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지난 주말,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이하 에에올)'를 2번째 보게 되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감독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출연양자경, 스테파니 수, 키 호이 콴, 제이미 리 커티스개봉2022. 10. 12.
처음 봤을 때부터 리뷰를 작성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봤을 때는 사실 꺼림찍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많았고
좋은 영화인 건 맞고 인생영화였지만 막 너무 감동스러웠다고 말하고 다니기 좀 어려운 기분을 느꼈다.
그 이유는 간단했는데,
이 영화의 주제는 단순히 '가족애' 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딸의 세대와 부모 세대의 단절에서 나오는 갈등을 다룬 이야기는 정말 많다.
그리고 결국 화해하는 건 당연한 결말이다.
나는 좋아하는 영화를 정할 때 내 인생에 조금이나마 변환점을 줄 수 있는 영화를 우선에 두는데
이 영화의 과정은 너무나도 재치있고 아름답지만 결론이 예상 가능한 범주라는 점에서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와닿지는 않았던 것이다.
왜냐면 가족애는 나한테 당연히 소중하지만 그렇게 특별한 감정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지만 뭔가 이 찝찝한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영화가 극장에서 내리기 전에 한 번 더 영화를 찾게 됨으로써 의문점이 비로소 해소되었다.
아래는 영화에 대한 평가는 아니지만 내 생각과 가치관을 영화와 엮은 이야기들이다.
영화가 강조하는 메세지는 무엇이었을까?
처음엔 가족애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확장하면 인류애정도였을까?
그런데 두번째로 영화를 보았을 때 눈에 들어왔던 것 중 하나는 '에블린이 경험한 모든 세계가 행복한 세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 인생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면 겨우겨우 여러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겨우겨우인 이유는 할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에블린이 겪었던 세계는 모두 에블린이지만 다 같은 에블린이 아니다.
수많은 선택들이 수많은 주제를 가진 인생을 낳았다.
가족애라는 단어만으로 현재의 에블린을 설명하는 건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조금 더 두루뭉술한 단어로 얘기하자면 이 영화는 '소통'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주차장 장면에서 모녀가 끌어안는 장면에서 그녀들은 기어코 두 개의 세계가 충돌하는 것을 겪는다.
조이의 말처럼 '우리는 함께 있으면 다쳐',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기꺼이 그것을 감수하고자 한다.
마치 예전 떠돌아다니던 4컷만화처럼 고슴도치가 서로 가까이 있기 위해 조금씩 천천히 다가가는 것처럼.
조이가 조부 투파키일 때, 베이글을 보여주면서 '사실 적어도 혼자 파괴되진 않고 싶었다' 고 말한다.
악역의 광기 어린 말처럼 스쳐지나갔지만 사실 조부 투파키는 자기가 본 모든 것들을 보고 같은 것을 느껴줄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만난 에블린들을 살해해왔지만 그 이유는 자신이 느낀 허무를 그 중 한 에블린만은 공감해주리라고 믿고 바랐던 것이다.
조이가 잠시 조이일 때, 에블린은 '지금까지 너 잘못이 아니었어. 너가 이렇게 반항해온 건 다 그 이상한 여자때문이었어!' 라고 말한다.
조이는 드디어 나를 나 자신으로서 바라봐주는 엄마에게 감동을 느끼려하다가 자신의 문제를 또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는 엄마에게 실망하며 정색한다.
에블린은 지금껏 가정에서 있는 모든 일을 자신의 관할 하에 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어머니였다.
심지어 페인트칠마저도, 옷을 두는 위치마저도, 딸 아이에 대한 모든 것들도.
그녀의 딸 조이는 지금껏 '어떻게 하고 싶니?' 라는 말을 들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조이가 생각하는 중요한 것들은 모두 에블린에게는 당장의 우선순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조금만 더 서로 친절하자구요!' 라고 외치는 남편 웨이먼드.
그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에블린은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다만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해보려 한다.
에블린은 딸 조이를 구하기 위해 조부 투파키가 모든 걸 겪고서 강해져 조부 투파키를 무찔러 이기겠다고 선언했었다.
계속해서 '덤벼!' '나와 싸우고 싶지 않은거야?' 라고 얘기하면서 말이다.
한편 에블린은 쿵푸의 세계에서 만난 웨이먼드에게 '나에게도 나의 사는 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지금까지 자신의 말이 맞다고만 생각해왔던 아집 가득한 에블린이 드디어 타인에게서 무언가를 수용하고 체화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윽고 지금까지 외면해왔던 모든 사람들의 말,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후회들을 해결해주는 힘을 발휘하며 딸 조이를 구하기 위한 걸음을 내딛는다.
