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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연 Dec 14. 2022

2. 무료 배송을 폐지합시다.

합리적인 소비와 내 만족, 그리고 무료 배송

2023년 다이어리를 구매하려고 온라인 문구점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개인적인 일정 기록용으로 하나, 그리고 학교에서 교무수첩으로 사용할 거 하나 해서 두 권의 다이어리를 장바구니에 담으니 가격이 얼추 4만 원이다.

순간 고민했다. 굳이 사야 할까. 교무수첩은 매년 학교에서 나눠주는데 그냥 그거 쓸까. 학교에서 주는 교무수첩은 종이 품질이 안 좋아서 만년필 잉크가 번진다. 매일 아침 만년필로 할 일을 정리하는 낭만을 포기할 순 없지. 그냥 만년필을 쓸 수 있는 교무수첩을 따로 마련하자. 만년필로 기록하면 1년이 더 재미있을 거야(?) 1년이 좀 더 안정적일 거야(?)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 글자라도 더 기록하게 돼서 빈틈 많은 내가 약간이라도 꼼꼼해진다면 그것 나름대로 만 삼천 원이나 더 주고 교무수첩을 따로 구매하는 게 의미 있을 테니까.
나머지 다이어리는 2만 2천 원짜리 저 멀리 프랑스에서 넘어오신 몸이다. 거기에 20대의 마지막이라는 특별함에 2천 원이나 주고 각인을 추가했다. 나는 별의별 일에 의미 부여를 많이 하고, 그 감성 값을 기꺼이 지불하는 편이다. 다이어리치고는 많이 비싸긴 하지만 2022년에 여러 가지 용도(일기용 하나, 가계부용 하나 일정 관리용 하나)의 다이어리를 각각 구비했다가 3개 모두 절반도 사용하지 못한 걸 보고, 이번에는 그냥 얇으면서도 일정 관리라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걸로 구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온갖 의미를 끌어모아 꼭 지출하지 않아도 되는 돈을 다이어리를 사는데 사용했다. 하지만 만족한다.
4만 원이라는 돈이 아깝지 않도록 내년에 있을 새 학기도, 29살도 잘 살아서 이 다이어리로 열심히 기록해야지. 4만 원이 아니라 400만 원의 값어치를 갖게 만들어줘야지. 이렇게 만족해버리면 될 일이다.
이번 학기 수업 시간에 합리적인 구매 의사 결정을 가르쳤다. 그때 아이들에게 합리적인 소비라는 건 소비하는 동안, 그리고 그 소비를 되돌아봤을 때 만족한 소비라고 말했다. 지금은 한없이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이 소비를 나의 만족으로 합리적으로 만들어버리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결제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 순간 배송비 2500원이 보인다. 2500원이라니. 1250원 *2이다. 지하철을 타고 다이어리를 판매하는 상점이 위치한 역삼역까지 다녀온다면 네이버 지도 기준 왕복 3시간이 조금 넘게 걸릴 것이며, 교통카드를 쓴다고 해도 왕복 3900원의 돈이 들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출출해지면 뭘 사 먹어야 하니 서브웨이에서 베지 샌드위치를 사서 먹는다고 치면 4400원이 또 들 거고, 가다가 목마르거나 추우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사서 마실 수도 있다. 빽다방에서 텀블러 할인을 받으면 1400원이다.
직접 사러 갔다 오면 내 시간, 교통비, 여비까지 해서 훨씬 훨씬 많은 돈이 들지만 택배 서비스라는 찬란한 문명의 혜택 덕분에 고작 2500원으로 수고로움을 아끼고 더 많은 돈을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게 역삼역이라서 이 정도지, 부산이었어 봐. 순천이었어 봐. 그렇게 비교하면 배송비 2500원은 거의 거저라는 생각이 든다. 택배 회사에 감사 편지라도 보내야 할 판이다.

그럼에도 나는 2500원이 아깝다. 바보 같다는 걸 아는데 그래도 아낄 수 있으면 아끼고 싶다. 그래서 무료 배송 금액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사이트를 뒤적인다.
만년필 잉크 필요하지 않나? 네가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의 잉크가 지금 서랍에 쌓여있어. 그들의 아우성이 들리지 않니.
노트 다 썼나? 지난 가을에 주문한 10개의 노트 중에서 이제 겨우 3개 썼다. 아직 7개나 남아있어.
신상 만년필 있나? 지금 갖고 있는 만년필만 11자 루가 넘는다. 양심이 있으면 그만 구매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살 게 없다. 필요한 게 없다. 나에게 필요한 건 다이어리 두 권뿐인데.
결국 눈 딱 감고 다이어리 2권에 배송비 2500원을 결제했다.
이거 진짜 큰 결심이다. 무료 배송을 채우지 않고 필요한 거만 딱 구매하다니. 28년 인생 동안 수많은 온라인 구매를 했지만, 무료 배송을 지나친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오늘 같은 날을 다이어리에 기록해야 한다. "무료 배송의 유혹을 뿌리친 날"이라며 기념일을 정해 두고 두고 기념해야 한다. 그만큼 대단한 일이거든.

무료배송이란 것이 진짜 고약하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언젠가 쓸 수 있을 거라고 내가 나에게 속삭이게 만든다. 남이 말하면 무시하면 그만인데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은 어쩜 그렇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필요한 물건으로 둔갑시킨다.
근데 사보니깐, 결국 버려지더라고. 손이 안 가더라고. 쌓여있는 물건들을 보면서 에휴, 왜 구매했지 이러면서 마음이 답답해지더라고. 그렇게 먼지만 쌓이다가 이사하거나 대청소할 때 쓰린 마음으로 버리게 되더라고.

무료배송 제도가 아예 사라지면 좋겠다. 나 같은 사람들 고민 안 시키게 말이다. 너무 과격한 생각이라고? 무료 배송의 혜택을 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돌을 맞을 수 있다고? 그럼 또 안되지. 그럼 나한테만 사라지면 좋겠다. 그렇게 아끼는 돈은 좋은 곳에다가 쓸게요. "무료 배송의 유혹을 뿌리친 날"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케이크를 구매하는데 쓸게요.
역시 난 별의 별 일에 의미부여를 하는 편이다.

그러다가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무료 배송 금액을 채우게 되면 난 또 무료 배송 제도를 아쉬워할 것이다. 어휴, 이놈의 줏대 없는 현대 소비인. 애증의 무료 배송.

그리고 배송이 왔습니다. 2022 다이어리가 딸려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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