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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영 Apr 14. 2021

<場글 Book>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그림책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권정민 글그림>

누군가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호러? 스토킹인가?

관심? 나 좋아하나?

설마,

도를  아십니까?


별별 생각이 다 들겠지.


살면서 서너 번 점을 본 적이 있다.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을 고민했 때,

아이들 진로 문제 걱정스러웠을  때,

일과 사람들  관계 속에서 상처 받고 힘때,


생전 처음 본 사람 앞에 이름과 생년월일 밀고,  복채 오만 원에 나에 대한  현재와 미래를 시원히 풀어주길 기대했다.


불안하고 불투명한 미래,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얼마나 버텨야 힘든 일이 끝나는지,

자꾸 날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 이 관계를  계속해야 하는지,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건지,

깜깜이 투성이인 삶에서 그들이 해주는 말에 잠시 귀 솔깃해기도 했다.


이켜보니 점괘가 잘 맞았던 것 같지 않다. 고민거리였던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 점괘가 맞았는지 틀렸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를 조금 알아봐 주고 그 덕분에 나에 대해 조금 안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약간 후련한 기분이 들었달까.

물론  후에 더 깊이 밀려오는 공허감에 이젠 찾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일시적으로 조함, 답답함은  해소할 수 있었지만  그런 걸로 날 안다고 할 수 없는 거니까. 그 벌어진  틈이 공허해지는 건 당연했다.


 그 사람에 대해  알려면 사계절을 두 번은  겪어봐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소개팅이나 선을 보러 나가서  맘에 안 든다고 해도 으레 어른들은  "사람 한번 봐서 어떻게 아니? 못해도 두세 번은 만나 봐야 어떤 사람인지 알지."라며 만남을 지속해 보라고 권했다.

서로에 대해 좀 알려면 지속적이고 꼼꼼히 봐야 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안다는 것, 서로를 알아봐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자주 느끼게 된다.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제법, 좀, 꽤 알기 위해서 나름의 방법을 터득해야 하기에  쉽지 않다.

그래서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쉽게 안다고 할 수 없게 되나 보다.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를 쓰신 권정민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인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란 제목에 꽂혀 점 봤던 얘기까지 버렸다.

  작가 첫 작품에선 멧돼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더니, 두 번째 작품 식물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고 있다.  

그림책 <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알로카시아 푸른 잎 가득 드리우고 있는 표지를 한 장 넘기면, 블라인드 뒤로 은은히 번지는 햇살, 그 사이로 비치는 화초의 실루엣이 나른하고 아늑하게 그려 따뜻해 보인다. 어른어른 햇살 사이에서 화초들 말한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관찰해 왔습니다.
쉽지만은 않았죠.

아늑하고 나른하고 편안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나 보다. 쉽지만은 않았던 그 일들을 겪어오면서 이제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식물의 수줍은 고백! 그리고 부탁한다는 인사의 말!

덕분에 당분간은 걱정 없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을 읽다말고 안을 휘익 둘러보았다. 베란다와 현관 옆에 먼지 쌓인 조화가 몇 개 보일뿐  살아있는 식물이라곤 하나도 없.

그래도 한 때 식물 키우기에 관심 있던 적 있다. 그때 처음 내돈 내산 했던 식물이 우연찮게도 이 책 표지에 나와 있는 알로카시아라는 식물이었다. 굳건한 줄기에서 쭉 뻗어 나온 널찍한 잎이 무척 이국적 식물을 우연히 아파트 장터에서 발견하고 한눈에 반 버다. 그래서  물을 키워본  경험 없으면서 겁 없이 반려 식물 맞아 들였다.

초록 초록한 식물을 들이고 보니 집이 어쩐지 전과는 달라 보였다.

식물 하나로 느껴지는 여유로운 기분!

아침마다 줄기 끝에 매달려 있는 물방울이 신기해 한참을 바라보기도 하고, 오후 나른한 빛을 머금은 실루엣을 지켜보는 것도 좋았다.

 물도 주고, 볕 잘 드는 곳으로 옮겨 놓기도 하면서 한동안 나름 정성을 쏟았다.

 그런데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도 모른 채 잎 끝이 누렇게 변해가기 시작하더니, 설상가상 잎과 줄기 진딧물까지 다닥다닥 뒤덮였다. 하루에 몇 번씩 화초를 들여다보며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이 난다. 약을 사다 뿌리고, 영양제도 꽂아주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화초는 점점  볼품없어다. 속상하고 화는 마음에  화초 판 아주머니지 원망했다

이런저런 방법을 써봐도 좋아질 기미 안보였다.  서서히  알로카시아, 내 첫 식물은  관심 밖으로 밀려 버렸. 물 주는 것도 수시로 깜빡깜빡했다. 며칠 동안 흙이 바짝 말라 있기도 했고,  어떤 때는 물을 너무 많이 줘 흙물이 넘쳐 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생명인데 싶어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게 다였다.

  나의 불규칙적인 호의에 알로카시아는 결국 나무줄기가 물러지더니 오래가지 않아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속은 상지만 뻔한 결과, 예상했던 일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무심히 나무채를 뽑아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렸다.


