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여행기
스위스 여행 이틀차의 목적지는 루체른에서 꼭 가봐야 하는 명소로 손꼽히는 리기산. 새벽 6시 30분에 눈이 떠진 나는 어젯밤 널어놓은 짐과 잠자리를 정리하고, 테라스에서 일기를 썼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도 7시 30분. 여유롭게 나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마침 비가 오는 일요일. 루체른의 풍경은 거리는 한적하고 고요했다. 그래도 좋았다. 왜냐고? 여기는 스위스니까.
그날 아침 일찍 도착한 나는 스타벅스에의 첫 손님이었다. 직원과 인사를 나누고 커피 한잔과 베이글을 하나 시켰더니 약 2만 원이 나왔네 내 눈을 의심했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왜냐고? 여기는 스위스니까. 말로만 듣던 사악한 물가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고픈 배를 채우고 있던 찰나 찰나 스위스에서 한평생을 살아온 한 여성분이 맞은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피 한잔을 하시며 나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스위스 여행은 어떤지 묻기 시작했다. 스위스는 어제 왔고, 너무 오고 싶었던 곳에 너무너무 기쁘며, 아쉽게도 연차를 쓰고 온 것이라고 말했다. 본인도 젊었을 때 유럽 배낭여행을 했는데 너무 좋았다고, 다음에 꼭 해보라는 말을 남겼다. 언젠가 꼭 가보겠다는 답과 함께, 스위스의 이 변덕스러운 날씨를 감안해서 오늘 구름이 걷힐 것 같냐고 물었다. 모든 게 괜찮았지만 그렇다고 흐린 날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다행히도, "날씨가 어떻든 리기산은 지대가 높으니 그곳엔 해가 보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크루즈를 가면 풍경이 호숫가에 반사되는 것도 꽤 멋저요"라고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 그래 계획을 당장 바꾼다고 해도 다른 곳도 비가 오는 건 마찬가지였고, 내가 믿을 건 오후에는 햇볕 표시가 떠 있는 스위스 날씨 앱과 '어떤 풍경이라도 좋을 거라는 현지인의 말 한마디뿐이었다.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다 10시쯤 되어 리기산으로 향하는 크루즈를 타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크루즈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고, 안심했다. 그래 나만 이 무모한 도전을 하는 건 아니구나 싶어서. 크스위스에서 크루즈를 타다니. 크루즈를 타고 만년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니. 기대하는 마음으로 타이타닉처럼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크루츠 내부로 들어가 창가자리를 잡고서는 계속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영상 촬영 버튼을 눌렀다. 크루즈는 출발했고, 모험은 시작됐다. 크루즈가 강을 지르며 갈 때 루체른의 건축물과 압도적인 크기의 설산이 가까워졌다. 이토록 비현실 적일 수가 있을까.
40분가량 이동하며 이미 휴대폰 배터리는 30프로가 줄어들었다(그만큼 찍고 담았다는 이야기다, 보조 배터리 하나 믿고). 드디어 리기산으로 가는 기차역 근처에 도착했다. 바깥 풍경을 보기 위해서는 오르는 방향으로 특정방향으로 앉아야 한다는 얘기를 모두 알고 있었던 건가. 사람들이 내리자마자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기차역으로 우르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후 귀찮아' 하면서 걷다가, '여기까지 와서 절벽만 보기엔 아깝긴 하겠는데?'싶은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걸어 다행히도 좋은 좌석에 착석 완료. 지대가 높아질수록 크루즈를 타며 건너온 호숫가와 저 멀리 높은 산들이 한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아름답고, 광활하고, 푸르른 초원과 만년설을 보고 있다니. 꿈이야! 수십 번을 되물었다.
오르고 올라 도착한 리기산 정상은 아쉽게도 구름이 많았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리기산에 올라 바라본 스위스 전경은 날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기차에서 내려 뒤돌아 보았을 때 보였던 그 풍경은 눈으로 덮인 설산, 푸른 숲, 곧게 뻗은 나무들까지.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을 읽고 한참을 쳐다봤다.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다행히도 서서히 걷히는 구름에 갑자기 에너지가 솟구쳤다. 긴 비행에 도착하자마자 8시간을 걷고, 이른 저녁 잠들고 이른 새벽에 깨서 정신이 몽롱하고, 피곤이 쌓여있는 상태였는데 없던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오늘 나는 이곳에서 시간을 다 쓰겠어. 이곳에서 아쉬울 것 없이 시간을 써버리겠어!'라고 마음을 먹고 리기산 전망대를 포함해 이곳과 저곳을 넘나들며 담을 수 있는 모든 풍경을 담았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올라오며 봤던 하이킹을 걷기로 결정. 이 멋진 풍경을 천천히 음미하며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의지였다.
자연을 좋아한다고 말로는 부족할 만큼 하늘과 산, 노을과 바다를 좋아하는 나에게 스위스 풍경을 배경으로 걷는 건 너무 신나는 일이었고, 마음만 굳게 먹으면 될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 하루는 온전히 나의 것이었고 내가 원하는 대로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걷고 싶은 만큼만 걸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채근하지 않고, 걷다가 힘들면 멈춰서 쉬어가면 되는 거였다.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가 또다시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걷는 것만이 그날의 나의 의무였다.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자연 앞에서 최근 몇 년간 느껴보지 못한 해방감을 느꼈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인 건가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여행처럼'살아가자고 말하지만, 나는 여행을 하면 할수록 여행은 여행이고 일상은 일상이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일상을 여행처럼 살기는 쉽지 않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얼마 없다. 때로는 하기 싫은 걸 해야 하고, 혼자이고 싶을 때에 마저도 함께여야 하는 순간들이 많은데, 여행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오롯이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면 되는 일들 투성이었다. 온전히 내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가는 감각이 이토록이나 소중하다는 걸, 여행을 떠나서야 온몸으로 체감한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계속 걸었다. 머릿속은 개운해지고 몸도 걸을수록 가벼워졌다. 걸으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더 아름다웠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은 생각에 빠져 들려고 하면 저 멀리 멋진 풍경이 "너 뭐 하니 지금? 이거 봐야지! 여기까지 와서 무슨 생각이야! 일단 지금을 즐겨! 이거 보라고!"라며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그래서 나는 이번 여행에 남긴 기록이 많이 없다. 풍경을 보고 하루를 온전히 누리느라 매일 곯아떨어져 일기를 쓰지 못했다. 핑계 아님).
그렇게 두 시간 남짓 걸어 리기산 중턱 기차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 여정을 지나며 걷고 걷는 것만 계속하는 스위스 여행을 꿈꿨다. 걷기만 해도 좋은 여행지라면 이만한 곳이 있을까 하면서. 스위스에 있으면서 스위스에 다시 떠나오는 목표를 세웠다. 언젠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 꿈은 머지않아 실현될 것 같다. 좋으면 백면이고 또 찾고 찾는 나에게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다(스위스 항공도 생겼겠다. 하고자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둘째 날 8시간의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