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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테리 Jun 01. 2021

대타로 나섰으면 홈런 정도는 때려줘야지

새벽 2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보고 싶지 않은 시간.

난 피로를 털어내려 술 한잔을 더 따르고 앞에선 대표 형님이 해맑은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고 계신다. 할 수만 있다면 나를 복제해 대타로 앉혀놓고 집으로 도망가고만 싶다. 대표형은 음주 가무를 좋아했다. 거래처 접대라는 명목 하에 자주 술집을 드나들었지만 12시가 되면 거래처와의 술자리는 파하고 새롭게 술상이 차려졌다. 본인이 본인을 접대하는 2부가 시작되는 타임이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실 때마다 내일 늦게 출근하라며 특혜를 주시려 했지만 5분만 늦어도 한 마디씩 하시는 마음씨 좋은 상무님을 봐서라도 지각을 하면 안 되었다.


아침 7시… 전날 마신 술과 권장 수면 시간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수면으로 정말 이대로 시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를 복제할 수만 있다면 대신 출근시키고 이불 밖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않고 싶지만 나는 나를 대신할 수 없다. 그 점이 너무 치명적이다. 누군가를 내가 대신할 수 있고 누군가가 나를 대신할 수 있지만 스스로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래서 더 소중히 다뤄야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땅에 떨어진 자존감이 조금은 회복되는 느낌이다. 지금의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도 어쨌거나 대체 불가의 자원인 거니까…     


몇 년 전 회사를 다닐 때의 이야기다. 지금은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지만, 음주 강국인 우리나라는 마음만 먹으면 24시간 술을 마실 수 있었고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늦게까지 이어지는 술자리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대타를 내세우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다. ‘대타’는 사실 야구 용어인데 누군가를 대신에 기용되거나 출연 또는 투입되는 것을 통칭하여 쓰이고 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타의 황홀경을 목격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야구에서 한 점 뒤진 9회 말 투아웃에 대타로 등장해 역전 투런 홈런을 날린 선수, 축구에서 후반 교체출전으로 투입되어 인저리 타임 때 천금 같은 결승 골을 뽑아내는 선수(*1), 농구에서 후반 막판 투입되어 버저비터를 성공시키는 선수(*2)… 그런 드라마 같은 광경들이 펼쳐질 때마다 우리는 마치 우리의 일인 것처럼 신기할 정도로 감정이입되어 환호성을 지르곤 한다.    


대타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서자의 느낌이 있다. 1순위는 아니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칼을 가는 자에게 언젠가 거짓말처럼 주어지는 기회. 바로 그때 결정적 한 방을 보여줄 수 있는 포지셔닝이 대타의 자리이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드라마, 영화에서도 대타로 출연해 인생이 바뀌는 광경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목격해 왔다.

너무 잘 생겼지만, 딱히 대표작은 없던 청춘스타가 있다. 이미지 변신도 곧잘 시도했지만, 너무 잘생긴 얼굴에 늘 가려지는 느낌이 있었는데 영화 한 편으로 드디어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고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던 배우… 장동건 님(이하 존칭 생략)이다. 영화 ‘친구’의 동수는 원래는 배우 정준호에게 먼저 시나리오가 간 상태였는데 정준호가 ‘친구’ 대신 ‘사이렌’을 선택하며 장동건에게 기회가 갔다.. 장동건은 “내가 니 시다바리가?”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등의 명대사까지 남기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역시 한동안 남자들이 노래방만 가면 “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유리 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를 부르고 여자 친구가 쭈뼛쭈뼛하고 있으면 “ 왜 말을 못 해? 내가 니 남자 친구라고 왜 말을 못 해?” 하며 다그치게 만들었던 ‘파리의 연인’ ‘한기주’ 역할도 원래는 박신양은 3순위였고 배 용준과 이 정재의 고사로 기회를 잡았다고 한다. 지금은 대한, 민국, 만세의 아빠로 더 유명한 배우 송 일국 또한 한 재석의 대타로 ‘해신’이라는 드라마에 투입되면서 주연배우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고 배우 이영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드라마 ‘대장금’이지만 그녀는 사실 대장금의 6번째 후보였다고 한다. 김 현주, 송 윤아 등 다른 배우들이 연이어 고사하면서 이영애한테 기회가 왔다고 한다. 요즘은 심지어 온에어 되고 있는 작품들의 대타 투입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가장 최근 작품으로는 드라마 ‘달이 뜨는 강’에서 주연배우가 학폭 논란이 불거지자 가차 없이 배우를 교체하는 초강수를 두었는데 개인적으로 응원하는 나 인우 배우가 대타 캐스팅되어 주연배우로 열연을 펼쳤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주연배우의 음주운전으로 인해 도중하차하고 다른 배우가 긴급 투입되었는데 정말 “형이 거기서 왜 나와?”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배우 정 우성이 본인 회사 소속이었던 주연배우를 대신해 출연을 한 것이었다. 이미지가 너무 상반되어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지만 착한 시청자들은 별 항의 없이( 심리적 저항 수치는 꽤나 컸지만) 의도치 않은 안구 정화 타임을 누렸다.    


이렇게 잘만 하면 인생이 바뀌는 로또 같은 대타이지만 절대로 대타를 기용하면 안 되는 영역이 있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영역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잠시 부재한다고 해서, 혹은 다투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그 자리에 대타로 기용한다고 치자. 우리는 그런 사람을 일컬어 이렇게 부른다. “쓰레기” 혹은 “양아치” 사랑하는 사람이 잠시 잠깐 슬럼프가 찾아온다고 해서… 권태기라고 해서… 아니면 지어낼 수 있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고 해도 대타 기용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상도덕이요, 불문율이다. 사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대단한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나조차 나를 대신할 수 없는데 기꺼이 그것을 대신해 주겠다는 사람 아닌가? 그것이 슬픔이든 아픔이든 상관하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대신해 주겠다는 사람이 한 사람쯤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한 일인가? 만약 그런 사람이 지금 곁에서 원수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대타를 기용할 생각일랑 접어두고 아무 이유 없이 그윽한 눈으로 쓰담쓰담, 토닥토닥 한번 해주시길 바란다. 한 사람이 한 사람만 사랑해야 나 같은 사람에게도 기회가 올 테니까…     


나는 나를 대신할 수 없고 나를 대신해 줄 그 누군가도 없기에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나는 어제의 나를 대신해주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면 어제의 부족했던 나를 채워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제를 망쳤더라도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일 아침 나는 나를 대타로 기용한다.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음에 감사하면서… 대타로 기용되었으면 홈런쯤은 날려줘야 제맛이지만 사실 홈런을 날리지 못한다고 해도, 삼진으로 물러난다고 해도 대타 기용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는 증명된 것이다. 누군가를 대신해 투입되었다는 건 누군가가 나를 믿어준 흔적이니까…     


PS. *1. 지금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고 있는 올레 솔샤르가 선수 시절 후반 막판 투입되어 경기를 뒤집는 극장 골을 많이 선보였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동안의 암살자’이다.

*2 전설적인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 코트 안에 있을 때보다 벤치에서 대기할 때 상대 팀 선수들은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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