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시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 경주
숙소와 기차만 예약하고 내려온 경주는 둘째 날 역시 발이 가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야경 투어 하며 들었던 분황사는 처음이라 뚜벅이로 갈 수 있는지만 확인 후 바로 출발.
경주역에서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위치 해 있으면서도, 걷기 좋고 가을을 느낄 수 있어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안정과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경주하면 불국사가 제일 먼저 떠오르고 만큼 사람이 찾고, 또 큰 절이다 보니 볼 것도 많지만 분황사는 작은 절이라 사실 크게 무언가를 둘러볼 곳은 없었다. 하지만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절이라고도 하고, 또 아기자기하고 특유의 느낌이 남아있는 곳이기에 꼭 한 번은 들러봤으면 좋겠다.
분황사 마당에는 모전석탑이 있는데, 사진에는 제대로 담을 수가 없어 아쉬웠다.
분황사 앞에는 황룡사지 청보리밭으로 유명하단 곳이 바로였으나, 아쉽게 계절이 맞지 않아 그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그 넓은 황룡사지 터를 보며 여유 있게 걸었다. 걷다 보면 있는 황룡사 역사문화관에서 이 터를 보면 정말 광활하고 가슴이 트이는 기분이니, 꼭 느껴보면 좋겠다.
사실 이 근처가 황룡사지 인지도 모르고 왔던 터라 더 즐거웠던 산책 길은 역사문화관에 와서는 와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볼거리가 많다거나 화려한 건 아니지만, 황룡사 9층 목탑의 재현된 모습도 볼 수 있고 신라가 계획된 도시로 지어졌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 수 있었으니 수확 많은 산책길이지.
황룡사 역사문화관에 나와서는 월정교의 낮과 계림을 보고 싶어 무작정 또 걸었다. 걷다 보면 우측으로 동궁과 월지가 있고 좀 더 걸으면 첨성대가 보인다.
거기서 좀 더 들어가면 계림과 교촌마을이 있다.
가는 길 마주친 경주의 가을. 마침 기차도 지나가는 걸 볼 수 있어 더 설렜던 길.
멈추고 싶을 때 멈춰 주변을 보고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것 역시 가을의 쓸쓸함보다는 수확의 기쁨에 더 가까운 일이었다.
이 길이 봄에는 벚꽃길로 변한다니 봄을 보러 와도 좋을 거 같았다. 보문단지도 유명하다지만, 나는 그래도 역시 경주스러운 경주는 이 길이 아닐까 싶었다.
다음에 다시 온다면 그때는 지금의 경주도 느껴보고 싶지만 그래도 역시 난 이 길을 택하지 않을까 싶다.
걷는 걸 좋아하지 않다면, 가까운 거리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걸어 다녀보길 추천한다. 일상에선 늘 무거웠던 머리가 맑고 개운함을 느끼며 순간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건 흔치 않으니.
교촌마을의 고즈넉함을 느끼며 걷다 보면 월정교를 볼 수 있다. 밤의 화려함은 없지만 낮에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 또 다르다. 앉아 쉴 수 있는 곳도 있으니 가만 물이 흐르는 걸 보며 쉬어도 좋다.
돌다리를 지나 이번엔 경주 오릉을 가보기로 했다. 걷기에는 꽤 멀긴 했지만 날도 좋고 시간은 있고 걷지 않을 이유도 없어 기분 좋게 출발했다.
남천을 따라 그저 쭉 걷다 보면 산책길이 너무 예쁘게 되어 있어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었다.
봄에 오면 더 다양한 꽃들이 반겨줬을 거 같았다.
가만히 걷다 보면 잠시 쉬어가시는 동네 분들도 볼 수 있었다. 나도 잠시 쉬어갔다.
반복되고 정신없는 시간 속에서 잠시 쉰다고 해야 할 일을 어물쩍 미루고 쉬지도 달릴 에너지도 없어 아무것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나에게서 눈을 감고 정말 오롯하게 현재에 집중했던 시간.
경주의 황리단길이나 보문단지, 불국사처럼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보다 조용하고 여유로운 곳을 둘러보고 싶다면 이 길을 걸어 경주 오릉에 방문해보는 것도 좋다.
그렇게 도착한 경주 오릉을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다 보니 간간히 사람이 보이긴 했지만 조용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짧지만 대나무길도 걸어보고 신라 시대 시조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의 흔적도 한 번 볼 수 있다.
신라 시대의 초기 왕들의 무덤이라는 이곳에서 뜻밖의 재미도 있었다. 노루 2마리가 뛰어가는 모습이었는데 생각도 못한 소소한 추억은 아마 또 잊지 못할 경주의 즐거움으로 남았다.
경주 오릉을 천천히 둘러보고, 다른 곳을 또 가볼까 했으나 어딘가를 더 걸어 다녀오기는 힘들 것도 같고, 길 가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다면 쉬어가기로 하며 다시금 황리단길 방향으로 향했다.
길을 가다 고분과 함께 앉을 수 있는 벤치가 있으면 앉았다 가기도 하며 걷는 시간은 힘들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야외 석이 있는 카페에 가만히 앉아 햇살을 즐기며 찍었던 사진도 보고 멍도 때리다 보니 답답했던 문제도 단순하게 느껴졌다. 결국 내 욕심이었으니, 하던가 잠시 보류하던가, 혹은 놓아주던가.
그리고 결국 나는 어떻게든 할 거란 걸 알고 있으니. 뭐가 두려운 걸까.
암튼, 경주의 2일 차도 이렇게 지났다. 정적이지만 충만했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