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가 꽉 막혀 있어서 인지 아니면 정신이 딴 데로 가 있어서 인지 입맛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대충 귤로 배를 채우고 끝내고 싶지만 스스로를 다독이며 부엌으로 발을 옮긴다. 냉동실에서는 소분해 둔 전골용 소고기와 새우, 관자를, 냉장실에서는 버섯, 방아, 호박, 배추, 무, 두부를 골라 꺼낸다. 넓은 냄비에는 절반이 조금 안 되게 물을 담고 육수용 팩과 육수 코인 두 알, 그리고 무와 표고버섯 꼭지를 넣어 끓인다. 육수가 우러나는 동안 다른 화구에는 프라이팬을 올리고 씻은 새우와 관자, 버섯을 차례로 굽는다. 어지간해서는 냄새도 맡기 어렵고 맛도 느낄 수 없지만 재료가 구워지는 동안 부엌을 가득 채운 냄새가 기어코 비좁은 코 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음, 맛있는 냄새!’
평소 같으면 모든 재료를 바로 전골냄비에 넣어 익히지만 오늘은 맛 대신 식감이라도 느끼기 위해 한 번씩 구워 재료를 단단하게 만든다. 육수에는 코인을 넣어 이미 어느 정도 간이 맞을 수도 있지만 혹시 몰라 소금도 조금 넣고 생강즙도 한 큰 술 듬뿍 떠 넣어준다. 생강이라면 냄새가 나지 않아도 알싸한 맛을 느낄 수 있고 속을 따뜻하게 해 주어 체력 회복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원래 나에게 있어 전골은 귀찮을 때 만들어 먹는 요리지만 오늘은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 정성 들여 만드는 한 끼가 될 예정이다.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이한 지금까지, 걸핏하면 냉장고 속 재료를 꺼내 전골을 만들어 먹었다. 전골은 잎채소, 뿌리채소, 해산물, 고기, 달걀 골고루 넣어 영양소를 다양하게 섭취할 수 있고 집안에 어중간하게 남은 식재료를 한 번에 먹어 치우기에도 용이하다. 국물까지 걸쭉하게 만들어 먹고 싶을 땐 고구마나 오늘처럼 늙은 호박을 넣고, 자극적인 맛이 생각날 때는 하이디라오에서 나온 마라탕 소스를 넣기도 한다. 단순한 맛이 좋을 땐 육수 코인과 소금 혹은 피시 소스로 간을 맞추고 조금 더 달큼한 게 먹고 싶을 땐 일본전골 소스를 더한다. 매일같이 전골을 만들지만 넣는 건더기 재료나 육수 재료에 따라 매일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다.
어릴 적 우리 집에서 전골은 귀한 음식이었다. 온갖 종류의 버섯과 소고기를 넣은 냄비가 식탁 한가운데 놓인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 오르면 그때부터 엄마가 나눠준 달걀노른자가 담긴 종지에 익은 건더기를 찍어 먹느라 바빴다. 그때만 해도 우리 집에서 달걀노른자를 생으로 먹는 일이 드물었지만 전골을 먹는 날만큼은 육수가 벤 건더기를 노른자 소스에 찍어 고소한 맛을 즐기곤 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 일본에서 일본전골을 먹을 때 달걀노른자를 소스로 쓰는 걸 보며 엄마도 어디에선가 이 요리를 보고 따라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우리 집에서 전골 요리가 귀한 취급을 받은 건 아무래도 엄마표 전골에는 버섯이 골고루 들어가고 소고기도 필요한 데다 신선한 달걀도 준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내가 만든 전골에는 매번 다른 잎채소가 들어가고 소고기도 마트에서 할인 중인 한우나 수입산 고기 한 팩을 사서 일 인분씩 소분한 걸 꺼내 쓰기 때문에 금전적인 부담이 적다. 소스도 달걀 대신 연겨자가 들어간 간장이면 족하다 보니 지금 우리 집에서는 전골이 거의 명절 후 끓여 먹는 잡탕('전 찌개'라고도 부른다)만큼이나 뒤죽박죽이고 만만한 음식이 아닐 수 없다. 집에 있는 재료는 아무 거나 넣는다고 해도 속은 편하고 원래 즐겨 먹던 라면에 비하면 영양가도 높다. 아무리 막 만들어도 밥에 김치 한 조각 얹어 김에 싸 먹는 것보다는 정성도 들어간다.
오늘처럼 감기에 걸린 날이면 전골이나 김치 콩나물국을 끓여 먹는다. 오늘의 메뉴가 김치 콩나물국 대신 전골이 된 이유는 조금 더 공들여 만든 음식을 먹고 싶어서다. 12월 3일 밤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다음날 새벽 계엄령을 해제하기 위한 표결이 빠르게 가결되었지만 이후로도 나라 상황은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다. 이미 탄핵을 위한 표결이 한 차례 무산된 후라 다가오는 토요일까지는 다방면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을 쉽게 떨칠 수가 없다. 밤 사이 새로운 속보가 뜰까 선잠을 자는 것은 물론, 낮에도 틈만 나면 뉴스를 틀어 분노하는 것이 새로운 루틴이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연말이니 조금 더 느긋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당장 계엄령이 다시 선포될까 하는 두려움도 있지만 이미 한 차례 내려진 비상계엄령 선포에 이어 탄핵이 무산된 일로 국격이 떨어지면서 경제적인 타격이 먼저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아무리 정치에 무관심하려고 해도 이미 피부도 와닿은 피해를 떠올리면 눈앞에 펼쳐놓은 책 속 글자에도 집중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나라가 안정될 때까지 모든 일에 손을 놓고 있을 것인가 하면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몸과 마음을 살피며 더 힘을 내기 위해 부엌 앞에 선 것이다. 평소보다 더 다양한 재료를 꺼내 가지런히 손질을 하고 공들여 굽고 익히는 도중에도 귀는 뉴스를 향해 있지만 그럼에도 손과 눈은 눈앞 재료에 집중하려 해 본다. 비록 감기 때문에 냄새를 맡거나 맛을 느끼기는 힘들지만 손을 놓기보다는 감각을 살리기 위한 다른 방법을 찾아본다. 나를 보살피는 일도, 가족을 챙기는 일도,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는 이들을 경계하는 일도 우선은 제대로 한 끼에서 시작된다. 혼란스러울수록 계속 떠밀려가기보다는 힘 있게 뿌리로 버티며 유연해져야 한다. 머지않아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악화된 나라 상황이 갑자기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어떤 앞날에도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 오늘도 나의 뿌리인 일상을 지켜낸다. 그러니 먹자. 일단은 든든하게 챙겨 먹는 것부터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