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상극인 운동을 배우고 있다. 클라이밍이라고 실내 암벽장에서 크고 작은 돌(홀드)을 밟아 나가며 목표 지점에 이르는 운동이다. 오랜만에 가르침 받는 입장이 되어, 요즘 가장 몰두하고 있는 것이 무어냐고 물어보면 클라이밍이라고 답할 수 있을 정도로 성실하게 배우고 있다.
이 운동은 올해 초 클라이밍에 푹 빠져 있는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두 시간 남짓 체험을 하고 나서 느낀 점은 '성취감에 재미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부담스럽다.' 였다.
클라이밍 센터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슬쩍 관찰했는데, 가장 인상 깊은 점은 그들이 서로에게 관심을 두는 정도가 나의 허용치를 한참 초과한다는 거였다. 그들은 문제를 풀어가는 도전자를 관찰하면서, 그분이 어려운 고비를 잘 통과하거나 문제 풀이에 성공하면 '나이스'라고 말하며 칭찬해준다. 한 지점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으면 힌트를 주며 서로 돕거나, 아깝게 실패하면 마치 자기 일인 양 아쉬워하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에게 진심인 운동이라니. 평소에 하는 운동이라곤 홀로 달리기, 홀로 수영하기, 홀로 케틀벨 하기일 정도로 '극'내향형인 나는 도무지 그 분위기에 젖어 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계속 해보고 싶은 정도의 충분한 재미를 느꼈음에도 클라이밍을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어쩌다보니 클라이밍을 배우고 있다. 새로운 운동을 배우고 도전하는 것은 실로 즐거운 일이기에 퇴근 후 무료한 삶에 활력이 된다. 지하철을 타고 구래역에 내려 센터에 입장하면 선생님들께 인사를 드린다. 그 뒤 운동을 하는 1~2시간 내내 스트레칭하고, 볼더링 문제를 풀거나 지구력을 연습하면서 철저히 홀로 시간을 보낸다.
혼자서 운동하면 지루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동안 대부분의 운동을 이런 식으로 혼자서 해왔기 때문에 나에게는 재미이긴 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도전해봐야지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면 기분 좋아한다. 그다음엔 어디까지 해봐야지 생각하고, 실패하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면서 각각의 순간에서 느낀 점을 기록하다 보면 2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하지만 아직 '서로를 돕고, 북돋아가며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는 분위기'에는 도통 적응을 못 하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한 번 지구력을 연습하고 다음 도전을 하기까지 5~10분 간의 회복 시간을 갖는데, 그때 뭘 하고 있어야 할지 뻘쭘해서 무려 이북을 챙겨와 읽는 지경이랄까. 다른 분들은 쉬는 동안 몸을 풀면서 자신이 다음에 풀 문제를 지긋이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길을 찾거나, 보통 문제를 풀고 있는 타인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편이다. 난 아직 인물에 시선을 두는 것이 어렵다.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는, 그들도 나를 보지 않았으면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의 도전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이걸 문장으로 적는 것 만으로도 너무 쑥스럽다. 배우기 시작한 지 만으로 2주도 안 되기에 서투른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도, 잘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줄 때면 정말이지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학창시절 체육 수행평가처럼 점수가 매겨지는 듯하다. 물론 그들은 이런 의도가 없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과민 반응은 나의 오랜 고질병이다. 비단 클라이밍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상황에서 나의 부족하고 미숙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싶어 한다. 어설픈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면서 부족한 점을 평가받는 것은 정말이지 적응이 안 된다. 그 연장선 상에서 조언받기를 과도하게 민망해하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은 그 이전에 나의 부족한 점을 알아차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서투른 내 모습을 마냥 싫어하고 매사에 능숙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처음 하는 건데 어색하고 실수할 수도 있는 게 당연한 거다. 그럼 연습을 통해 그 점을 보완해나가면 되는 일이니 차근차근 열심히 반복한다.
그렇지만 그 부족함을 들키고 싶지 않다. 타인이 눈치채기 전에 내가 미리 실수나 부족한 부분을 호다닥 메꿔놔야 안심이 된다.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신세를 지기 싫은 마음일까, 매사에 약점 없이 완벽한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은 마음일까. 잘 모르겠다. 둘 다 맞을지도.
어제 문제를 풀다가 하나의 홀드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여러 번 시도했던 문제였는데, 안간힘을 써도 다음 홀드로 연결되지 않아 실패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저기서 합손하시면 될 거 같은데요."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뒤에서 몸을 풀던 분께서 용쓰고 있는 나를 보고 계셨나 보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힌트에 당황했지만, 듣고 보니 진짜로 그 방법대로 진행하면 다음 홀드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조언을 따라 다음 홀드로 넘어갈 수 있었고, 문제를 무사히 풀고 내려왔다. 조언해주신 분에게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고, 바닥에 앉아 신발을 벗었다. 기분이 묘했다.
도움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내가, 이번만큼은 그분이 주신 힌트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달까. 아니 그 사람이 좋았다는 말이 아니고, 힌트가 말이다. 부끄러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는 기쁨과 그분을 향한 감사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이게 조언을 듣는 마음가짐이구나, 새로운 경험과 배움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클라이밍 센터에서 늘상 발생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에 이만큼이나 글을 쓰면서 호들갑을 떠는 중이다.
별 일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큰 도전이다. 클라이밍은 그 자체가 이미 도전으로 이루어진 스포츠이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경험도 나에게는 다른 의미의 도전이 되고 있다.
그 첫 발자국으로 '조언 듣기'라는 목표 지점을 찍고 내려왔다. 이제 겨우 한 번이지만, 조언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내 성격에 이미 깊이 뿌리내린 부끄러움을 완전히 소거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대신 조언자의 용기 있는 도움과 그 덕분에 더욱 성장할 수 있음에 느끼는 감사와 기쁨의 감정에 더 집중하려고 한다. 그래서 조언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부끄러움과 민망함보다는 감사와 기쁨의 감정이 더 크게 느껴지는 날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클라이밍을 배우면서 그동안 차곡차곡 벽돌을 쌓아 올렸던 나만의 세계에서는 절대 발생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하는 요즘이다. 이러한 변화와 경험이 아직은 낯설고 어색하다. 그렇지만 계속 배우고 부딪히다 보면 조금씩 익숙해지지 않을까. 조금 더 열린 마음을 갖는 내가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