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었다. 친구들끼리 모여하는 이야기라고는 남자친구 사귀고 싶다. 남자친구 언제 생길까. 왜 남자친구가 안 생길까. 하던 날들이. 이성을 만날만한 장소를 가거나하다못해 흔한 동아리라도 들지 않고 늘 만나는 친구들만 만나곤 했었던 나와 친구들. 우리는 진지하게 어떤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은지도 늘 이야기하곤 했다.내 이상형은 나보다 큰 키, 나보다 똑똑한 사람, 생각이 깊고, 나를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다.
이어서 남자친구가 생기면 같이 가고 싶은 곳들을 꼽아보면 늘 에버랜드와 롯데월드는 빠지지 않고 목록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남자친구가 생기면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장에 꼭 같이 가고 싶었다. 손을 잡고 환한 미소를 띠며 조심스레 같은 속도로 스케이트를 타던 연인들을 보면서 나도 그런 것 꼭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남자친구와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장도, 서울광장과 목동아이스링크장도, 어디에서도 스케이트 데이트를 해보지 못했는데 연애시절은 끝나 있었다.
오늘은 일정이 없는 토요일. 지난번에 스케이트장에 갔다가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는 시간이라 헛걸음을 하고 온 것이 아쉬워 다시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나에겐 나보다 키 크고 현명하고 잘 챙겨주는 남자친구 대신 나보다 1~2cm도 아닌 40cm나 작고, 나라 퀴즈에서 ‘독일’이 ‘저머니’라 ‘J’로 시작한다고 우기고, 음료수 캔도 하나 못 따서 내가 따줘야 하는 꼬마가 따라붙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 어릴 적 얼굴이 보이는, 내가 낳은 나의 아들.
하고 싶은 것 하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건지, 롯데월드에 처음 갔던 17살에, 아이스링크장에 반하고선 남자친구와 가고 싶다 생각했었는데 30대가 절반이나 지나고서야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타게 되었다. 집에서 고작 15분 남짓 나가면 스케이트장이 있는데 말이다. 3.5달러를 내고 스케이트를 대여해 꽉 조여 신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조심조심 링크 위에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보았지만 보기 좋게 넘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링크를 돌 수 있을까? 주변을 보니 사람들이 어린아이의 걸음마보조기처럼 링크 위에 끌고 다닐 수 있는 기구를 앞에 두고 스케이트를 타길래 있어 얼른 가서 가져왔다. 역시, 초보일수록 장비빨이라도 있어야 한다.
어릴 때 롤러스케이트를 탔던 경험이 있어 그랬는지, 몇 번 돌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넘어지지 않고 아이스링크를 돌 수 있게 되었다. 다리가 아프다며 쉬고 싶어 하는 아이는 벤치에 앉히고 나는 몇 바퀴를 더 돌았다. -보고 있나 아들. 엄마의 멋진 모습을?
남자친구와 아이스링크장에 가는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6살 꼬마와 함께 한 스케이트도 행복했다. 곧 아이가 나를 따라잡아 나보다 키가 클 날이 올 것이고, 나보다 더 아는 것도 많아지고, 무엇보다 나보다 스케이트도 잘 타게 되겠지. 그날들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