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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ver May 06. 2024

괜히 만든 인생 사용 설명서

와사비라이팅클럽 1주차

어떤 순간에는 삶에도 사용 설명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현은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용 설명서? 그토록 장황하면서도 진부한 것이 또 있을까. 언제 사용 설명서를 꺼내든 적이 있던가. 꼭 읽지 않아도 되는 것. 그럼에도 물건과 같이 들어 있어 버리지 못하는 것. 무슨 애물단지도 아닌 것이 괜히 버리지 못해 서랍 안의 한편을 차지한다. 일이 생기면 그때 참고해야지, 하는 마음. 그래, 괜히.

괜히; 아무 까닭이나 실속이 없게.


그러니까 괜히, 삶에 대해서도 사용 설명서를 바랐던 거다. 물건의 사용 설명서는 한 번 펼쳐본 적 없던 인간이 삶은 설명해 주길 바랐다. 어쩌면 스스로 설명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고. 그런데 사용 설명서를 언제 펼쳐봤더라? 이케아에서 샀던 선반을 조립할 때. 옷을 정리하기 위해 샀던 행거를 조립할 때. 정현은 무언가를 조립할 때야 비로소 사용 설명서를 꺼내 들었다.

조립; 여러 부품을 하나의 구조물로 짜 맞춤. 또는 그런 것.


하나의 구조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용 설명서가 필요했다. 구조물로 짜 맞추기 위해선 한 단계, 한 단계, 정석대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정현은 삶에 사용 설명서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순간을 떠올린다.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 내 존재가 불투명해지는 것 같을 때. 누군가 단계마다 설명해주어 스스로 안심시킬 수 있는 종이 혹은 파일. 그것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생겨버려 괜히 필요해진 것. 만들어준 것이 없다면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만들어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다면 나에게 맞게 다시 만들어야 했다.


조립할 필요가 없이 쉽게 만들어진 물건은 사용 설명서가 필요 없다. 누구도 웬만해서는 그 장황한 페이지를 펼치지 않는다. 삶은 쉽지 않고, 정현에게는 종종 사용 설명서가 필요했다. 그러니 괜히 고민한다. 괜히 삶을 설명하려 한다. 사용 설명서를 따라 하나씩 조립하다 보면 무언가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사용 설명서라면 괜히 가끔 참고할 수 있지 않을까.


여독이 풀리지 않은 정현은 사용 설명서의 첫 줄을 고민하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정현은 금세 꿈을 꿨다. 파란 눈의 고양이를 만났다.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를 따라 정현도 기지개를 켰다. 뜨거운 공기를 따라 퍼지는 자극적이고도 달큰한 똠얌의 냄새. 바쁜 꿈의 밖에서는 불투명한 희망이 정현의 머리맡을 고요히 지켰다.




/와사비라이팅클럽의 1주차, <인생 사용 설명서>를 글감으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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