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여행기
든든히 밥을 먹고 제일 처음 목적지는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 린덴호프 (Lindenhof). 식사를 한 곳에서 15분 정도 걷다 보니 린덴호프 표지판이 나왔다. 쭉 따라 올라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취리히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착해 공원에 발을 딛는 순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진짜 이곳에 온 게 맞아? 스위스가 맞아? 이거 내가 드라마에서 본 건데, 저 성당 맞는데!' 벅차고 감격스럽던 그 순간을 마음껏 누리며 사진과 영상을 찍고 또 찍었다. 이번 여행기간 동안 다시 이곳을 오지 못할 것이고 다시 언제 올지 모르니까. 담을 수 있다면 공기까지 다 담아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찍고, 또 찍고, 찍었다.
그리고 벽돌에 걸터 가만히 앉아 건너편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들, 강가 주변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 도심을 가로 지르는 전철, 화려한 시계탑과(스위스가 시계의 나라라는 걸, 롤렉스가 스위스 거라는 걸 이번 여행을 통해서 알았다). 성당 건축물을 구경하고서는 다시 도심으로 내려왔다.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취리히에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였기에 두세 시간이고 있을 수 없었다. 다른 곳을 보고 시간이 남으면 다시 오면 돼!라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린덴호프를 그곳을 떠나 반대편 성당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나는 건축물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린덴호프에서 바라본 건축물이 너무 아름다워서, 마치 열두 제자와 예수님이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어서, 그 강렬한 이끌림에 몇 군데를 들렀다. 성당 내부는 스테인글라스로 채워져 있었고(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꽃보다 할배의 유럽편에서 봤던 수많은 건축물들이 보여준 성당 내부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성당만 한 두세 군데를 다녀왔는데 세 곳 모두 비슷비슷해서 특별히 감동을 받거나 감상에 젖지는 않았다. 하나 마음속으로 기도한 게 있다면, '주님 무사히 이곳까지 오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정도였을까. 궁금했던 성당을 모두 다녀간 이후로부터는 목적지 없이 걸었다. 걷고 걷고 걷다가 또 어디 갈 곳이 없나 하는 마음에 구글 맵을 펼쳤고, 근처 '리마트강'이라는 곳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향했다. 자연의 나라에 왔는데 또 어떤 강을 보여줄까 궁금했고 강가에 공원이라도 있으면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취리히에 오전 10시에 도착하자마자 4시간 정도 일정을 보낸 후였다). 그런데 웬걸. 처음 마주한 강가의 풍경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만년설이라니. 만녈설이라니! 미친 거 아니야? 미쳤네? 아니 저게 뭐야? 를 수십 번 외쳤다. 너무 감격스러운 마음에, 비로소 내가 마주하고 싶던 풍경을 마주했다는 기쁨에 카메라 셔터를 거침없이 눌렀다. 강가 바로 뒤에는 강가를 바라볼 수 있는 공원과 벤치가 있었고 먼저 도착한 이들이 이 풍경을 보며 감상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스위스의 만년설을 처음 눈으로 담는 순간. 너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는데 눈물이 나지 않는 내 눈알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너무나 행복했다. 올해 1월, 나에게 모든 의무감과 해방감으로부터 떠날 자유를 주겠다고 마음을 먹고 티켓을 끊은 순간부터 무엇인가 기대를 했지만 이건 내 예상에 전혀 없었다. 첫날부터 이런 풍경을 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무엇보다 좀 전까지만 해도 흐렸던 하늘이 거짓말 같이 맑아지면서 저 푸른 하늘과 햇볕을 쬐고 있었고 그 햇살을 받은 공원과 강물은 아주 반짝거리고 있었다. 17시간의 비행의 피곤함이 한꺼번에, 아니 1월부터 지금까지 이 모든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든 모든 피곤함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이 말도 안 되는 풍경 앞에서 한 시간쯤 머물렀을까. 루체른으로 출발하는 기차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락커룸이용 시간도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출발 시간을 한 시간 미루고, 락커룸 추가 비용을 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원래대로 내 계획을 밀고 나갈 것인가. 그리고 물었다. '너 여기 다시 올 거야? 언제 올 수 있어?' 마음속으로는 다시 무조건 올 거라고 다짐했지만 그건 너무 먼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데 1시간 정도 미뤄지는 것과 추가 비용을 더 내는 게 뭐가 중요하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오래 고민할 거리가 아니였다. 그래서 나는 나의 계획을 버렸다. 보고 싶은 만큼 보고 출발한다로. 그렇게 기차역으로 가던 발걸음을 다시 돌려 리마트 강가 주변으로 돌아와 조금 더 걷고 담고 찍고 누리다 아까 전에 다시 오겠다던 린덴호프로 향했다. 날이 흐릴 때 남긴 사진이 너무 아쉬워서 맑은 날씨에 다시 찍고 싶었고, 기억하고 싶었고, 기록하고 싶었다.
다시 돌아가 선명한 하늘에 저 멀리 보이는 만 녀 설 풍경까지 다시 담고서는 '이걸로 족하다'라고 속으로 외쳤다. 그래 이거지, 이거야. 현빈과 손예진도 맑을 때 걸었잖아!라고 외치며 이제는 더 이상 취리히에 미련이 없다는 듯 기차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계획을 바꾼 나, 너무나 칭찬해.
단 하루만 허락된 취리히 여행이었고, 아무 계획이 없이 떨어진 도시였지만 그저 걷는 것 자체로 여행이었다. 무엇보다 아침에만 해도 흐렸던 날씨가 거짓말처럼 맑아져 아름다운 스위스 도심을 만끽했고, 아침만 해도 내 계획에 전혀 포함되지 않았던 리마트강을 만나 만년설과 첫인사를 하고, 공원과 벤치, 테라스에 앉아 일상을 즐기던 사람들을 보며 함께 행복해졌다. 행복해지려면 행복한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온몸으로 체감되는 스위스에서의 첫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