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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아 Jul 27. 2022

한 여름의 열이 식은 후

서른에게 12

오랜만에 글을 남긴다. 냉방병인지 그제 저녁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던 것이 어제 심해져서 일터에서 조퇴를 하고 집으로 와 내리 잠을 잤다. 아직까지는 조금 아프면 '설마 코로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 시기이기 때문에, 드디어 내 차례인가.. 시기가 너무 좋지 않군.. 하며 자가검사 키트를 사려고 집 주변 편의점을 돌았는데, 가는 날 장날 법칙으로 결국 구하질 못하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와 포장해온 서브웨이를 먹고, 백신 맞을 때 혹시 몰라 처방받았던 병원용 타이레놀을 먹고 잠들었어. 그렇게 열네 시간쯤 자고 일어났다. 너무 오래 잔 터라 머리가 무거워서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지만, 그래도 어제보다는 한결 나은 컨디션이야. 열도 내렸고 온몸이 쑤시던 감각도 그쳤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출근 전에 키트를 사다가 검사를 해봤다. (전염병이 도진 지도 한참인데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도 나름 복된 일이야, 그치?) 결과는 다행히 음성. 눈으로 확인을 하고 나서야 안도가 되는 일들이 있는데, 코로나 검사도 이 중 하나구나 싶었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닥치는 일들은 사건을 넘어 사고잖아. 언제나 막역한 두려움을 몰고 와. 그때마다 늘 내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많지가 않으니까. 도망치거나, 속수무책 당하거나, 초연히 받아들이거나. 사고가 닥쳤을 때 덜 무너지려면 결국 평소에 내 의지만으로 이룰 수 있는 작은 성취들로 삶을 뽀득뽀득 닦아두어야 해. 깨끗이 정돈된 삶에 사고가 닥치면 아, 이 얼룩은 사고 때문이구나. 내 잘못이 아니구나, 하며 시간이 걸려도 훌훌 닦아낼 수가 있는데 이미 언제 졌는지도 모르는 먼지와 얼룩이 사이사이 점철된 삶에는 사고가 닥치는 순간 감당하고 싶지 않아지니까. 요즘 나에게 있어 분명한 성취는 단연 운동이니까, 귀찮은 마음을 이끌고 10분 15분이라도 하려고 한다. PT가 끝나면 수영을 배워볼까 싶어. 땀을 흘려도 물 속이라면 조금 더 쾌적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탐이 나네. 유산소 운동량을 늘리는 게 필요하기도 하고.


내일은 난생처음으로 회사 면접에 가기로 했어. 프리랜서의 삶을 내려놓고 한 번쯤은 직장인으로 살아볼까 싶은 마음이 들 때에 가까운 언니의 권유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서 회사에 넣었거든. 모델을 위해 파트타임만을 고집하는 생이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의 업무 능력을 조금 가시화해보고 싶다는 욕망도 생겼어. 나 혼자 하는 프로젝트 투성이 속에 살다 보니 이게 취미인지 업무인지 분간이 가지를 않고, 내 의지 말고는 나를 잡아줄 수 있는 것이 없었거든. 무언가 분명한 목표를 가진 집단 안에 있으면서 그들의 마인드셋을 익히고 싶다는 마음과 조금 더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욕구가 커졌달까. 지금까지 해오던 촬영이나 유튜브는 지금처럼은 아니더라도 내가 원한다면 짬을 내서 계속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배우고 싶은 것에 조금 더 마음 편히 지원을 할 수 있는 삶에 나를 데려다주고 싶어. 직장인이 되면 시간은 사라져도 돈이 생기니까, 내 성미에 조금 더 부지런히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 뭐 해 봐야 아는 거겠지만.


회사에 가게 되면 지금 하는 파트타임은 급작스레 관두게 되겠지만, 진작 들어왔어야 할 월급도 늦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죄책감은 덜 들어. 애초에 파트타임 이상의 역할을 맡고 싶지 않았던 곳이라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면 빠르게 움직이는 게 맞다는 생각도 들고. 출근 전에 몸을 좀 깨워두려고 카페에 들러서 내일 인터뷰 준비도 하고, 뉴스레터도 읽고, 사람들 블로그도 구경하고 하다가 한 문장이 마음에 훅 다가왔어.

출처: 네이버 블로그 '나린'
'내가 그나마 견딜 수 있는 종류의 괴로움을 전부 합치고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류의 행복을 전부 합쳐서 잘 버무려보면 그게 삶이 되는 게 아닐까.'


어차피 생이 괴로움과 즐거움이 합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그 안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잘 골라 들쳐 매고 가는 게 가장 평화로운 삶이겠지. 나는 운이 좋게도 내가 원하는 게 무언지 잘 알고 지내온 것 같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귀찮은 일을 견디고, 좋아하는 순간을 욕심내 곁에 두면서 나를 지켜온 걸지도 몰라. 


오전까지는 얼굴이 조금 뜨거웠는데 그새 열이 많이 내렸다. 얼른 내일 두 시가 되었으면 좋겠어. 기대되면서도 긴장되는 일은 얼른 겪어버리고 싶잖아. 번지점프를 뛰기 전 마음 같아. 한 번도 뛰어보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야. 내일의 일도 그런 셈이네. 즐겁게 잘 얘기 나누고 올 수 있게 응원해주라. 나 집에 직장인 같은 옷 하나도 없는데 어떡하지? 퇴근하고 최대한 깔끔한 걸로 골라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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