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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수 Aug 26. 2019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읽고


대기업에서 전략기획 업무를 담당하며 잘 나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끊임없는 스트레스와 문득문득 찾아오는 허무함이 내게 경고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애써 무시했다. 새롭게 배우고 성장하고 인정받는다는 사실로 인해 문제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내 속의 난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계속 외치고 있었는데 난 그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 번-아웃될 정도로 일에 몰두하다 허무함이 찾아왔다. 상담을 하면서 시지프스의 신화가 생각났다. 높은 산으로 바윗돌을 굴려 올려야 하는 어려운 과업을 맡았지만 올림과 동시에 돌이 굴러 떨어져 다시 처음부터 바윗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악몽 같은 이야기 말이다.


삶이 흥미로운 건 의외의 곳에서 보물 같은 진실을 발견한다는 거다. 20년간 수 없이 썼던 회의록과 각종 보고서, 설명 자료 등을 만들면서 나를 표현하는 글쓰기가 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기에 생각나는 것을 쏟아내었다. 그러다 내가 경험하고 배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 보면 부끄럽기만 한 책이 2017년 초 세상에 나왔다.



“세상에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좋은 게임이 수없이 많다. 좋은 게임이란 내 소질과 능력에 맞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끌며,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조금씩 성장시키는 게임이다.(법칙 4. 당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당신 하고만 비교하라)


어릴 때는 자신이 어떤 재능과 자질을 갖고 태어났는지 알 수 없다. 경험이 부족하고 개성이 뚜렷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가치관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생각과 판단의 기준이 필요하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역할이 크다. 


많은 경우 친구와 비교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판단하기도 한다. 남들보다 피아노를 잘 치거나 수학을 잘하는 친구를 보면 왠지 인생의 출발부터 뒤쳐진 느낌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면 자신만의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통해 자신이 가진 재능과 자질을 발견해 간다.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하고 경제적인 독립도 필요하다. 그런 책임과 필요에 의해 자신에게 맞는 “좋은 게임”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 그런 삶을 살다 보면 언젠가 다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금의 내가 과연 최선의 나인지.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지고 남들보다는 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수록 그 질문은 뒤늦게 뒤통수를 때린다.



“경험의 세계에는 3가지 원초적 구성 요소가 있다. 그중 하나가 혼돈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질서, 마지막 하나는 혼돈과 질서를 중재하는 과정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의식(Consciousness)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혼돈과 질서에 영원히 예속된 까닭에 존재의 정당성에 의혹을 품고, 절망에 빠지며, 우리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법칙 2. 당신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하라.)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해낸다. 에덴동산은 신의 의도에 따라 질서가 유지되는 곳이고, 이 에덴에서의 삶을 누리는 인간도 평온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난다. 에덴 밖의 땅은 미지의 영역이자 혹독한 생존 경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신의 영역 밖으로 나와 자유를 얻지만 그 자유는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야 하는 “무시무시한 자유”다. 


이러한 과정을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보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의 뇌는 태초로부터 오랜 시간 진화하여 어느 순간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그 존재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인간이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한 남성은 다른 남성과 협력과 경쟁의 과정에서 계급 사회를 구성하게 되고 여성과의 만남을 통해 자식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 판단하는 “사회적 뇌”를 갖게 된다. 사회적 뇌는 남성과 여성을 먼저 구분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질서와 혼돈을 인식하도록 발달한다. 예를 들어, 남성의 계급사회는 질서이고 여성의 생명 잉태 능력은 다양한 가능성과 신비로움을 가진 혼돈이다.


같은 방식으로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해서도 구분하기 시작한다. 에덴동산에서는 악으로 상징되는 뱀이 나타나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한다. 그것을 먹은 여자는 눈이 밝아져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깨닫는다. 또한, 여자는 남자에게 그 과일을 먹도록 하여 결국 질서 있는 세상에서 쫓겨나 혼돈의 세상으로 던져진다. 인간은 선과 악을 구분함과 동시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결국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혼돈과 질서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주어진 자연환경 속에서 서로 협력하여 사냥을 하고 고기를 나눠먹는 과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자연환경은 언제나 변화하여 예측하기 어려운 혼돈의 영역이고, 인간이 서로 일을 나누어 협력하고 고기를 나눠 먹는 일은 질서의 영역이다. 혼돈과 질서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한 발은 질서와 안전의 세계에, 다른 한 발은 새로운 가능성과 혼돈의 세계에 서 있어야 새로운 일이 가능해진다. 즉, 둘 사이의 경계에서 균형을 잡으며 생존 방식과 삶의 의미를 깨달아간다. 


