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형아, 엄마는 청소를 열심히 할 테니 넌 공부 열심히 하렴” 대학교 도서관에서 파견근로자로 청소를 하셨던 엄마와 그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던 내가 마주치면 엄마가 나에게 하던 말씀이다.
엄마는 몸져눕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한평생 일만 하셨다.
시집오기 전까지는 친정부모님과 시집온 이후에는 시부모님과 농사를 지으셨고, 시부모님, 친정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고랭지 채소밭에 일용인부로, 지역의 대학교 두 곳에 청소 파견근로자로 정년까지 일하셨다. 청소근로자로 정년을 하시고 나서 다시 농사를 지으셨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다. 이순신 장군 그리고 나의 엄마.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책은 거의 다 읽어 보았고, 23전 전승지역을 다 가 보았기에 10시간 강의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엄마에 대한 강의는 하루 종일 할 수 있다.
이순신장군과 우리 엄마를 존경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간절하게 사셨고, 순리대로 사셨다.
이순신 장군은 단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조선은 멸망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기는 싸움만 했다(制勝). 정말 간절하게 싸웠다. 선조의 불신으로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을 감내하고 결국 조일전쟁(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신다. 간절하셨고 하늘의 뜻대로 사셨다.
나의 엄마도 그러셨다. “남형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돈이다. 돈,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라. 아끼면 부자가 될 수 있다. 욕심내지 말고 일 한 만큼만 받아야 한다.”
엄마가 이 말씀을 하시면 나는 “엄마, 또 또 또 그 개똥철학!” 하며 엄마랑 같이 웃는다.
엄마의 돈에 대한 그 간절함을 나는 안다. 엄마는 인간의 삶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돈이라고 이야기하셨다.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시다 28살에 결혼을 하셨고, 36살에 하위직으로 공직에 입문하셨다. 집안형편은 늘 쪼들렸다. 아버지의 검소함과 엄마의 억척스러움으로 우리 5남매를 키우셨다.
엄마가 대관령 고랭지 배추밭에 일용인부로 일하실 때는 늘 새벽 5시에 나가셨다. 지금도 고랭지 밭에서 일을 마치고 봉고차에서 내리던 엄마를 기억한다. 내가 “엄마, 힘들지 않아요?”라고 물으면. “남형아, 돈 버는데 쉬운 일이 있니? 그래도 불러 주니 고맙구나.” 하신다. 나는 엄마가 새벽 5시에 나가 저녁 6시에 들어오는 그 일을 하시며 일당으로 얼마를 받는지 알고 있었다.
엄마가 대학교에서 청소 파견근로자로 일하시면서 얼마를 받는지도 알고 있었다. 500평인 외가 밭에서 농사를 일구실 때 1년에 얼마를 버시는지 나에게 이야기해 주신 적이 있다.
“남형아,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나를 써주니 얼마나 고맙니, 일을 해 돈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니, 엄마는 그저 감사하단다.”
엄마의 그 간절함으로 전셋집을 전전하던 우리 가족은 1991년에 지금 부모님이 살고 계신 예쁜 단독주택을 구입하였다. 지금도 행복해하며 이사하던 날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 봉급에 네 엄마가 노력하지 않았으면 이런 집을 어떻게 구입했겠니, 네 엄마는 정말 대단하고 훌륭하다.”
엄마는 돈에 대해 정말 간절하셨다. 지금 몸의 에너지 총량을 다 쓰시고 누워계신 것도 결국 돈 때문이다. 온몸을 다해 일하셨고, 돈을 버셨다. 정말 검소하셨다. 아니, 가난하셨으니 검소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가장 잘하시는 것이 아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절대 욕심내지 않으셨다. 내가 일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세상의 순리대로 사셨다. 인분지족(安分知足)의 현인(賢人)이셨다.
엄마의 자서전을 쓰면서 내가 가슴 아팠던 것은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도 있지만 그것 보다 엄마 삶의 철학을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않았던 나를 보고 후회했다.
자서전을 쓸 때 엄마가 나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아들아, 세상에서 돈 버는 일이 가장 힘들더구나. 그런데, 열심히 하니 살아지더구나. 욕심내지 말고 남 탓하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열심히 하려무나. 그러면 후회하지는 않는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간절하게 살았고 순리대로 살았던 엄마는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