죽은 아내가 그리워 같은 향수 얘기를 꺼냈던 아저씨의 말, 라따구리와 함께 요리했던 요리사,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졌던 녀석 등을 지금까지 만났을 땐
'아 저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라고 생각하며 듣는체 해왔었지만,
웨이먼드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인 에블린은 이제서야 '당신은 사랑받을만한 사람이에요.' 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우린 이름 모를 저 별에서
조부 투파키와의 싸움이자 베이글로 걸어들어가는 조이를 구하는 몇 걸음의 과정 속에 싸우는 인물들이 이 영화 내에서 한 번씩은 등장했던 사람이란 걸 느꼈을지 모르겠다.
라따구리 세계의 동료 요리사, 쿵푸 스승님, 경비원 등이 그 인물들이다. 에블린의 세상에서 엑스트라같았던 존재들.
그리고 세무청의 골치거리같았던 여자는 손가락이 핫도그인 세상에선 사랑하는 연인이었다.
우리는 저 먼 세상에선 모두 친구이자 부모이자 자식이자 동료이자 연인이다.
결국 모든 사람이 서로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너가 되어줄 수 있는 인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세계에선 에블린을 죽이려 하는 존재이기도 하며 막는 존재이기도 하다.
쿵푸의 세계에서 에블린은 성공가도만을 걸어가던 유명 배우이다. 현재의 에블린이 가장 부러워하는 존재인 화려함 속에 사는 나이다.
그래서 에블린은 웨이먼드가 없는 세상이 '정답'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베이글을 들여다본 이후로는 '당신을 만난 선택의 세상 속은 정말 초라하다'고 화도 낸다.
하지만 웨이먼드는 다만 선택할 수 있다면 지금의 이런 화려한 인생보다는 '세탁소도 운영하고 세금도 내는 너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하겠다' 라고 말한다.
진심이 아니면 그렇게 함부로 얘기하지 말라고 말하며.
우리가 살면서 하는 선택에는 하루하루 메뉴를 고르고 어떤 여행지를 갈지 선택하고 진로 고민을 하며 어떤 영화를 볼지를 고르는 것뿐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하는 관계성이 항상 포함된다.
'차라리 너가 없었다면' 이라고 에블린-조이, 에블린-웨이먼드의 관계 속에서 후회가 거론되지만 사실 지금 우리가 닿을 수 있는 이 곳도 '너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후회를 하지 말자는 건 아니다. 에블린은 어쩌면 웨이먼드를 만나지 않았던 인생이 더 좋은 인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인생이 좋은 인생이었는지 판단할 기준은 항상 에블린에게 있다. 에블린은 웨이먼드와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나쁘지 않으니까, 아니 좋은 점이 훨씬 많았던 걸 기억해냈기 때문에.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최근에 읽은 책 '과거가 남긴 우울 미래가 보낸 불안' 에서 우울과 무기력에 대한 개념을 읽었는데
우울은 과거에 사는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사실 멀티버스들의 에블린이 에블린이 도달하지 못한 미래같이 느껴지지만
그 기반에는 '과거'의 후회스러운 선택들이 있다.
에블린은 후회하는 게 많은 현재의 자신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다.
조부 투파키는 모든 걸 다 경험해본 사람이다. 자신이 원하는 선택부터 원하지 않는 선택에서 닿을 수 있었던 모든 세계를 다 가본 존재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극히 허무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속이 텅 빈 베이글처럼.
그녀의 시시각각 변하는 우스꽝스럽고 화려한 옷차림은 정말 심심할 틈이 없어보이지만 그녀의 마음은 텅 비어있다.
차라리 돌이 되어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게 그녀에게 가장 의미있게 다가올 정도로.
아마 이 차이는 영화 내내 나오는 속이 찬 눈알과 속이 빈 베이글의 차이와 같을지도 모른다.
필자인 나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는데 바로 '소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전형적인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루지 못한 것도 많다.
거기에서 나오는 우울함도 당연히 많이 겪는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한 큰 선택일수록 더 큰 후회는 피할 수 없다.
다만 내가 소원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그 때에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후회스러운 것도 없다. 단지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세상에 발을 딛고 있다는 사실만 느껴지는 것이다.
조부 투파키와 조이의 공통점이 있다.
에블린에게서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해' 라고 강요받은 점이다.
알파버스의 조이는 잠재력이 뛰어난 아이였지만 에블린에게서 지나칠 정도의 훈련을 강요받고
현재의 조이는 에블린에게서 에블린 세대의 가치관과 엄마로서의 입장을 강요한다.
주차장에서 조이는 묻는다.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데 왜?'
에블린은 '그런 건 다 부질 없어.' 라고 대답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현재의 에블린은 뭐든지 못하기 때문에 뭐든지 잘할 수 있는 가능성 넘치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인물이 아니었나?
왜 '무엇이 되는 것'이 부질없다는 부정적인 말로 끝나는 것이지?
그런데 부질없다는 게 부정적인 의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먼 우주에서 먼지같은 우리에게 허무함을 느꼈던 조이지만, 이 작은 행동행동들이 다 부질없고 보잘 것 없기 때문에 허무함을 느꼈던 조이지만,
어쩌면 '부질 없어' 라는 말은 '지금의 너가 좋아.' 라는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까지 내 딸이 이렇게 행동했으면, 저렇게 행동했으면 이라고 바라왔던 에블린이 드디어 조이에게 아무런 소원도 가지지 않게 된 것이다.
