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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수 Jul 26. 2019

<내리막세상에서일하는노마드를위한안내서>

제현주 님의 책을 읽고



인간의 활동은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노동은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사냥하거나 농사를 짓는 필수적인 활동이고, 작업은 어떤 목적을 위해 인공물을 만들어 내는 일이며, 행위는 생각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이러한 의미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다. 우리말의 ‘짓는다’는 표현도 같은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농사를 짓고, 건물을 짓고, 글을 짓는다고 하니까. 


그런데, 화폐로 일의 가치를 매기기 시작한 이후로 인간의 모든 일은 노동이 되었다. 현대의 대다수 인간은 일의 대가로 돈을 받거나 벌고 그것을 통해서만 욕구를 채울 수 있다. 돈으로 환산되지 못하는 일은 어리석거나 남 좋은 일만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노동을 하는 직장은 가족이 의미를 잃어버린 시대에 공동체의 역할을 한다. 가족은 아침마다 일터나 학교로 떠났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모여 얘기를 나누지만 어떤 일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직장을 잃어버리면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해 주는 공동체를 잃어버린 것 같다. 


문제는 일과 직장이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거다. 취업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는 청년들이 취업 후에는 다른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지만 돈만 바라진 않는다. 배움과 성장 같은 의미를 찾기도 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 순간 나는 내 일의 대가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시간을 판 대가, 즉 내 자유의 일정 부분을 포기한 대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직장에 다니는 우리 대부분은 9시부터 6시까지 또는 그 비슷한 시간대에 하루 8시간을 일한다. 일이 없더라도 그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장소에 내 몸을 가져다 둬야 한다. 우리는 일한 대가로 급여를 받는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사실들이 많다. 해야 하는 일을 내가 정하지 못하고 일의 끝도 내가 정하지 못한다. 내 몸의 자유와 일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모두 빼앗긴 채 일하고 있다. 승진을 해서 높은 자리에 가더라도 큰 차이가 없다. 그게 싫어서 직장을 떠난 사람들 대부분은 이렇게 말한다. “상사들 중에는 물론 훌륭한 사람, 존경할 만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처럼 되고 싶다거나 그들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일에 대한 자유는 아니더라도 일하는 방식의 자유는 주어져야 마땅하다. 그것이 개인의 차이를 인정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개인의 자율이 조직의 힘을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차이는 무시되었다. 그런 방식의 가장 잘못된 부분은 결국 개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 아닌 것처럼 느끼도록 했다는 점이다. 가장 창의적으로 일하고 가장 스마트하게 일해야 하는 사람들조차 스스로를 삶의 주인이라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크게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불합리함을 견뎌내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이 자신의 노동을 견디게 하는 동력은 여러 가지가 있다. 사회로부터 배제 또는 빈곤이라는 공포가 있고, 땀 흘려 먹을 것을 일군다는 윤리적 의미도 있다. 누군가는 언젠가 이 일에서 벗어나리라는 기대를 갖고 살아간다. 자신의 역량이 하루하루 성장하는 기쁨이 동력이 되기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하면서도 거리두기’다. 일에 대해 필요한 거리는 연인 사이에 필요한 거리와 다르지 않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첫 직장을 선택하게 된다. 설레는 마음을 갖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마주한다. 하지만,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몸과 마음이 조금씩 상처를 입으며 알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직장, 일,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쌓여간다. 일과 직장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불만도 많아지고 내가 왜 이런 현실을 알지 못했던가 하는 자괴감도 생긴다. 내가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면 허무함도 밀려온다. 다른 사람들에게 번듯하고 대우가 좋을수록 고민은 깊어진다. 이제 와서 내가 어떤 일을 원하는 건지, 무엇을 얼마나 포기하고 다른 일을 선택할 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이들은 일을 좋아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허상으로 생각한다. 일을 통해 기여하는 만큼 돈을 받는 것이고 힘들고 상처 받는 대가로 얻는 것이다. 그들은 일을 향한 열정을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일을 통해 자아실현하려는 욕구가 마치 명품 가방을 쇼핑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높이려 하는 것과 유사하다 여긴다. 일에 대한 애정이 결국 나를 배신할 것임을 안다. “일이 곧 직장일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에 배신당한다.” 직장에서 우리는 언제 얼마나 어떻게 일할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직장에서 떨어져 나오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어떤 경우든 이제 우리는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기회를 늘리고 리스크를 줄여가는 방식으로” 커리어를 관리해야 한다. 이제는 일을 연인처럼 생각하지만 말고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일 자체가 아니라 일하는 조건과 대가를 잘 살펴야 한다. 일하는 동안은 마음껏 사랑하더라도 그 일이 아니더라도 의미 있는 일,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을 또 찾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이 무익하듯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는 조언도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땅의 많은 청년들이 대기업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하길 원한다. 그들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게다가, 어른들은 연봉의 크기로 직업의 가치를 말한다. 그러니 대기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대기업에 취업하길 원하는 그들은 대기업 직원의 일상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연봉이 많을수록 복지가 다양할수록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대가로 무엇을 치러야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대기업에서 출발하느냐 아니냐가 평생 벌어들일 소득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기에 감히 눈높이를 낮추라고 말하기 어렵다. 계약직으로 출발하면 대기업의 60-70% 수준밖에 받지 못하고 대기업으로 이직할 수 있는 기회도 거의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려면 세상의 눈높이가 아니라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세상의 우선순위에 내 삶을 맡겨 버리는 순간부터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을 다들 강조한다. 사랑이 결혼이 되면 현실이 되는 것처럼 일도 마찬가지다. 일은 좋은데 일에 따르는 조건이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고, 언제나 좋은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진짜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하라는 말도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힘든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다. 내가 세상 누구보다 잘하고 좋아하는 어떤 재능을 갖고 태어났는데 그게 무엇인지 찾아낼 수 없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의 적고 많음과 상관없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난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우리가 받아온 교육 과정은 그 재능을 찾는데 최적화된 과정은 아니었다. 국영수부터 예체능까지 다양한 교육을 받았지만 시험을 통해 점수를 얻는 방법만을 체득했을 뿐이다. 그래서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지만 즐기는 방법을 배우진 못했다. 


