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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애 Sep 21. 2020

낯선 삶을 생산하다.

홀로 떠난 <아티스트 데이트>


아티스트 웨이를 진행한지 10주차다. 그런데 여태 제대로 된 아티스트 데이트를 해 본적이 없다.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데 그 첫 번째가 ‘혼자서 떠난다’이고 두 번째가 ‘두 시간 정도를 할애한다’이다. 그런데 이것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물론 코로나가 잠잠하던 때 커피숍에서 2시간을 홀로 보낸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때도 창조성을 회복하기 위한 어떤 것을 했다기 보다는 과제 같은 것을 빠른 속도로 진행했다. 창의성을 찾는 것은 힘든 시간이었다.



2박3일 동안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캠핑을 떠났다. 오롯이 우리 네 식구뿐이었다. 그렇게 가족과 부대끼고 나니 진심으로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계획을 세우고 행동에 옮겼다. 단, 조건을 붙였다. 오늘은 절대 서두르지 않기. 시간에 연연하지 않기. 여유를 지키기.



가족들의 점심을 준비해두고(물론 레토르트 식품이지만...) 오전 11시를 출발시간으로 정하고 몸단장을 했다. 쌀쌀해진 날씨에 맞게 하늘하늘 하면서도 꾸안꾸스타일의 호피무늬 블라우스와 청바지, 그리고 아주 편안하다고 생각한 운동화를 신었다. 나중에 하도 걸어서 그 운동화가 그리 편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방은 최대한 작은 것으로 준비하고 지갑과 휴대폰, 이북리더기와 손소독제를 넣었다. 접어서 넣으면 작은 보조가방도 하나 넣었다. 외출 예산은 5만원. 원단시장에서 장을 볼 것까지 생각했다. 11시가 되자마자 집을 나섰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발걸음은 깃털보다도 가벼웠다.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여유 있게...









개찰구에서 핸드폰을 갖다 대는데 승차처리가 되지 않는다. 하도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는 터라 핸드폰에 교통카드 설정을 해두지 않았다. 천천히 설정을 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당분간 문이 안 열리는 쪽에 기대어 서서 미리 다운받아 온 <그리스인 조르바>를 펼쳤다. 지하철에서 읽는 책의 묘미는 나만이 아는 동굴 속으로 쑥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거다. 처음으로 이북리더기를 사용해서 책을 읽었지만 이미 나는 동굴 속에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내려야 할 역을 지나고 있었다. 당황하지 않는다. 천천히 지하철 노선도를 보니 두 정거장만 가면 다시 3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다. 내가 정한 목적지는 안국역에서 가까운 국제갤러리이다. 




안국역에 내려 2번 출구로 나가니 어딘가 낯이 익다. 가만히 살피니 북촌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년 전 쯤 친정 엄마가 손주들 구경시켜준다고 데리고 오셨던 곳이다. 그 때는 여기저기 마술이니 마임이니 공연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지금은 간간이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이나 친구인 듯 보이는 짝꿍들만 지나칠 뿐이다.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사늘한 바람 속에 따스한 햇볕을 느끼며 골목길을 누볐다. 잠깐 서서 국제갤러리의 위치를 확인했지만 약속된 시간이 없기에 발길 가는 대로 눈길 닿는 대로 걸었다. 



북촌의 한 베이커리 카페


마스크 때문에 목마름을 참고 걷다가 점심도 먹을 겸 베이커리 카페에 들어갔다. 제일 맛있어 보이는 빵 한 개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한옥 카페가 내려다보이는 루프탑에 자리를 잡았다. 파란 하늘과 한옥 정원이 잘 어우러지는 곳이었다. 조그만 참새들이 빵 부스러기를 찾아 발밑으로 날아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옆으로 두 커플이 자리를 잡았는데 짧아진 혀로 정답게 나누는 이야기가 살짝 부러웠다. 그래도 나는 이 시간이 너무 좋았다. 외로움을 즐기는 이 시간.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닌 전문 커피숍에 혼자 앉아 커피와 빵을 먹는 건 처음이었다. 다음엔 혼밥으로 혼술로 발전시켜보리라...





