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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템포 Sep 12. 2021

A tempo

본디 빠르기로,

곡선의 아름다움

망각은 인간의 미덕일지 모른다

날이 좋은 일요일. 

몇 안 되는 짧은 순간이라 소중한 가을의 날씨다. 


이제는 꽤 윤곽이 보이는 작업물 덕분에 공방에 가는 길이 더욱 즐겁다.

아침의 활력을 선물해줄(직장인은 아아 못 잃어,,) 모닝커피를 사서 수업 5분 전에 도착했다. 

파운드케이크를 주셔서 아침에 당과 카페인을 충전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부지런을 떨고, 미리 유리를 주문했더라면 거의 완성에 가까워졌을 텐데. 

지난날의 게으른 나를 탓해보지만, 급한 건 아니니까 마음에 조금 여유공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오늘은 조립을 한 가구의 라운드를 살리는 샌딩 작업을 진행했다. 

평평한 면과 곡선이 경계가 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관건. 

이 '자연스러움'의 정도가 굉장히 주관적이기에 개인의 취향에 따라 샌딩 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천차만별이다. 


공방을 다니며 발견한 나의 소나무 같은 취향이 있는데 호두나무의 진한 색감과(돈 많이 드는 취향,,) 곡선의 부드러움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둘 다 호락호락한 선호는 아니다. 


우선 곡선을 잘 살리기 위해서는 흔히 잘 알고 있는 사포 작업을 여러 번 거쳐야 한다. 

기계로 층이 보이지 않게 다듬기 위해서는 무거운 기계로 손목을 꺾어가면서 라운드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깎아내야 한다. 


도마를 깎으며 라운딩 작업은 수행에 가깝다는 것을 배웠지만, 돌아서면 잊는 것이 인간의 미덕 아닌가.

역시나 이번 가구에도 곡선을 넣고 말았다. 


손목과 목이 뻐근하지만, 애증의 샌딩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단순한 작업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들을 할 수 있다는 점. 어떤 때는 내가 한 행동을 돌이켜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나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복기해보기도 한다. 무아의 경지에 빠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희미하게나마 답을 찾는 것 같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느낌이 들기도. 


라운딩을 끝내고 나서, 고운 입자로 한 번 더 표면을 갈아내어 손으로 만졌을 때 걸리는 곳 없이 다듬어 주었다. 이것이 끝인 줄 알았지만 모서리를 죽이는 작업이 남아 있었다. 

사용하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뾰족하게 재단된 목재의 모서리들을 자연스럽게 깎아내어 주는 일.

나의 마음도 다른 이에게 상처를 내지 않도록 다듬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모서리가 많아서 갈아내느라 전완근이 발달하는 느낌이었지만, 선생님께 엄지 척도 받고 무언가를 제대로 끝 마무리 지었다는 느낌이 들어 어깨가 절로 으쓱해졌다.


A tempo, 본디 빠르기로

조급해하지 말아요 우리,

그리고 나머지는 각인 작업. 

이 각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가구를 만드는 동안 지도해주시는 선생님이 많이 바뀌었는데, 그러다 보니 계속 바뀐 두께의 수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서 가장 중요한 윗판에 도미노 구멍을 관통해버린 것. 


정신 차리니 망했다 싶더라고,, 


목재도 가장 좋은 것을 쓰고 나무 결도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곳이라 속상하기도 하고, 이걸 어떻게 처리하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사고를 치지 않는 방법보다는 사고를 치고 수습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현명한 법.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기에 이 작은 실수를 만회할 방법으로 다른 목재를 채워 마치 의도한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체리나 오크 등의 나무를 넣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색이 더 진한 월넛을 넣어 각인을 하기로 결정했다. 


꼭 맞게 나무 조각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어떤 문구를 넣어야 좋을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브런치의 필명인 A tempo를 넣기로 했다. 


A tempo는'본디 빠르기로'라는 뜻의 음악 용어이다. (갑자기 분위기 필명 소개).

잠시 빠르게, 혹은 느리게 갈 수 있지만 결국 본디의 빠르기로 돌아가라는 의미. 


여행이나 교환학생 등으로 여러 삶을 만나고, 내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나의 속도로 살아야지'라고 다짐했던 것을 담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데, 한국은 특히 주변인과의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문화인 것 같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이 나이쯤 되면 취업을 하고 번듯한 직장은 있어야 하고, 이 즈음 되면 결혼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이 규격화된 인생의 트랙이 있달까? 의식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마음이 조급 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나마 나는 나의 속도로 살겠다고, 내가 원하는 속도로 가겠다고 늘 다짐한다. 

그게 누군가의 눈에는 답답한 거북이의 속도일지라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만들고 있는 가구도 마찬가지다. 

보통 가구를 보여주면 '얼마나 걸렸어요?'라는 질문을 많이 한다. 

6개월 넘게 걸렸는데, 매주 공방에 나왔더라면, 조금 더 부지런을 떨었더라면 반절은 줄일 수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중간중간 농땡이도 피우고, 여행도 가고, 술 마시고 못 나올 때도 있었다(아 이거 선생님이 보시면 안 되는데;). 그렇지만 또 매주 부지런히 나올 때도 있었고 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작업을 할 때도 있었다. 정말 나의 속도대로 만든 가구랄까.


그래서 이 가구를 보면, 조급해지지 말아야지. 그리고 내 속도로 좋아하는 일을 하며 가야지.

라고 꿈보다 해몽의 의미를 부여해본다. 


주문한 유리가 도착하지 않아 오늘은 전체 오일 작업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끈적한 오일을 바르고 다 닦아내는 것 역시 크게 재미있는 과정은 아니지만, 이 아이를 더 튼튼하고 건강하게 쓰기 위해서는 생략할 수 없는 작업이다. 


역시나 도를 닦는 마음으로 구석구석 오일을 바르고, 말리고, 닦아내 주었다. 

목재가 가진 무늬를 더 잘 살리는 느낌. 

월넛 특유의 깊은 색감을 더욱 빛내주는 느낌이라 좋다. 


성가시게 느껴지는 일도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돌아오는 길에는 서점에 들러 독서 모임을 위한 책 한 권과 궁금해 보이는 책을 한 권 사서 카페로 향했다. 

항상 이것저것 해야 할 것 같은 사람이라 여유를 온전히 즐기는 것이 어려워진 사람인데, 이 좋은 날씨에 집에 그냥 들어가는 것은 유죄라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테라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시원한 카페라테를 마시며 오늘 만진 나무의 촉감과 따뜻함을 기억하며 책을 읽고 돌아온 완벽한 일요일의 오후. 

뭘 봐 닝겐

그리고 언제나처럼 귀여운 마크 사진으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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