한 때 '감사'가 유행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덕분인지 지금도 감사일기를 쓰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고 우울감을 해소하는 데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감사는 가끔 만족을 뜻하기도 한다.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이 그저 더 바랄 게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드디어 후회가 아니라 감사를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또 어떤 후회를 만나더라도 같이 겪어나갈 사람들이 있음에.
어떤 노래처럼 지금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그런 감사.
수많은 소음 속을 드디어 뚫고
에에올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 중에선 '소음'도 있다. 소음은 때론 '그러지말걸..' 이라는 후회의 목소리이기도 하고 '한대 쳐버려!' 라는 유혹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조이는 그 모든 소음들을 다 겪고서 조부 투파키가 되었으며 소음을 극복하기보단 실뭉치 속에 갇혀버렸다.
초반 디어드리에게 한대 쳐버리는 장면에서 에블린은 살짝 웃어버린다.
사실은 아버지를 떠나 시집을 갈 때 펑펑 울었으면서 시원하게 웃었다고 기억을 왜곡해버린다.
그러나 후반 아버지에게 '딸이 없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렇게 날 어떻게 보낼 수 있었냐.' 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다들 웃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한다며 세탁소 유리를 박살내버린다.
에블린은 지금까지 겪은 많은 소음들을 이제는 더 견디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문제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웨이먼드는 여행을 가자는 둥 헛소리를 하고 딸인 조이는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얘기 좀 하자고 말한다.
그렇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걸.
세무청에 압류를 당하지 않기 위해 겨우 찾아갔지만 딸 조이를 데려오지 않아 직원인 디어드리와는 소통이 되지 않는다.
에블린은 반신반의하며 알파버스의 웨이먼드의 조언대로 행동하지만 정작 해결해야할 문제인 세무 문제는 웨이먼드가 대신 얘기한다.
듣고 계세요? 라고 물어보지만 딴짓만 하다가 소리를 질러버린다.
에블린은 사실 영수증 더미를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외면하고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멀티버스로의 여행들이 다 끝난 이후 다시 세무청에 조이와 함께 찾았다. 하지만 아직 세무 처리는 끝나지 않았다. C 양식이 있다고 얘기를 꺼내는 것이다.
이제 다시 원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얘기를 꺼내는 셈이다.
그 때 영화에선 수많은 소음들이 잠깐 배경으로 깔린다.
조부 투파키는 지금까지 소음 속에서 자신을 구해줄 한 가지가 있기를 바라며 살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소음이 끝나자 세무청 직원 디어드리는 묻는다.
'왕 부인 듣고 계세요?'
에블린은 대답한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지금, 여기, 당신과 나의 이야기에 집중을 시작할 차례다.
가지 못한 다른 후회가 만든 세계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 현존하게 만드는 소음을 뚫어내고서 찾아낸 그 한 마디는 '듣고 계세요?' 이다.
허무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의식적으로 생각해보라는 치료 요법이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실은 우린 모든 것이 될 수 없고 어디든 갈 수 없다.
에블린은 조이의 문제도 직접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스스로도 베이글에 굴복할 정도로 나약했고
페인트칠을 제대로 하라고, 옷더미를 잘 정리하라고 남편을 구박하지만 사실 자기가 거기까지 신경 쓸 정도로 여유로운 사람도 아니었다.
우리 또한 그렇다. 우리가 지금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제외하고선 미처 신경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우리의 허무함과 우울함을 해결해주는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울하면 여행을 떠나세요! 친한 친구와 밥을 먹으세요! 주변의 소중함을 느끼세요! 같은 해결책을 주고 있진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자신의 눈 앞의 것만을 거대하게 생각해왔던 에블린이 타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뭐든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려고 했던 조부 투파키의 허무함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때론 우리가 무엇이든 될 수 없음에, 어디든 갈 수 없음에,
타인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 없음에 답답함을 느끼며 무력감을 느낀다.
그래서 무엇이든 되고 싶고 어디든 가고 싶으며 내가 뭐든지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스스로의 위치가 있다. 그걸 깬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만에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누군가의 손을 잡고 끌어 안아주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잠깐의 상식이 통하는 한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라면
그 시간을 소중히 할 수만 있다면
그 잠깐이 세상을 구할 수 있지도 않을까?
지금 내 위치에서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을 하나씩 해나가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나의 세상은 조금씩 좋은 쪽으로 바뀌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번째 봤을 때 더 좋았던 영화이며
떠올랐던 게 참 많았던 영화.
처음엔 나라는 개인과 가족이라는 집단에 대해서밖에 생각할 수 없었지만
두번째 볼 때는 조금 더 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됐던 것 같다.
이 영화가 누군가의 인생을 조금은 바꿨기에
무력하지 않은 영화라고,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라고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