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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i Sep 06. 2021

켈리 레이카트의 <퍼스트 카우>(2019)를 보고



https://youtu.be/SRUWVT87mt8

*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A24가 배급을 맡았다), <퍼스트 카우>(2019)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  “새에겐 새집이, 거미에겐 거미집이, 인간에겐 우정이(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를 인용하며 시작한다. 곧 화면이 밝아지고, 거대한 증기선 한 척이 허드슨 강을 지나간다. 

증기선의 전체 모습이 스크린에 등장하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다. 영화는 외려 증기선의 부분적인 모습(쇼트가 처음 시작될 때 등장하는 배의 앞부분과, 스크린의 끝을 관통하여 사라지는 뒷부분을 포착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을 소모한다. 뒤이어 한 소녀와 개가 등장한다. 소녀는 강변으로 보이는 땅을 파헤쳐서 두 개의 유골을 발견한다. 이 과정에서 소녀의 시점은 거의 제공되지 않는다. 소녀가 땅을 파헤치는 순간이나, 양손으로 들어올리는 해골의 둥그스름한 모서리를 통해,  그가 바라보는 광경이 '무엇'일지 짐작할 뿐이다.  

한 사물이나 형상의 '조각', 혹은 '부분'만을 포착하는 제스처는 <퍼스트 카우>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된다. 즉 우리는 이 영화에서, '전체의 형태'보다 '형태의 부분'을 더 자주 목격한다. 우리는 인물들의  시점을 거의 확인할 수 없으며, 그들이 행위하는 전반적인 과정 역시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많은 경우, 영화는 그 과정을 관객들의 유추에 내맡긴다. 이야기의 전환점이 되는 킹 루(오리온 리 분)의 추락 장면이 특히 그렇다. 예컨대 우리는 쿠키(존 마가로 분)의 어깨를 타고 나무 위로 올라가는 킹 루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가 추락하는 순간 역시도 소리로 암시될 뿐, 외화면 상에는 등장하지 못한다.  관객들은 스크린 너머에서 그들이 벌인 움직임을 끊임없이 짐작하고 또 상상할 수밖에 없다.

<퍼스트 카우>의 화면은 대부분 고요한 고정 상태에 있다. 인물들은 멈춘 화면 속을 서서히 지나간다. 카메라는 물리적인 '이동'이 가장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순간에만 움직인다. (처음 킹 루의 거처에 방문한 쿠키가 조심스레 바닥을 쓸면서 집을 청소하는 장면, 또는 팩터 대령(커비 존스 분)의 집에 방문한 두 사람이 창문 밖을 이동하여 집 안으로 가까워져 오는 장면 등)

고정된 화면 안에서 관객들이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정지에 가까운 느린 움직임들이다. 배가 지나가고, 물결이 철썩거리고, 식물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이른바 "서부 개척 시대"를 접할 때마다 흔히 떠올리던 역동적인 순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금광을 찾아서 오리건 주에 들어온 사내들의 "거친 모습"-갑작스런 몸싸움, 총격전, 말을 타고 벌어지는 추격 등-을 최소한으로만 암시된다. 대신에 영화는 개척 시대의 변두리에서 자신의 생존을 이어 가려는 미국 요리사 쿠키와 이방인 킹 루의 일상적인 행위를 끈덕지게 좇는다. 그들이 청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소의 젖을 짜고, 빵을 만들고, 그것을 먹는 과정들 말이다. 실제로 그 과정이야말로 쿠키와 킹 루가 마주하는 '서부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미국의 영화 속에서 서부란 지형적 위치를 넘어, 시대적 가치를 의미한다. 한 때는 서부에 모든 희망이 모여 있었다. 서부에 제대로 도달한 사람들은 로데오라도 하듯성공을 거머쥐고, 행복을 붙들어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서부는 근대의 미국이 가지고 있던 가치를 보다 밀집하여, 매혹적으로 전시했다. 그곳에서 미국의 터프한 남성-영웅들은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증명하여 이에 마땅한 전리품을 획득했다.

물론 서부에 대한 환상은 허물어진 지 오래다. 이제 우리는 '서부극'을 하나의 명징한 장르로만 취급한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벌어진 '서부주의 수정극' 영화들, 혹은 '스파게티 웨스턴'의 등장이 이를 증명한다.

시대의 중심에서 밀려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퍼스트 카우>는 두 편의 근사한 서부극을 떠올리게 한다. 니컬러스 레이의 <쟈니 기타>(1954)와, 로버트 알트만이 감독한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1971)가 그것이다. 전자와 후자는 모두 서부극의 정중앙에 굳건히 서 있던 남성-영웅을 변방으로 쫓아낸다. 