문제는 인간의 의식이 자기 스스로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한다. 이른바 자의식이 생긴 인간은 생존과 번식의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알게 된다. 부족 간 전쟁이 일어나면 서로를 죽여야 하고 남자들은 다른 부족의 재산과 여자를 빼앗는다. 


인간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방법을 찾아낸다. 고통만을 위한 고통을 만들어 같은 인간을 고문한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본 인간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그저 무가치하고 비열하며 한심하고 부끄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자신보다 개나 고양이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기도 한다.


우리는 “당신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 말은 자신과 타인의 나약함과 추악함을 의식하게 된 비극에도 불구하고 가족, 친구, 연인을 대하듯 자기 자신을 챙겨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 스스로의 약점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어야 삶을 긍정하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혼돈이 얼굴을 드러낼 때 우리는 말을 통해 혼돈을 바로잡고 질서를 다시 찾을 수 있다. 정확하게 말을 하면 어떤 것이든 분류하고 정돈해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법칙 10.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라)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생각하지 못한 힘든 일이 생긴다. 그런 상황이 되면 세상은 지금까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삶은 제자리를 잃고 방황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다투는 일이 많아지고 서로를 믿지 못하고 심하게는 경멸하는 감정까지 느끼게 되면 부부 관계는 파경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된 부부도 어쩌면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수없이 많은 대화를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존재 방식에 대해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를 하려면, “비참하고 위험한 가능성의 두 형태, 즉 혼돈과 지옥”을 감수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삶이 정체되고 혼탁해지는 데도 막연하고 모호한 태도를 고집한다. 어쩌면 그건 두려운 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성경 속 하나님은 완전한 혼돈의 상태에서 “말씀”으로 질서를 이끌어내어 우주를 만들고 생명을 창조하셨다. 그 말씀은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언어와 수학으로는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완전한 질서를 만들어냈다. 태양과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와 태양계가 포함된 은하, 그리고 수없이 많은 다른 은하들까지 신의 말씀대로 운행하고 있다. 그를 닮아 창조된 우리 인간도 분명하고 정확한 말을 통해 혼돈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려고 시도하면 불확실한 덩어리 속에서 명확한 무언가를 끄집어낼 수 있다. 삶의 혼돈을 직시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분명하고 정확히 말해야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쉬운 길을 선택해서 원하는 것을 갖는 것보다, 어려운 길을 선택해서 의미 있는 것을 갖는 것이 훨씬 낫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뭔지 우리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 의미를 찾았다는 것은 혼돈과 질서의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삶의 모든 요소가 최적의 상태에 놓여 있을 때 의미가 생겨난다.”(법칙 7.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20세기에 일어난 전쟁과 이념 충돌로 많은 이들이 죽고 고통을 당해야 했다. 부패한 귀족계급과 종교를 대체하겠다고 나온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우리 사회를 더욱 고통스러운 지옥으로 만들었다.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은 말할 것도 없다. 현실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하고, 악한 누군가가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던져진 상황 속에서 극악한 짓을 할 수 있다.


의미는 혼돈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 해독제다. 더 나은 삶, 불필요한 고통과 아픔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삶을 지향할 때 삶을 지속하는 힘이 생겨난다. 현재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하루하루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는 주변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변화와 가능성의 혼돈과 의지와 절제의 질서 사이에 균형이 생기고 주위의 모든 것이 힘을 합하여 그를 돕는다.



생각해보면 나의 회사 생활은 꽉 짜인 질서에 매인 것이었다. 위에서부터 단계적으로 지시가 내려오고 내가 정리한 자료는 동일한 단계를 거쳐 보고된다. 완벽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완벽한 결과물이 보람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다. 어느 하나를 해내면 다른 일이 주어지고 그렇게 조금씩 더 어렵고 힘든 일이 주어졌다. 


회사 밖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또 새롭게 적응해야 할 혼돈의 세상이다. 언제든 회사 속 질서를 떠나 혼돈과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두려웠다. 어느 순간 난, 회사 안과 밖의 경계선 위에 계속 서 있기만 했다. 머리와 얼굴은 밖을 향하고 있지만 몸은 안쪽에서 주어진 일을 헉헉대며 해내고 있었다. 그 몸은 회사에 적합한 가면을 만들었고 나는 두 얼굴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깨달은 건 40대 중반이 넘어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기업에서 나가면 추운 현실에 직면한다고들 한다. 실제로 그렇다. 난 대기업이 아닌 곳에서 살아가는 직원들의 삶을 보았고 나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춥다는 건 냉혹한 현실을 몸으로 느낀다는 것이고 혼돈 속에 헤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살아있는 것이다. 안정적이고 질서만 가득한 곳에서는 아무런 발전이 없다. 그저 버티는 삶일 뿐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어차피 한 번 살아가는 것인데 우리 삶의 실체를 직시하지도 못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부유하게 살았다는 것만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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