  한 동안 덩그러니 비어있는 화분을 볼 때마다  간간이 떠난 알로카시아 다.   화분 거슬리고 보기 싫어질 즘, 또 다른 식물 대체할 결심 섰다. 이번엔 좀 더 키우기 쉽다는 식물로 고르고 골랐다. 이름표도 써 붙이고 키우는 방법도 꼼꼼히 챙겨 들었다. 두 번의 실패는 없다는 각오로 잘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잠깐의 기쁨만 준 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후로 몇 번의 시도를 더 했었지 과 없이 연쇄식물살인범이란 오명만 남긴채 나의 식물 키우기 도전은 끝나 버렸다. 식물 키우는 것도 남다른 재주가 필요한 모양이라고 스스로를 위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

'당분간 걱정 없겠다던 말'을 하고 나에게 왔던 식물들에게 지금이라도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해야 할까 보다.

정말 너무 당분간이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


이제 당신의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이 어디든 아주 가까이에서 당신을 지켜볼 수 있을 겁니다.

 호들갑스럽게 맞이하고 쓸쓸히 퇴장시켜버린 나의 식물들처럼, 내가 이러거나 저러거나 한결 같이 어느 사이 내 세상 속으로 들어와 머물렀었던 많은 사람이, 모든 관계가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오른다.

첫 만남의 설렘, 호기심, 떨림!

그때는 모두 다 좋았고, 함께 할 수 있어서 기뻤었.

당신의 취향을 존중하니까요.
...
당신의 끝도 없는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죠.
...
날마다 기분을 바꾸고 싶어 하는 당신을 위해
...
기꺼이 도와드리죠.

 삶 속 곳곳에서 싱그러운 공기를 뿜어내며 나 자신이 아닌 그들을 먼저 존중하고, 이야기를 들어주,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었다. 그들이 좋다면 나도 좋았다.그때는 그러는 것이 내게도 행복이었으니까. 


그런데 세월 탓일까?

아니면 서로의 삶이 고단한 탓일까?

그도 아니면,

 익숙한 것에 대한 무관심?

어쩌면 모두 다 일수도 있겠다.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이 있었다. 같이 있으면 즐거웠던.

처음엔 자기 얘기를 서슴없이 털어놓는 그 사람과의 시간이 마냥 즐겁고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만나고 오면 왜 그렇게  피곤하고 기가 쏙 빨 기분이 드는지. 내쳐 자기 만 하는 그 사람  얘기를 듣고 있자니 점점 힘들어졌다. 그래서 반쯤 귀를 닫거나  혼자 삐딱하게 속엣말을 하곤 했다.

'또 지 자랑이네. 아, 정말  듣기 싫.'

'너만 힘드냐? 다 그만큼은 힘들고, 그만큼 다들 아파. 그만 좀 징징대.

  기꺼이 박수쳐주고, 같이 아파하고 속상해하던 마음은 저 멀리 사라져 버리고, 어느새 그 사람 전화가 오면 두세 번에 한 번은 바쁘다는 핑계로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젠 서로를 지켜보지도, 돌보지 않는 사이가 버렸다.

   아마 그때는 내 얘기가 더 중요하고, 내 아픔이 더 쓰라리고, 내가 최고로 힘들다 느꼈었것 같다.

그래서 시들시들 말라가고,

진딧물이 번지고,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체할 수 있었던 그때처럼.

죽어가는 식물 때문에 속상한 나만 보이고,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식물의 작은 숨소리는 듣지 못했던 아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때처럼.

관심과 사랑과 여유 따윈 없었던 모양이다.


겹쳐있는 몇 개의 커피 잔과 환하게 켜져 있는 모니터, 그 뒤에 시들시들 말라가는 화초들, 그리고 책상 위에 지쳐 쓰러져 있는 한 여자.

당신은 가끔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우리를 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엄마네 갔다가 로즈마리 화분이 탐스럽길래

"와, 향 너무 좋다. 엄마 이거 나 가져간다."

가져가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가져간다는 통보를 하고 들고 나서다 다시 화분을 내려놓았다.

안가져 갈거냐는 엄마의 물음에,

"생각해보니 바빠서 안되겠어. 내 새끼랑 내 몸뚱이 하나 돌보는 것도 힘든데 무슨 화초를 키우겠어. "

그간 나에게로 와서 죽어간 화초들의 명복을 빌며 로즈마리의 안녕을 빌어주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엄마는 우리 집에서 죽어나간 화초들도, 길에 버려진, 분명 빈 화분처럼 보이는 것에서도 새싹을 틔우시는 분이니까, 지금 로즈마리의 자리는 엄마 곁이 맞다.


나도 언젠가 그 여린 생명들의 작은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의 사랑과 여유와 관심이 충만한 때가 오려나.

그때는 냉큼 엄마네 로즈마리를 들고 올 작정이다.

오래 걸리진 않았으면 좋겠다. 꼭 그랬음 좋겠다.

그때는 오래오래 시간과 정성을 들여 꼼꼼히 지켜봐 줘야지.

그리고 서로 인사도 나눌 것이다.

덕분에 당분간은 아니 오래도록 걱정 없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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