또 천천히 걸어 정독 도서관의 앞 정원을 살짝 거닐다 나오는데 아파트 화단에서 자주 보던 보라색 꽃이 눈에 들어왔다. 저 꽃의 이름은 뭘까? 사진을 찍어 검색을 해보니 ‘맥문동’이란다. 이름도 낯이 익는다. 기관지와 호흡기를 편안하게 해주어 맥문동의 뿌리는 한방 약재로 활용된다고 한다. 잠깐 서서 자세히 보고 궁금증을 가지고 물으니 드디어 이름을 불러줄 수 있게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 생각났다. 길가에 핀 꽃도 그러한데 하물며 내 가족, 내 주변의 친구들의 이야기도 가만히 들어주고 물어주고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갤러리와 현대미술관



국제갤러리에 도착했다. 아이와 함께 가면 좋다고 추천해준 에이스트릭트 전시를 보러왔다. 물론 오늘은 혼자. 그런데 대기 시간이 한 시간 반이란다. 가까이 가 보니 줄 끝이 안 보인다. 다른 때 같으면 목적이 그 전시였기에 한 시간 반 동안 책이라고 읽으며 기다렸을 거다. 하지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이 자유의 시간을 기다림으로 버릴 수 없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그러고 싶었다. 또 걷다보니 더웠다. 손목까지 내려온 블라우스를 팔꿈치 위까지 걷어 올렸다. 손목에 메여있던 머리끈으로 머리도 질끈 묶었다. 그리고 잠시 올려다 본 하늘. 현대 미술관 옆 기와건물 단청이 파란 하늘과 경계를 지고 있었다. 경계이나 경계이지 않은.





인사동 입구에 들어섰다. 인사동은 몇 번 와 본 곳이지만, 이곳에서 열리는 전시관을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무료 전시가 많다는데 나같이 예술에 문외한 사람이 막 들어가 봐도 되는 것인가 싶어 망설였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한 곳을 들어갔다. 출입 명부를 적고 체온을 측정하고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걸린 눈에 띄는 그림 앞에 섰다. 인사동과 관련하여 수묵으로 쓴 켈리 전시회였다. 그림 앞에 서있다 문득 이 방향으로 도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에 발걸음을 쉽게 옮기지 못했다. 전시 관람도 방향이 있지 않을까? 사람이 많으면 따라 걷겠는데 전시를 보고 있던 단 한사람이 밖으로 나가던 참이었다. 그 자리에서 뒤를 돌아 눈에 띄는 작품 두어 개 앞을 서성이다 돌아 나왔다. 참 바보 같다. 나중에 찾아보니 시계방향으로 돌면 된단다. 그렇게 어설픈 전시 관람을 마치며 인사동을 급히 빠져나왔다. 발걸음에 여유라는 것이 떠난 지 오래인 사람처럼.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잡혔다 생각이 든 것도 그때쯤이었다.




평소 동대문시장에 가면 종로2가에서 3가, 4가를 거쳐 광장시장을 지나 걸었는데 발이 너무 아파 버스를 탔다. 동대문이 보이기 직전에 내려서 동대문 종합상가를 찾았다. 요즘 한창 취미를 붙인 재봉틀 재료와 원단을 사려고 했는데 대부분이 문을 닫은 상태였고, 그나마 문을 연 지하는 들어가 물건을 고르기가 불편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사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배가 살짝 고팠다. 길거리에 파는 못난이 핫도그나 닭꼬치가 자극했지만 혼자 길거리에 서서 먹을 배포까지는 아직 없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펼쳤다. 피곤한 탓인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집에 도착하니 여섯 시다. 일곱 시간을 오롯이 혼자가 되어 다녔다. 치킨을 시켜 가족들과 함께 먹었다. 내가 종일 어디를 다녔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나의 자유 시간을 지켜주기 위해 그 시간동안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물론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아빠와 신나게 게임을 할 수 있었기에 좋았을 거다. 그들은 당연히 내가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아니면 어느 서점에 콕 박혀 있었겠거니 생각한 거 같다. TV를 보며 다리 좀 주물러 달라니 두 아들이 양쪽 다리에 매달린다. 종일 걸었다고 그제야 말했다.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자유 시간을 줬더니 겨우 서울 한복판을 걷고 왔다고? 그렇다고 이렇다 할 전시를 본 것도, 쇼핑을 한 것도 아니고?



나도 이렇게 혼자 시간을 소비하면서 다녀 본 기억이 없다. 그냥 아무 목표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구석구석을 느끼며 다녀본 일곱 시간. 언제 또 가지게 될 시간일지 모른다. 낭비라고 생각했던 그 소비된 시간에서 다른 낯선 삶을 생산한 듯한 느낌이다. 다음엔 당당히 전시관에 들어가 작품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시계 방향으로 돌며 작품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리라.





매주 수요일 아침 온라인으로 아티스트 웨이 위크숍을 진행한다. 워크숍을 진행한 것은 3주 되었지만, 아티스트 웨이를 혼자 실행하기는 10주차이다. 아티스트 웨이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기본 도구 두가지가 필요한데, 모닝 페이지와 아티스트 데이트다. 모닝 페이지는 매일 아침 세 페이지 정도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적어가는 것이다. 아티스트 데이트는 일주일에 두 시간 정도를 할애해서 홀로 데이트를 하는 것이다. 모두 창조성 회복을 위한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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