧"하고 혀를 찼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빨리 양치를 하는 것뿐이었다. 양치를 하는데 이상하게 내 입가에선 자꾸 실 웃음이 났다.
드디어, 서울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나는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에 항상 죽음을 상상한다. 10년에 한 번 정도는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듣는데, 비행기를 타면 그 사고의 주인공이 내가 될 것만 같다. 이런 고민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으면, 로또 당첨될 확률보다 비행기 사고로 죽을 확률이 더 낮다고 설득한다. 하지만, 나는 로또를 살 때마다 당첨이 될 거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도 덕분에 비행기를 타면 인생을 짧게나마 돌아볼 수 있어 좋다. 오늘도 역시나 사랑하는 사람, 음악, 소설, 영화, 운동, 음식, 풍경 등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에 담아둔 것들이 떠올라 그 가치를 다시금 음미했다. 어느새, 비행기는 방향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엔진 소리가 귀를 따갑게 울리면서 속도가 빨라졌다. 다리 - 엉덩이 - 몸통 - 심장 - 얼굴 - 머리카락 순으로 무중력 상태가 되더니 비행기가 붕~하고 날아올랐다. 배에선 바다와 파도를 실컷 봤다면, 비행기에선 하늘과 구름을 실컷 볼 수 있었다. 특히 고개를 들고 구름을 보는 게 아니라 고개를 내리고 구름을 보는 경험이 신선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름은 질감이 단단해서 날씬한 사람은 올라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구름의 모양은 규칙이 없었다. 곡선과 곡선이 만나 동그란 모양을 만들었고, 곡선과 직선이 만나 뾰족한 모양을 만들었다. 가끔은 직선과 점선이 만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모양도 만들었다. 그렇게 작은 창문에 붙어서 열심히 구름을 따라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노란색 조명으로 빛이 나는 빌딩 숲이 보였다. 순간, 스피커에서 지지직 소리가 나더니 기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승객 여러분,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시시한 여행이 드디어 끝났다는 사실에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유롭게 앉아 비행기 모드를 해제하고 다시 인스타그램을 설치했다. 그리고, 하늘 위에서 찍은 사진을 Come back! 이라는 문구와 함께 올려서 생존신고를 했다.
그럼,
지금부터 시시한 일상을 시작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