그래서, 직장 생활을 몇 년 해본 이후에야 일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게 아닌지 두렵다. 그런데, 세상을 알게 되고 나를 알게 되는 시점에 늦는다는 게 있을까? 좋게 생각하면 죽기 전에 천명을 알게 되고 거기에 나의 모든 걸 쏟아부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어차피 한 가지 재능으로 평생을 먹고살던 시대는 지났다. 100세 시대를 살아야 하고 긴 시간을 일로 채워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내가 좋아하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좋든 싫든 “무슨 일을 하세요?”라는 질문은 “당신은 누구세요?”라는 의미다. 당신의 일은 당신을 설명한다.”


요즘처럼 청년 실업률이 높고 이직도 많아진 때에는 돈벌이가 아닌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일이 자신에게든 사회에게든 어떤 가치를 만들어낸다면 그건 나름 의미가 있다.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한계가 있고 일자리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결국 “일자리를 차지한 이는 지키기 위해 고달프고 차지하지 못한 이는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사회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우리에겐 새로운 일의 정의가 필요하다.”


만화를 보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일자리를 잃은 백수가 방구석에서 만화를 보는 모습은 사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잉여의 모습이다. 하지만, 어제까지 몇 달간 중요한 프로젝트를 마치고 휴가를 낸 리더에게 만화 보기는 새로운 일을 위한 충전의 시간이다. 또한, 새로운 영화를 찍기 위한 소재를 만화 속에서 찾고 있는 감독에게는 일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만화 보기는 일이라기보다 놀이에 가깝지만 이렇듯 가치 있는 일을 위한 충전과 준비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일을 둘러싼 근본적인 고민은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이 부여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일로 나를 설명하고 싶지 않은데, 세상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느냐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더군다나, 임금으로 환산되지 못하는 일은 그 가치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일하는 이 스스로 의미 있는 일이라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 규정한 일이기에 자유롭지만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부담도 짊어지게 된다.



투자나 사업에서 포트폴리오가 중요하듯이 우리 삶에도 이젠 포트폴리오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의 재능도 시간 축으로 놓고 보면 어릴 때 잘하는 것과 나이가 들면서 잘하는 것이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예체능과 관련된 분야는 쉽게 재능을 발견하여 어릴 때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음악과 미술은 평생 할 수 있지만 운동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계속할 수가 없다. 직장인들의 수명도 많이 짧아졌다. 


그렇다면 현재의 일에 가진 시간과 자원을 100% 투입하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 최소의 시간을 재능이 있는 다른 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투입하면서 경험과 역량을 쌓아가야 한다. 시대에 따라 시장이 요구하는 일의 성격이 달라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누구와도 유연하게 소통하며 함께 일을 해내는 역량은 미래에 필수적인 역량이다. 현재의 일에 바로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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