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여행기
취리히를 떠나 루체른으로 출발. 말로만 듣던 스위스 기차 풍경을 마음껏 구경하다 보니 2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루체른 역에 내려 숙소까지는 버스로 10분, 걸어서 20분. 오전 10시에 취리히 도착하자마자 8시간을 쉬지 않고 걷고 나니 종아리가 퉁퉁 부었고, 23킬로가 넘는 캐리어를 끌고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아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서 내려 높은 언덕을 오르니 영화에서나 보던 멋진 주택이, 사진에서만 보던 바로 그 숙소가 눈앞에 보였다(숙소를 잘 잡았다는 느낌이 왔다).
이곳은 부부가 사는 집이었는데, 스위스에서 유명한 음악가였는지 뮤지컬 배우였던 것 같다. 방 곳곳에 공연장에서 찍은 집주인의 사진과, 신문이 붙여져 있었다. 음악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전축과 LP, 바닥에 쌓여있는 CD까지 음악을 좋아하는 부부인 건 틀림이 없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왠지 나와 어울리는 공간을 찾은 것 같아 뿌듯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인사를 나누고, 방을 안내받고 짐을 풀고는 지친 피로를 풀고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하, 살 것 같다'말이 저절로 나왔다. 개운하게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나는 바로 침대로... 가려다가,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 왜냐고? 언덕 아래 호수가 있었는데 그 호수 맞은편에는 만년설 뷰가 있었던 것(숙소를 구할 때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물론 이미 녹초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푹 쉬고 내일 봐도 된다. 그런데 하루에 사계절을 맛 보여주는 5월의 스위스의 내일 날씨가 맑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였기에 '지금, 여기'서의 순간을 붙잡기로 한 거다. 조금 피곤해도, 봐야 했다.
숙소에서 3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공원 옆으로는 잔잔한 강이 흐르고 저 멀리 만년설이 보였다. 공원 근처엔 레스토랑과 젤라토 가게, 카페가 줄지어 있었다. 그곳에서 누군가는 러닝을 하고, 누구는 벤치에 앉아 강가를 바라보며 하루의 끝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저녁 8시 30분이 되어도 밝아서 하루가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그 덕분에 하루가 아쉬운 나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누릴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점점 어둑어둑해지고 하늘은 주황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가는 그때, 눈앞에 펼쳐진 낭만적인 풍경을 담기 위해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사진으로, 영상으로 담고 담고 또 담았다. 그리고 초코맛 젤라토를 하나 사서 베어 먹고는 '이게 스위스의 초콜릿의 위엄인가'하며 또 감탄하며 벤치에 앉아서 떠나오길 잘했다고 수십 번 나 자신을 칭찬했다. 그리고선 다음 날 있을 힘든 일정을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불을 끄고 포근한 이불 속에 들어간 게 9시 30분경이었는데 눕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니 새벽 6시였다(시차를 하루 만에 극복한 셈이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밤이 너무 아쉬웠지만 눈을 떴는데 스위스라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실감이 날 법한데 여전히 꿈같았다. 눈을 떠서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데 테라스 밖으로 새소리가 들렸다. 자연의 나라라더니, 새소리가 날 깨우다니. 새소리를 들으려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어제 보았던 그 만년설 호수가 저 멀리 어렴풋이 보였다. 아직 꺼지지 않은 가로등 불빛에 선명히 들려오는 새소리, 건너편 만년설까지 바라보고 있자니 그 순간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어떤 그 누구도 부럽지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있을 일정을 기대하고, 고대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