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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수 Aug 22. 2019

자유를 향한 열정

조르바 vs. 조나단


조르바와 조나단은 내게 자유롭게 살라 했다. 하지만 자유를 찾아가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갈매기 조나단>은 자신의 날개를 찾아 자유롭게 날아가라고 한다. 사춘기 시절부터 힘들 때마다 내게도 날개가 있음을, 날아갈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힘들 때마다 그 사실을 내게 얘기하며 힘을 북돋워주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세상 누구보다 생생한 삶을 살았던 한 인간의 이야기다. 그는 언제나 본능에 충실했고 주저함이 없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 자신이 가진 육체의 생명력을 느끼며 살아가는 충만함이 있다. 그의 몸과 영혼은 결코 따로 노는 일이 없었다. 


두 책을 읽으면 누구든 조나단이나 조르바처럼 살고 싶다는 꿈을 가진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사회와 조직의 강한 결속력에 얽매인 한국인들이 추구하기 어려운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조나단은 자신의 재능을 일찍 찾아 거기에 몰입했다는 면에서 행운아다. 젊은 날의 우리는 자신이 가진 날개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무엇을 잘할 수 있고 무엇으로 삶을 채워가야 하는지 모른다. 분명 나에게도 어떤 재능이 있는 것 같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자신이 진짜 가진 것이 무엇이고 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방황한다. 


방황의 시간을 지날 때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날개를 찾아 나선다. 친구와 대화하고 책을 읽고 선배에게 묻는다. 많은 시간을 헤매어도 분명한 답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DNA 속에는 온갖 어려운 환경과 상황을 이겨온 선배들의 삶이 담겨 있다. 그 강인한 생명력이 녹아 있다. 수십 억년의 시간을 넘어온 생명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만 남겨준 개성과 재능이 있다.


자신에게 삶의 기쁨을 안겨줄 자신만의 날개를 찾기에 적극적인 사람들도 있지만 주어진 환경에 따라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운 좋게 자신의 재능을 빨리 발견할 수도 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마주한 삶의 현실이 내가 어쩔 수 없을 만큼 냉혹할 수도 있다. 씨앗이 바람에 날려가다 좋은 흙에 떨어지고 물과 햇빛을 만나 싹을 틔울 수도 있지만, 척박한 땅에 떨어지면 그냥 메말라 사라져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굳이 큰 재능과 좋은 환경을 만나지 못해도 하루하루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지도 모른다. 


조나단은 자신의 내면에 새겨진 비행에 대한 갈망을 어릴 때부터 알아챈다. 스스로 비행을 터득하며 성장한다. 그리고, 갈매기 무리 중 누군가가 자신처럼 ‘날기를 원한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를 돕지 않을 수 없다. 플레처가 “날고 싶다”라고 외칠 때 얼마나 그걸 원하는지 조나단은 이해한다. 혼자 외로운 비행을 하며 비행의 참 맛과 의미를 배웠기 때문이다.



조르바는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다. 조나단은 갈매기로서의 본능보다 순수한 비행을 통해 자유를 얻었지만, 조르바는 오히려 육체적인 본능에 충실함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조르바에게 삶은 육체다. 

“육체에는 영혼이란 게 있습니다. 그걸 가엾게 여겨야지요. 육체에 먹을 것을 좀 줘요. 뭘 좀 먹이셔야지요.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것이오!” 매일 저녁 맘껏 먹고 마신다. 먼저 배를 채워놓고 그다음에 생각해 보자고 두목을 보챈다. 


‘부처’의 철학에 빠져 육신의 쾌락을 업신여겨 왔던 나(두목)는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조르바의 말에 생각이 바뀐다. 식욕은 성욕과도 통하는 법이다. 맛있게 먹다 보면 늙은 암탉이 수작을 걸어올 꺼라며 자신은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먹고 마시며 과부를 유혹한다. 


조르바는 여인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 두목을 향해, “여자는 당신을 전혀 좋아하지 않을 수 있고, 당신이 여자에게 입맛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건 문제가 안 됩니다. 여자를 보는 남자는 모두가 여자를 갖고 싶다고 말해야 해요. 여자란 가엾게도 그걸 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남자라면 여자에게 그렇게 말하고 기쁘게 해줘야 해요.”라고 말한다.


세상은 항상 그대로인데 머리로만 이해한 자들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다고 한탄한다. 주어진 삶을 선물처럼 기쁘게 살아내지 못하고 분석하고 해석하여 쪼개어 버린다. 그들에게 삶은 하나의 완전체가 아니다. 그런 인생을 돌아보면 미적지근하고 모순과 주저로 점철되어 있다. 허망함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조르바에겐 하느님과 광산, 그리고 과부가 머릿속에서 아무런 모순 없이 조화롭다.




조르바와 조나단, 어느 쪽이 진짜 자유일까? 하지만 이렇게 묻는 것은 우리가 조르바나 조나단과 마치 동일한 존재인 것처럼 전제를 둔 거다. 동물이라는 공통점을 말할 순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다른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 살아가는 환경도 다르다. 그러니 다르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조르바나 조나단의 삶은 그들 자신에게 자유로운 삶이다. 어느 쪽이 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우리의 삶이 그들과 같을 순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 생각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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