<쟈니 기타>의 제목을 담당하던 쟈니(스테링 하이든 분)은 그의 연인 비엔나(조앤 크로퍼드)와 엠마(머세이디드 매케임브리지)의 대립을 구성하기 위한 초석으로 기능한다. 이 영화에서 내러티브를 끌고 가는 것은 남성들의 세계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한 두 여성의 애증 섞인 대립이다. <쟈니 기타>의 서부 남자들은, 이들 여성-개인에 반응하는 기제로써  기능한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에 등장하는 '서부인'들도 마찬가지다. 워렌 비티가 분한 맥케이브는 일견 개쳑의 시대에 제대로 어울리는 남성 그 자체로 보이나, 스스로 말하듯 "가슴 속에 시를 품은" 남자이므로  차차-혹은 필연적으로-패배의 길을 걷는다. 맥케이브가 자신-가슴 속의 시-을 이해해줄 수 있는 인물이라 유일하게 생각한 밀러 부인(줄리 크리스티 분)은 자신의 삶이 일찌감치 자본의 규율에 귀속되었음을 안다. '서부'의 환상이 끝난 시대의 '서부인'(여성과 남성을 모두 포함한다)들에게는 패배 혹은 죽음과 같이 적요한 일상의 되풀이만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퍼스트 카우>는 두 편의 영화와 전혀 다른 구성을 선보인다. 이 영화에는 팽팽한 대립의 순간도, 남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구성하는 여성들도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두 명의 결핍된 존재들이 등장한다. 쿠키와 킹 루는 서부의 남성들-혹은 남성이라면 무릇 가져야 할 자격을 박탈당한 인물이다. 한 사람은 요리(!) 외에는 별 능력이 없고 하고, 또 한 사람은 백인 사회 내의 철저한 이방인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시작점은 <쟈니 기타>나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속 남성들이 갖던 시작점보다 훨씬 열악하다. 그들에게는 싸울 기술도 없고, 거대 자본의 본격적인 거래 상대로 대우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격(인종) 역시 없다. 이토록 척박한 환경에서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들만의 안전한 구역을 만들거나, (위협적이지 않은)소규모 '사업'을 지속하는 정도다. 따라서 둘은 그렇게 한다. 그들은 비스킷을 만들고 판매한다.

그들의 사업의 근본, 다시 말해 비스킷이라는 만들기 위해서는, 귀중한 재료(우유)가 필요하다. 우유는 암소만이 만들 수 있다. 다행히 그들 주위에는 암소가 한 마리 있다. 그들이 가진 암소는 아니다. 그는 오리건 주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팩터 대령의 '소유물'이다. 암소는 오리건 주로 건너오는 사이 송아지와 수소를 모두 잃었다. 그는 젖을 무사히 생산할 수 있다는 조건 아래 관리된다.  쿠키와 킹 루는 바로 이 우유를 중도에서 가로채어 비스킷을 제작한다. 그들의 사업은 법을 어기는 일, 즉 도난에 기초를 두고 있다.  금과 화폐-상품과 거래로 유지되는 이 땅에서, 그들이 저지른 일은 도난 그 이상의 것이다. 쿠키와 킹은 이제 서부에 미달하는 존재들이자, 철저한 죄인이다.  

<퍼스트 카우>는 이 죄인들이 어떻게 '죄인을 만드는 규칙'에서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아왔는지 묘사한다. 사실상 두 사람의 범죄 현장(쿠키가 소젖을 짜고 킹 루가 망을 보는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세 차례 등장한다)은 영화 내에서 가장 많은 대화가 오가는 순간이기도 하다. 쿠키는 대부분의 사람을 꺼려하나, 암소에게만은 평생지기를 대하듯 친밀한 태도로 말을 건다. 그는 젖을 짜는 과정에서 암소의 등을 쓰다듬고, 안부를 물으며, 감사와 사과를 전달한다. 그 순간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은 소젖을 짜는 사내의 실루엣이 아닌, 동물의 외피와 그 질감-또한 자신 곁에 앉은 사람을 말끄러미 바라보는 소의 눈동자다.

물론 암소와 쿠키의 관계는 전혀 평등하지 않다. 사실상 이것은 일방적인 착취 관계다. 쿠키는  어떤 대가도 없이 소젖을 짠다. 암소는 그에게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실상, 이들의 관계는 거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암소는 서부의 규칙과 전혀 다른 세계에 위치하며,  그 땅에서는  자본의 규율 따위는 없다.  그들의 관계는 한없이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이며, 그 탓에 가장 진실한 감정을 주고받는다.  

이 불합리성과 비효율성은 쿠키와 킹 루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들은 영화 내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 주고받는다. 그들의 첫만남에서, 쿠키는 킹 루에게 옷과 담요-그리고 잘 곳을 내준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킹 루가 쿠키에게 술과 거처를 제공한다. 그들은 물질과 장소를 서로에게 번갈아 제공하나, "대가를 달라"거나 "빚을 졌다" 등의 표현은 일절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서로의 시간을 공유한다. 일상적인 행위를 되풀이하고, 공동의 장소를 가꾸고, 장래를 공유하며 상대의 삶에 조심스레 녹아든다.  빚과 대가가 없는, 그리하여 터무니없는 이 관계는 우리를 다시 오프닝 시퀀스로 데려다 놓는다. 이름 모를 소녀가 발견한, 나란히 누운 한 쌍의 유해로 말이다. 

영화는 그들의 최후를 끝내 공개하지 않는다. 관객에게 남은 선택지는 유추 뿐이다. 이번 유추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첫머리에 등장한 블레이크의 인용구를 도로 가져와야 한다. 새들은 나뭇가지와 깃털을 직접 모아서 둥지를 짓고,   거미는 자신의 몸에서 실을 자아내 망을 만든다. 그들에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새에게 새집이, 거미에게 거미줄이 있어야 하듯, 인간에게는 우정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먼저 필요한가?

2021.09.06 1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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