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최고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퀸스 갬빗
갖고 싶은 체스판을 만났습니다.
쾌청하고 싱그러운 어느 가을날, 우연히 제주의 어느 서점에 들어갔습니다. 책들이 꽂혀있는 곳을 지나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체스판이었습니다. 자그맣고 독특한 모양에 시선이 멈췄습니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이탈리아 여행에서 구입한 것이라며, 소중하다는 듯 팔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한참을 바라보며 눈 안에 담아 놓았습니다. 이탈리아를 다시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접했던 체스는 나이가 들면서 멀어졌습니다. 체스를 해본 지도 꽤 오래되어 이제는 기억도 아련합니다. 언젠가부터 체스 경기보다는 체스 판과 말의 생김새에 끌렸습니다. 단순한 모양의 폰이나 룩도 좋았지만, 정교한 모양의 나이트와 킹, 퀸의 모습은 더 좋았습니다. 체스 말을 모으고 싶다는 생각은 주욱 가지고 있었는데, 우연히 만난 체스판을 보고 그 마음이 다시 꿈틀거렸습니다. 우연일까요? 제주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넷플릭스에 <퀸스 갬빗>이 등장했습니다.
<퀸스 갬빗>은 체스 경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2020년에 본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 중에 가장 좋았습니다.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도, 체스 경기의 긴장감도, 1960년 대의 묘사도 모두 좋았습니다. 그 모든 것의 앞에는 체스 천재 소녀 '베스 하먼'을 연기한 '안야 테일러 조이'가 있었습니다. 화면을 응시하는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는 주변을 빨아들이는 듯한 마력을 보여줍니다. 이 드라마는 '안야 테일러 조이(Anya Taylor Joy)'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의 상당 부분을 그녀가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드라마의 진행은 일반적인 스포츠 경기의 흐름과 유사합니다. 소질이 보이는 주인공을 누군가 발굴하고 훈련시키고 점점 더 강한 상대를 만나고 잠시 좌절했다가 결국에는 가장 강한 사람을 이기고 챔피언에 오르는 방식이죠. <퀸스 갬빗>은 그런 보편적인 흐름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독특하게 바꿔놓았습니다.
개성 있는 등장인물들이 있습니다. 모두 일반적인 인물상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베스 하먼을 발굴했던 관리인도, 입양했던 양어머니와 양아버지도, 지역 챔피언도, 미국 챔피언도 모두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예상과 다른 행동을 합니다. 특히, 양어머니는 처음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은근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체스 경기가 있습니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체스 경기를 보조 역할로 밀어내는 일이 없이 계속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사랑 이야기로 가리지도 않고, 감동을 끌어내려는 억지 상황을 만들지도 않습니다. 담담하고 빠르게 체스 경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체스를 잘 모르면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체스 경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합니다.
<퀸스 갬빗>의 마지막 장면을 볼 때는 오래전 영화 <록키 IV>가 생각났습니다.
작품의 분위기는 다르지만, 스포츠 경기, 최강의 러시아 선수, 철저한 훈련, 러시아에서의 경기, 적진에 홀로 있는 외로움, 미국인의 승리, 러시아인의 박수와 같은 상황은 두 영화 모두 비슷합니다. 특히, 마지막에 최강의 러시아 선수를 이기고 러시아인들이 박수를 치는 장면은 데자뷔 같았습니다. <록키 IV>는 미국 만세의 느낌이었던 것에 반해 <퀸스 갬빗>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요.
바비 피셔(Bobby Fischer)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미국인 최초의 세계 챔피언십 우승자(1972년)라고 합니다. 당시 그의 상대가 소련의 보리스 스파스키 (Boris Spassky)였다고 합니다. 6살부터 체스를 배워서 15살에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다고 하는 내용도, 소련 챔피언을 상대한 다는 것도 유사합니다. <퀸스 갬빗>의 원작 소설이 바비 피셔를 모델로 해서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주인공을 여자로 바꾸고 좀 더 과거로 시대를 옮겨서 말이죠.
<퀸스 갬빗>은 재미있는 드라마입니다.
재미있을 뿐 아니라 작품도 좋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연기도 좋고, 시대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의 길이도 적당하고 이야기에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넷플릭스가 멋진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작품이 계속 등장하기를 기대합니다.
아직 이 드라마를 보지 않은 분이 부럽습니다. 이런 멋진 작품이 아직 기다리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