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왕 연주회
아파트 현관 입구에 들어서면 멀리서 피아노 소리가 잔잔히 들리기 시작한다. 비틀즈의 헤이쥬드, 이제 막 연습에 들어간 곡인지 매끄럽진 않지만 건반을 꼭꼭 정확히 누르며 음을 따라가고 있다.
일요일 행왕에서 피아노 치는 시간은 온전히 과거의 나와 만나는 시간이다. 예전에 즐겨쳤던 조지 윈스턴의 곡이나 러브어 페어같은 곡들을 다시 연습하며 리듬과 음감을 하나 하나 찾아가는 기쁨이 쏠쏠하다.
심선생님께서 손때 묻은 옛 악보를 내미셨다. 엘리제를 위하여, 소녀의 기도, 은파, 아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주말저녁 아빠 옆에서 열심히 연습하고 들려드렸던 기억이 난다. 너무 오래 전이라 칠수 있을까. 과연 악보와 손이 따로 논다. 하지만 건반을 누를수록 과거의 그날을 기억하는 손가락은 조금씩 리듬을 따라가고 있었다. 몇 소절 틀리기도 박자를 잃기도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곡이었는지 새삼스러웠다. 곡의 느낌이란 내가 음율 속에 몰입하고 하나가 되는 과정일런지. 손가락을 따라 몸과 마음이 출렁인다. 초심자, 처음으로 시작한 느낌이란 아마도 이런 것일까. 어릴적 그날을, 소녀의 마음을 따라간다. 그런 감정과 곡을 이해하는 연주자의 마음을.
요즘 음악과 악기연주에 대한 행왕식구들의 관심이 부쩍 늘었다. 책과 그림, 언어공부 모임에서 시작해 정말 어쩌다보니 연주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재능을 갖고있는 이들의 자발적 가르침으로 시작되었지만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의 열정은 정말 대단하다. 한때 아이들이 차지했던 피아노. 아이들은 자라고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피아노에 중년 엄마들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아이들을 위해 내주었던 자리를 스스로가 다가가니 이건 뭔 조화일까.
수업때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피아노 기초를 배우는 효순 언니의 손 움직임과 눈망울은 순수하기 그지없다. 이보다 아름다운 열정이 있을까. 동영상으로도 찍고 박자 연습에 악보 공부까지 완전 학습이 따로없다. 천천히 느리게, 더디면 더딘 대로 자신의 능력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니 절대 성급하지 않다. 피아노뿐만 아니라 오카리나도 게다가 그림 그리기(유화)도 취미삼아 시작한 것이 어느덧 십 년이 넘어 실력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스스로도 느림보 학습이라고 하나 꾸준함은 엄청난 에너지를 몰고와 우리 모두에게 자극을 준다.
오카리나반은 또 어떤지. 오카리나 동호회를 하며 수년 간 지역 연주회를 하고 있는 희진샘의 도움으로 오카리나반이 두 반이나 생겼다. 병원 로비에서 봉사로 시작한 오카리나 연주 모임은 지역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사실 희진샘은 초급 일본어 강사이기도 한데 일본어 수업 때는 일본어 샘이라 부르고 연주 연습 때는 오카리나샘으로 거기다 사진작가로서 전시회를 열며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세 딸의 엄마이자 다방면에 그야말로 자아실현을 하고 있는 류희진 샘. 나이를 가늠하지 못 할 정도로 그 열정이 대단하다.
수업 후 혹은 수업 전 30분씩 익히고 연습하는 악기연주는 그야말로 짬짬이 학습이다. 초보자는 언제라도 대환영. 한 두 달 먼저 시작한 초보자가 새로온 초보자를 가르치고 하나 둘 모이고 모여 화음이 생겨난다.
공부든 악기든 욕심 많은 심 선생님은 피아노에 바이올린, 오카리나, 기타까지 하루 24시간이 모자를 정도다.
클래식 기타를 오랫동안 배워온 멤버가 왕초보 기타반을 만들어 하나 둘 모인 인원이 벌써 다섯 명. 중국어 수업이 끝나고 30분씩 배워온 시간이 쌓여 이제 중급반이 되었다. 손끝이 갈라지고 사서고생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쉽지 않지만 그저 차근차근 조금씩 아주 천천히다.
얼마 전 일년 동안 배워 온 악기솜씨를 뽐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일년 내내 초보자인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다들 손사래를 쳤지만 발표회처럼 우리들만의 음악제를 한번 해보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합동연주와 개인연주 그동안 연습 또 연습한 결과를 보여주는 날, 우리끼리만의 연주회 인데도 다들 떨린다고 야단들이었다. 다른 반의 도움으로 무대와 의자도 셋팅하고 다과 준비에 사회자까지 서니 완전한 음악회 모습이 갖추어졌다.
성악을 하셨던 김란씨의 특별무대, 가야금 연주와 우쿠렐레, 피아노 독주까지 4시간에 걸쳐 공연이 이어졌다. 이런 무대에 서 본 적이 언제였을까. 어색하고 부끄럽고 떨렸지만 여럿이 함께라서 의지가 되고, 실수하면 격려하니 서로에게 힘이 되는 시간이었다.
악기를 이제야 배워서 뭘 할까 싶지만 해보지 않고서는 맛보기 힘든 기쁨이자 즐거움이다. 서로가 화음을 맞추고 상대의 소리를 듣고 한 발 한 발 함께 나아가는 자세를 악기를 통해 배운다.
인간이 손으로 입으로 내는 소리, 그 음색과 음율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출렁이게 하는 바다가 된다. 행왕에 들어설 때 피아노와 오카리나, 기타 연주 소리가 들리면 스르르 마음이 열린다.
느린 아나로그같은 아마추어, 하지만 그 열정은 그 이상일 것이다. 행왕 식구가 원하는 에피쿠로스의 정원이 바로 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