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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연 Dec 15. 2022

클라이밍과 매력 : 해맑음

이렇게 해맑은 어른 보셨어요


클라이밍을 배우고 있다. 제때 물 주고, 햇빛 쐬어주고, 응원의 말도 해주었더니 어느새 싹이 나서 쑥쑥 자라는 중이다. 재미와 자신감이 조금씩 붙으면서 다른 암장의 분위기가 궁금했다. 지난 주말 내친김에 인기 있다는 서울의 암장을 방문해 봤다.
워후, 깜짝 놀랐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렇게나 젊은 사람들이 가득한 장소를 방문한 건 5년 전 신촌 다모토리 이후 처음이었다. 다모토리는 클럽의 순한 맛 버전인 곳인데, 영 어색했던 나는 물개박수만 치다가 한 시간 만에 도망치듯 나왔다지.
누가봐도 처음 방문한 사람처럼 어리숙한 눈으로 암장을 살펴봤다. 이번에 방문한 구로 피커스는 영화관을 개조한 암장이라서 공간이 상당히 널찍한 편인데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볼더링 문제 풀이에 도전하며 서로를 응원하고 있었다. 암벽 바로 앞에는 스마트폰이 거치된 삼각대가 빼곡히 자리 잡았다. 기자회견장 같은 느낌이었다. 곧 유명인이 나타나 충격 발표를 한다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다 순간 궁금해졌다. 왜 사람들은 이만큼이나 클라이밍을 좋아하는 거지? 다 큰 어른들이 소중한 주말 시간을 여기에 기꺼이 할애하는 이유는 뭐지?

그 까닭을 찾기 위해 클라이밍을 하면서 틈틈이 암장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사람들과, 나에게서 정답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대가 없는 목표 달성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해맑음이다.

난 언제부턴가 목표에 대가를 바라고 있다. 나만 그런 건 아닐 테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목표에 이르면, 그 콩고물을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 콩고물 중에서 가장 달콤한 건 타인의 인정이라 생각한다. 승진이 목표인 사람은 사회적 인정을,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사람은 부자라는 칭호를, 글을 쓰는 사람은 유명 작가로 불리길 기대한다. 나는 아니다, 쿨럭. 즉 쉽게 말해 "나  이만큼 잘났어요" 하고 자랑하고 싶은 거다.
이 때 생각해볼 부분은 부수적인 콩고물이 목표 달성을 하려는 이유가 되면서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다. 가족을 기쁘게 하고 싶어서 명문대에 진학하거나, 많은 돈을 벌고 싶어서 전문직을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언젠가 목표 자체의 가치보다는 그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얻는 부수적인 이윤에 초점을 두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이런 혜택을 얻고자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게 나쁘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런데 난 그럴 때면 가끔씩 허무해지고 우울해졌다. 위에서 말한 가족의 기쁨을 위해서 공부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는데, 내가 성적이 떨어진다면 가족들이 날 싫어하지 않을까?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실망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더랬다.      

그런데 이놈의 클라이밍은 대가가 없다. 수없이 도전해서 겨우 어렵게 목표 지점에 다녀온다고 해서 배당금이나 성과금이 주어지는 것도, 예금 금리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가장 달콤하다는 타인의 인정 역시 클라이밍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것 같다. 암장의 사람들은 누가 얼마나 어려운 문제를 푸는지 별 관심이 없거든. 문제를 잘 풀고 내려오면 그 분에게 박수를 쳐주거나 응원을 해주기는 하지만, 있으면 좋고 없어도 아쉽지는 않다. 클라이밍에서 유일한 대가라고 말할 수 있는 걸 겨우 쥐어짜내봤는데, 자기만족 이거 하나였다.
근데 이 자기만족이 참 마약 같다. 문제를 성공적으로 풀고 내려오는 순간 "와 대박, 나 이 문제 깼음!!!" 하며 흥분, 뿌듯함, 대견함, 기쁨, 환희의 감정에 취해 얼마간 해롱거린다.
이걸 어디 가서 자랑하기에는 애매하다. 명절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에게 나의 클라이밍 영상을 보여주면서 '저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었답니다. 멋있죠?' 하고 자랑한다면... 분명 분위기가 급속도로 싸해질 것이다.
하지만 난 안다. 목표 홀드에 두 손을 갖다 대었을 때, 문제를 풀고 내려올 때, 성공적으로 문제를 푼 영상을 되돌려볼 때 그 마음은 이미 치사량의 흐뭇함에 지배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타인의 개입 없이도 자신에게 이토록 크게 만족할 수 있는 점이 내가 뽑은 클라이밍의 가장 큰 매력이다.
혜택의 기대 없이 목표 달성 그 자체로 나에게 이만한 기쁨을 주는 경험을 하는게 쉽지 않다. 나에게 만족감을 주기 위해 수많은 성인들은 주말 시간을 할애하여 돌을 밟고, 떨어지고, 또 돌을 밟으러 올라간다.

세상 해맑은 뒷태.

다 큰 어른들이 벽에 붙어있는 돌을 타고 목표 지점에 오르기 위해서 달뜬 표정으로 도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치 유치원생 같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공룡의 이름을 줄줄 외는 유치원생이 떠오른다. 너무 해맑다는 말이다.
 되돌아보니 단순한 목표 달성만으로 행복을 느끼는 순수한 경험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뜸해졌다. 어른으로 살아가면서 해맑음을 보여주는 것이 한편으로는 허점을 드러낸다고 느껴지면서 부터인 것 같다. 다소 이해타산적인 태도를 둘러싸고 있어야 적어도 호구가 되지는 않더라고.
클라이밍 암장에서는 단순무식한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해맑음이 보인다. 어른들이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눈빛을 무방비로 내비치는 순간을 자주 발견하고, 그 모습이 반갑다. 그런 장면을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클라이밍은 신기하고 놀랍고 재미있다. 그리고 나도 슬그머니 그 대열에 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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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이라는 표현이 나와서 드는 생각인데, 클라이밍 암장은 마치 유치원 같기도 하다. 암장에 도착해 벽을 쓱 훑어보면 알록달록한 돌들이 가득하다. 이렇게 색상이 다채로운 공간이라니, 마치 유치원에 온 기분이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전에 유치원을 졸업하고 다양한 색들로 가득한 공간을 마주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남색, 분홍, 보라, 연두, 초록과 같은 색의 이름을 이토록 몰두해서 외치고 뚫어지게 째려보는 경우가 언제 있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이토록 해맑은 것은 공간이 주는 유치원스러움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겠다고 분석해 본다.

뭐가 되었든 간에 재미있고, 즐겁고, 신나는 경험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다치지 말고 가끔씩 오래 오래 이 해맑음을 만끽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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