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ta Rosa
몇 년, 아니 몇 주전까지만 해도 존재조차 몰랐던 동네에서 눈을 떴다.
사람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거창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곳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가끔은 막막하기도 한 미래를 꿈꾸는 지금 내 모습을 자각할 때마다 놀랍기도 하다.
오랜만에 신생아처럼 잘 자고 일어난 아침이었다.
마음의 에너지가 캘리포니아의 햇빛인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어떤 작품이었는지, 혹은 스쳐 지나간 이들과의 대화였던 지 채워진 기분이다. 조금 덜 걱정하고, 조금 더 걷고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미 정오가 다 되었던 차에 장을 봐둔 과일들을 꺼냈다.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호화로운 시간과 식사가 아닌가 싶었다. 건조한 공기에서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햇살의 뜨거움, 달달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 여름을 듬뿍 담은 포도와 복숭아, 그리고 다음의 일정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로제와인까지.
햇볕에 앉아 앞뜰을 보며 멍을 때리다 보니, 이 순간이 너무도 행복하고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은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쓸 때 '사치스럽다'는 표현을 많이 쓰곤 한다. 타인에게는 부정적인 의미의 평가로 쓰이긴 하지만, 본인에게 쓸 때는 또 다른 의미로 사용이 될 수 있다.
정해지지 않은 오후의 일과가, 바삭한 공기와 뜨거운 햇살을 그저 바라만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치인지. 이런 작은 사치들이 모여 내 일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하루를 더 잘 살아내고 싶은 생각을 들게 한다. 늘 여행자의 삶을 살 수는 없기에, 이런 작은 사치들을 의식적으로 스스로에게 더 누릴 수 있도록 해주어야지.
미국에서 정말 많은 꽃과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동부에서는 잔디밭과 공원, 강을 근처에 두고 있는 푸르름을 볼 수 있었다면 서부에서는 꽃나무와 이름 모를 이들이 사는 곳의 정원의 꽃들, 사람 키의 몇 십배는 되어 보일 듯한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뚜벅이의 삶을 살게 된 나는, 미국에 온 이후로 참 많이 걷기 시작했다.
보통 때에 3,000보 정도를 걸었다면 여기서는 10,000보를 걷지 않으면 무언가 석연치 않은 하루를 보낸 느낌이다. 물론 운전을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여 국제 면허증을 두고 왔다는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도시와 동네를 걸으며 평소에는 잘 보지 않던 것들을 더 눈여겨보게 되었다.
피어 있는 꽃이라던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예전에는 나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까지도, 이제는 내가 그 순간에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해야 할까.
이름 모를 꽃이 틔워낸 붉음을 한참이나 보며, 더 없는 생명의 에너지를 느끼기도 했다. 참 사치스럽고 행복한 시간이다.
그리고 오후의 빛이 비치는 곳에서 반신욕을 했다. 목욕탕이든 혹은 집에서 욕조에서 반신욕을 하든 자연광을 맞으며 반신욕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곳에서는 따뜻한 빛이 온 욕실에 닿는다. 그저 이 시간, 이렇게 자유롭고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 지 깨닫는다.
예전처럼 몇 분은 있어야지, 이런 마음 없이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고 나오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고민 없이 나왔다. 떠나기 전, 그리고 중간중간 심해졌던 아토피가 많이 나아 있음을 발견했다. 몸도 마음처럼 면역체계가 생긴 걸까. 앞으로도 내 면역체계를 위해서 하루의 작은 사치를 빼놓지 않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