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오강남 선생님의 책들.'예수는 없다' '세계 종교 둘러보기' 마음이 소란스럽다 싶으면 펼치게 되는 '도덕경'. 이번에 도마 복음서인 '또다른 예수'.
비종교인인 나는 (불교에 마음이 가 있긴하나) 종교의 구원이라던가 영생은 애초에 관심이 없어 그저 '마음 다스리고, 알기' 가 종교를 갖기 이전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몇몇 종교들처럼 교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자칫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게 되 더 큰 위험이 있음을 보아온 터라 특정종교가 인생의 구원 투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 세계인을 하나로 모으는 성스러운 책이기도 하고 전쟁으로 몰아가는 도구이기도 한 성경책. 그만큼 해석과 실천이라는 문제가 놓여있다.
성인의 말, 하나님의 말, 행동, 가르침 등 평생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행하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인간. 어쩌면 쉽게 이해할 수 없기에 앞으로도 계속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겠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달리 예수의 말씀만을 기록한 도마복음. 책 서문에서 말하듯이 가히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 폭격만큼이나 폭발력을 지닌 문헌이다. 그도 그럴것이 예수의 심판이나 재림, 종말이라는 말도 없고 오직 내가 '깨달아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파격이다. 즉 깨달음을 통해 새사람이 되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음을, 내속의 하느님, '참 나'를 찾는 것이 기본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철두철미하게 봉인된 진실이 툭 풀어져서 오히려 더 한발 들어가고 자유와 해방감을 얻은 기분이랄까. 'gnosis' , '깨달음' 이라는 것.
벽암록에서 선승들의 화두, 노자의 도덕경, 니체, 신비주의 신학자 에크하르트, 싯다르타, 원효, 성 프란체스코, 더 거슬러 올라가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도 나를 알고 본연의 상태를 깨닫고 움직이기를 강조하지 않았는지.
특히 '선심초심'의 저자 스즈키 순류가 도마복음을 먼저 만났더라면 불교에 귀의하지 않았을거라는 말에는 미소가 확 번졌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는 보는법을 바꾸는 '의식의 변화'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지금 '바로 내 손에 있다'는 것이다.
교리, 원리원칙, 올바름 이라는 것이 얼마나 삶을 구속하고 옭아매었는지. 누구의 성서적 해석만이 유일하다고 또 절대적이라고 주장 할 수 없다. 오히려 어린아이같은 순수함, 예상외의 해답, 비어있는 틈 속에서 가능성과 수용하는 포용력이 생기는 것이리라. 입버릇처럼 말하는 '마음을 비워라'의 '공'은 '비어있음' 보다는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임을. 이런 여러 다른 해석의 가능성과 융통성을 지녔다면 세상의 여러 다툼과 불화가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노자도 절대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치는 사고가 아닌 '온전하려면 휘어져야 한다'는 유연성을 강조했는지도.
간디도, 마틴 루터 킹도, 함석헌 선생의 '얼나'도 맥락을 같이하고 함께 한다.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이 바로 '본질적인 나', '참 나' 이며 이를 일컬어 '깨침'이라 하는 것. 결국 종교의 구원이란 온전함(wholeness)을 회복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