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mythe de Sisyphe
비행단 독후감 대회에 카뮈의 <페스트>를 제출했었다(해당 글은 차후에 업로드해야겠다).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 보니, 이어서 읽었던 <시지프 신화>의 내용들이 한결 생생하게 다가왔다. 복잡하고 추상적인 언어로 되어 있는 철학적 에세이이기 때문에, 열중하며 읽는다고 해도 실상 와닿는 문구는 크게 없을 가능성이 있는 책이지만, 철학의 특성이 있다면 읽을 당시보다 읽고 나서 한참 뒤, 말 그대로 머릿속에서 ‘발효’되었을 때,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제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선은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구든 시지프를 중노동에 시달리는 형벌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면, 조금은 슬플 것 같다. 물론 시지프가 노동이라 불릴 만큼 힘든 일에 시달리도록 저주받은 것은 맞다. 하지만, 아무리 육체의 시대라고 해도 시지프가 하나의 은유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시지프는, 비록 저주받았기에 저주자의 행위자성이 암시된다곤 해도, 일종의 ‘운명’에 처해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는 데에, 역설적으로 초인적인 주체성이 있다. 불평불만 한 마디 없이, 묵묵하게 돌을 밀어 올리는 그 자태는, 뭔가 숭고한 데가 있다. 정 힘들어서 미치겠다면, 일단 살고 보자고 돌 따위 내팽개치고 달아나 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시지프는 그러지 않는다. 자기 머리 위 저주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며, 올려놓으면 떨어지는 돌에 대해 기쁨의 미소를 짓는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를 ‘긍정’의 테마로 삼았던 이유는, 시지프가 끝내 정상에서 굴러 떨어지는 돌을 보며, 기뻐할 것이라는 해석 때문이다. 돌을 따라 달려가는 시지프의 발걸음은 가벼울 것이라고, 카뮈는 말한다. 이때 노동혐오의 시대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힘들어 죽겠고 아무 보람도 성취도 없는 일 따위를 하는 시지프야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빼닮았다 하지만, 대체 뭐가 기쁘다는 건가? 카뮈 이 이상한 문학가. 우리는 쉽게 시지프가 될 수 있지만, ‘기쁜 시지프’는 쉽사리 되지 못한다.
카뮈는 굉장히 자유주의적인 인물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반복의 노동을 견뎌내는 시지프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시지프는 저주받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기쁘다. 저주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기쁘다. 저주에 지지 않았음을 기뻐한다. 돌이 정상에 올라 반대편으로 떨어질 때,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한 차례 더 내가 이겼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성실함은 저주자들에겐 경악스러운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카뮈는 ‘반항’의 상징으로서의 시지프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의미 없는 고통과 중노동 속에서, 성실한 저항을 펼치는 평범한(그렇기에 초인적인) 인간. 고통을 즐기는 듯 마조히즘적이지만, 동시에 저주마저 끝내 성실하게 수행해버리고 말게끔 하나의 규칙으로 삼는 입법자적인 사디즘이 공존한다. 이런 시지프에게 속죄나 구원 따위는 가치 있는 게 아니다. 카뮈는 자기가 밝히지만, 분명하게도 니체를 읽었다.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그리고 다윈의 시대 이후, 정신이 몸과 물질에 간신히 붙어 다니는 종물이 되었지만, 시지프의 기쁨만큼은 모든 물질을 초월한다고 말하고 싶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경우보다 속물적이면서도, 그딴 물질 따위 아무런 조건 삼지 않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