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우 Nov 22. 2022

흡연에 대하여

왜 담배를 피우(었)냐고 묻는다면, 흡연자의 다수가 잘 대답할 수 있을지에 대해 관련 데이터도 없어 확실하진 않지만, 생명 권력(biopower)을 쥐고 흔드는 보건의료계의 강력한 주장 아래에서 흡연하는 것은 '무조건' 나쁜 것으로 비치며, "당장 금연하지 않는 것"에 대한 문책의 뉘앙스가 질문에서 제거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뉘앙스는 '흡연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오염된 행위로 보게 만들어, '그 자체로' 나쁜 것으로 만든다.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다는 것은 "맥락"이 제거된 추상적인 행위에 대해 도덕적 진리값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섹스는 무조건 좋다' 따위의 명제도 동일한 논리를 따른다(그만큼 무의미한 명제다. 어떤 섹스는 최악이다).


흡연에 대한 가정의학적인 조언의 맹목적인 건강론을 내려놓고, 인류학적인 시선으로 흡연을 바라보면, '담배를 피운다'는 것의 행위에는 아주 다양한 문화적 맥락이 존재한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입 아프게 이런 설명이 흡연이 '건강하다' 따위의 주장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으면!). 담배가 가지는 역사적 맥락(중앙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씹어 피우던 걸 스페인을 통해 유럽 상류층에 퍼졌다가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이 궐련을 피우던 게 보편화된 것. 역사적으로 언제나 힘에 겨운 사람들이 피우던 기호품이다.)을 고려하면, 흡연이 가지는 긍정적 효과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데, "노동"에 걸맞은 행위를 일상적으로 하는 자들에게 불안감과 피로감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흡연이 고통에 둔감하게 하고 잠시 집중력을 높이는 작용도 있으며, 허기와 심리적인 '허함'을 이겨내는데 도움을 준다. 야외의 경우 벌레를 쫓는 효과가 있다(무엇보다 모기를 쫓아낸다.).


이들은 긍정적인 '효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부정적인 효과도 있으며 현대의학의 성과로 밝혀진 것들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 담배를 많이 피우면 결국 질병으로 제명보다 일찍 죽거나, 급사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이런 "유해한" 담배 논의에서 지속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흡연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편안함을 찾고 고통을 피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누구도 스스로 고통받기를 원하지는 않을 텐데, 왜 흡연하는가? 익히 알려진 대로 담배에는 니코틴이라는 중독성 물질이 있다. 이 물질이 시사하는 바대로라면 사람들은 그저 니코틴에 중독되어 그것을 몸에 흡수하기 '위해' 흡연하는 것이다. 지극히 유물론적인 설명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마빈 해리스가 쓴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와 상동적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육식을 하는 것 역시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론적 설명이 놓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의 편향과 경로의존성이다. "단백질"은 도처에 널렸지만 우리는 특수한 형태로 가공된 단백질만을 섭취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 '니코틴'은 여러 형태로 존재하지만 그것으로부터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리 단백질이 부족하더라도 우리가 기어이 바퀴벌레를 삶아 먹지는 않는 것처럼, 살충제에 들어있는 니코틴을 분해하려고 작정하는 사람은 없다. 일정 부분 우리는 "담배가 담배이기 때문에" 피운다. 인간은 많은 것에 갖은 이유로 중독될 수 있지만, 어떤 것은 중독으로 명명되지 않기 때문에 건전하게 취급받는다. 가령, 의미 없는 활자를 생산하는 행위에 중독된다든지, 그리고 그것들의 메시지를 신봉한다든지. 혹은 일요일마다 교회에 간다든지.


흡연이 주는 시각적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사람은 '멋있다'("'멋있는' 사람이 피우는 담배는 '맛있다'"가 더 합당한 명제 일지 모르겠다.). 주관적인 평가지만, 수많은 성인영화(반드시 야한 걸 주제로 하지 않더라도)와 심오한 주제를 가진 문학에서 주인공들은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워댄다. 내뿜는 연기는 분위기를 대변한다. 부유한 엘리트 계층은 기호(嗜好)로서 즐겼고, 노동자들은 피로를 견디기 위해 의존했다. 그 중간에 있는 소시민들은 담배를 하나의 '기호(記號)'로서 소비했다. 실내 흡연이 합법이었던 20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상당수의 영상매체에서 이들을 다뤘고, 희극인 이주일 씨가 공익광고에서 "담배는 독약"을 선언하기 전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담배가 나쁜지 좋은지에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주는 문화적 효과, "하위문화"로서의 담배가 가지는 기호를 상징으로 삼고 사소한 것들에 저항하는 것이 내용의 주를 이루었다. "니코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미셸 푸코가 욕망에 대해 설명한 것이 이 사례에도 들어맞을 것 같은데, "욕망은 억압의 원인이 아니라 억압의 결과로써 욕망이 구성되는 것"이라고 한다. 담배가 가지는 순수한 효과들 이후, 뒤따라온 다방면의 "금지"들은 저항심을 가져왔다. "담배 피우지 말라"는 지독한 메시지에도 꾸준히 매대에 올라오고, 멈추지 않는 국가 주도의 생산 사업은, 그 의의를 회의하게 만든다. 정말로 온 국민이 피우지 않길 원한다면 중독성도 있겠다 '마약류'로 분류해도 무리가 없을 텐데, 그러지 않는다. 담배가 가지는 사회운영에서의 효과, 조세에서의 이득과 앞서 나열한 긍정적 효과들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담배 자체를 금지하면 당장 건설노동자들은 무슨 핑계를 대고 쉬겠는가?


"담배 한 대 피우자"는 권유가 가지는 인연 역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라이타'를 빌릴 수도 있고, 돛대가 아니라면 아무 담배나 빌린 다음 맛과 향을 평하며 친한 척을 해볼 수도 있다. 중추신경 억제제인 알코올을 섭취하는 술자리에서 중추신경 활성제인 담배는 정신상태의 균형을 이루게 도와준다. 그 참에 찬 바람도 쐬니 술김에 쌈박질할 확률이 낮아진다. 반쯤은 농담이지만, 담배가 죽이는 만큼 담배로 인해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의 결론은 문화인류학이 가지는 평범한 결론의 수순을 따라야 할 것 같다.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맥락에 집중해보자. 그러면 사물이 편견과 달리 아주 풍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물론 담배냄새를 싫어하는 후각의 소유자이거나, '간접흡연'에 대한 강박적인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모든 흡연자가 잠재적 위험에 불과하겠지만, 그러한 시선에 앞서, '왜 저들은 건강보다 흡연을 중시할까'에 대한 의문을 품는 것은 "흡연"이 문제시되는 사회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성의 흡연에 대해서 특별히 길게 서술할 수 있으리라 믿지만, '젠더'는 너무 큰 주제이므로 보류하도록 한다.


근래에 들어 '오직 니코틴'만을 외치며 궐련이 가진 '낭만'을 소거한 전자담배가 유행인데, 이러한 현상이 "관념론적 유물론"의 지배와 얼마나 연결될 수 있는지 역시 궁금하지만, 추가로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표본이 대체로 젊은 세대이니 직접 물어보면 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급양 병과에 대한 헌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