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Why not Cuba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icia Jul 12. 2020

지도와 손전화 없이 여행할 수 있을까

06. 작고 평화로운 마을, 비냘레스

결전의 날이 밝았다.


즉흥적인 데다가 계획 없이 다니는 걸 좋아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다니는 건 처음이었다. 난감했다. 그래도 오달리스 아주머니에게 곧 다시 오겠노라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 숙소를 나섰다. 열흘 정도 있다가 이곳으로 돌아와서 아바나를 더 둘러볼 참이었다. 아주머니는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카메라를 꼭 손에 쥐고 있으렴. 가방은 앞쪽으로 메고!"


오늘은 택시를 타기로 했다. 똑같은 실수를 범하면 안 되니까! 쿠바공영택시 기사를 붙잡고 비아술 터미널에 가는 비용을 물었다. 10쿡이란다. 역시 비싸군. 흥정해보겠다며 '무이 까로'(muy caro, 너무 비싸요)라고 말하며 6쿡을 불렀지만, 기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귀찮으니 그냥 탈까 고민하는 사이에 호객꾼이 다가왔다. 그는 한 올드카를 가리키며 6쿡이라고 말했다. 얼마 가지 못하고 도로 한복판에서 멈출 것 같은 상태의 차였다. 이걸 6쿡이나 달라고? 고개를 저으며 3쿡으로 깎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역시 실패. 그나마 조금 나은 상태의 올드카를 6쿡 주고 타기로 했다.


비아술 터미널 가는 길에 찰칵. 일부 올드카는 개조로 내부 부품을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올드카가 올드카가 아닌 셈.
하지만 내가 탔던 올드카는 엔진 소리부터 '나 안 고쳤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달리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낡았다. 고장 난 잠금장치가 보인다.


그래, 이게 쿠바지!


기사는 내 또래쯤 된 것 같았다. 차는 낡았지만 오디오 성능은 짱짱했다. 터미널 가는 내내 친숙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좋아하는 곡이 나올 때는 나도 모르게 "이 노래 좋죠!"라며 한국어로 말을 걸 뻔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오바마는 53년 만에 국교 정상화를 선언했다. 그 덕분일까. 미국 문화는 쿠바 젊은이들의 가슴에 빠르고 깊게 스며들고 있는 듯했다.


비냘레스행 비아술 안에 한국인 아니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것도 나뿐이었다. 괜히 불안해져서 옆자리에 뒀던 가방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버스는 한참을 달렸고, 아바나를 벗어나자 창밖으로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꿈에 그리던 쿠바의 모습과 비로소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게 쿠바지! 아바나의 매캐한 공기 안녕, 손전화 분실로 멘붕이었던 어제의 기억도 안녕.


비아술 터미널. 외국인 전용 시외버스라 여행자들뿐이다.
비아술은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한다고 한다. 2명의 운전기사가 교대하면서 버스 운행을 하는데 시속 80km를 넘지 않는다. 뒤쪽 좌석은 화장실 옆이라 악취가 나니 피하는 게 좋다.
아바나를 벗어나자 꿈에 그리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잠시 들른 휴게소에서. 한껏 포즈를 뽐내는 쿠바노.
비냘레스로 가는 길. 비냘레스가 있는 삐나르 델 리오는 커피, 사탕수수, 담배 재배로 유명하다.


비냘레스에 도착하니 까사를 홍보하기 위해 - 정확히는 손님을 잡기 위해 - 기다리고 있던 호객꾼들이 달라붙었다. 마침 내가 갔을 때가 쿠바 여행 비수기였는데, 이 시기에는 흔한 일이란다. 이것저것 다 챙겨주겠다는 이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오달리스 아주머니가 추천해주신 까사로 향했다. 손전화가 없어 걱정했지만, 까사는 다행히 메인도로인 살바도르 시스네로가에 있어 골목에 들어갈 필요 없이 한 방향으로 걷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도착하니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본 옆집 아주머니가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말씀하시더니 주인에게 전화를 해주셨다. 조금 기다리니 주인인 마리엘라가 다른 손님과 함께 나타났다. 방이 있냐 묻자 그녀는 잠시 기다려달라며 시원한 망고주스를 한 잔 건넸다. 쿠바에 도착했던 날부터 이유 없는 호의에 호되게 당했던지라 '그라띠스?'(gratis, 무료인가요?)라 물으며 무료인지 확인부터 했다.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켜니 한국에서는 맛본 적 없던 진한 망고향이 입안 가득히 퍼졌다.


다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혼이 쏙 나갈 정도.
마리엘라가 건넨 망고주스. 진하고 달고 맛있었다! 한국에서 먹었던 건 모두 가짜였어(...)


번역앱 없이도 괜찮아


주스를 마신 후 한참이 지났지만 마리엘라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함께 온 손님을 응대하느라 바쁜 것 같았다. 한국 같았으면 '아직 멀었어요?'라는 말부터 나왔을 거다. 하지만 여기는 쿠바잖아?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리엘라와 그녀의 남편이 다가오더니 '방이 없다'고 했다. 나는 3일을 묵길 원하는데, 예약 때문에 2박만 가능하단다. 그리고 다른 까사를 소개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여담이지만,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Do you understand?"라는 문장을 여러 번 들었다. 후, 영어 공부 좀 열심히 할걸.)


소개받은 곳은 마리엘라에 의하면 그녀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까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렇게 말만 할 뿐, 아닌 경우도 많다더라) 그녀의 아버지가 몰고 온 스쿠터를 타고 까사로 향했다. 도착해 방을 살펴보니 깔끔하고 넓었다. 1박에 20쿡이라 비용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짧은 영어로 묵고 싶다고 말했으나, 아뿔싸.. 주인 내외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라 알아듣지 못했다. 스페인어 회화책을 뒤져가며 대화를 시도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들의 말을 이해해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대화가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아! 손전화가 있었더라면! 주인 할머니는 아침 식사가 5쿡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내일과 모레, 그러니까 2번 먹겠다는 의미로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내가 2쿡이라고 이해한 줄 알고 '씬꼬!'(cinco, 5)만 반복하셨다. 종이에 적어가면서까지 대화를 시도했으나, 할머니의 노안으로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핑크색 외관이 딱 내 취향인 까사 히라솔.
3박 4일간 묵었던 방과 화장실. 숙소 근처에 밭과 축사가 있어서 벌레가 많다는 것 빼놓고서는 괜찮았던 곳이다. 변기에 뚜껑도 있었고! (쿠바 변기에는 대부분 뚜껑이 없다고 한다)


답답함의 연속이었지만 우리는 계속 웃었다. 각자만의 안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구 반대편 낯선 땅에서 몸을 뉘일 공간을 찾았다는 나의 안도감, 비수기에 손님을 맞은 할머니의 안도감이 그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만 던지다가, 할머니가 더는 안 되겠다 싶으셨는지 어딘가에 전화를 거셨다. 잠시 후 도착한 한 여자분이 할머니와 나 사이에서 영어와 스페인어로 통역을 해주셨다. 우선 내일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모레 아침식사 여부는 내일 알려주는 것으로 정리했다.


아바나와 마찬가지로 비냘레스 입성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래도 지도와 손전화 없이 무사히 지금까지 왔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게다가 까사 식구들은 모두 다정다감하고 친절했다. 여장을 풀고 저녁 식사를 위해 중심가로 나섰다. 숙소를 찾는 것에 정신이 팔려 보지 못했던 마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오후의 비냘레스. 작고 평화로운 동네다. 그래서 맘에 더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작하기도 전에 꼬여버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