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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페르소나 논 그라타 2부 -18-

일주일 동안 정혜는 기억을 모두 잊어 버린 듯 민소진의 집에 적응했다

by proo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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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리 이장 한민수는 신효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묵고 있는 임시 숙소에 도착할 시간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 황의원님이 자네에게 필요한 것을 들어주라고 하시더군. 황의원은 아들이 하나밖에 없어. 어떻게 하기로 했나? 신효선은 고개를 숙이고 정혜를 응시하고 있었다. 잡신을 없애려면 내림굿을 통해 다른 사람이 대신 신내림을 받아야 할 거에요.

― 어떻게 할 생각인가? 방법은 있고?

― 생각해 봐야죠. 신령이 잘 깃 드는 그런 존재여야 해요.

당장 찾을 수 있는 대상은 정혜 밖에 없다. 신효선은 대구로 내려가지 않고 2주 정도 근처에서 지내며 상황을 파악해 보기로 했다. 한민수는 황호민에게 신효선이 필요하다는 것들을 구해주었다. 신효선은 집안을 정리했다. 한민수가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부족한 것들은 많았다. 대구에서 짐을 정리하고 다시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고. 한민수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해 보았다.

― 아이 학교는 어떻게 하나? 한민수가 걱정되듯 물었다. 그의 시선은 한정혜에게 쏠렸다.

― 집에서 공부를 시키는 방식으로 했죠. 정원 외 관리자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돼서 같이 온 겁니다. 다른 말씀은 하지 마세요. 아이는 제방식대로 키우는 것으로 동의하셨습니다. 비밀이 새어 나가는 것도 원치 않아요.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 알고 있네....... 한민수의 표정은 좋지 않아보였다.

― 아이는 민사장 댁에 잠깐 맡기는 게 어떻겠나? 내일 일단 출발할 것이라고? 그럼 내가 내일 다시 오지. 정혜는 마당에 앉아 있었다. 작은 새가 마당에 들어와 먹이를 쪼아 먹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정혜는 이곳으로 오는 도중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나이대의 아이라고는 생각이 잘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 없었고 성숙한 느낌이다. 그날 저녁을 먹은 후 신효선은 갑작스런 가슴통증을 호소했다. 무엇인가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리를 지르며 그녀는 가슴을 감싸 쥐고 마루 바닥에 쓰러져 몸을 뒤틀었다. 정혜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이는 침착했다. 이 상황을 몇 번 경험했다. 정혜는 신효선의 휴대폰을 들고 통화 목록을 눌렀다. 한민수가 전화를 받았다. 정혜의 말을 듣고 그는 깜짝 놀라 119에 전화를 걸었다. 신효선은 종합병원으로 옮겨졌다. 한민수는 정혜를 태우고 도립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신효선은 심근경색 진단을 받고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다행이 수술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이 났을 것이라고 의료진은 그녀와 한민수에게 말했다.


― 가자. 한민수는 한정혜를 태우고 병원을 나섰다.

― 네 신엄마는 며칠쯤 있어야 할 거야. 너 혼자 있을 수 있니? 밥도 먹어야 하잖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정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 너 말을 못하는 아이는 아니지? 한정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어쩐다. 그는 중얼거렸다. 한민수는 고민 끝에 민형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형수는 고민 끝에 며칠간이라도 일단 아이를 잠깐 돌봐주는 것을 허락했다. 자신도 딸이 있고 한민수가 어렵게 부탁한지라 마냥 거절할 수는 없었지만 그 아이를 보는 게 편하지 만은 않았다. 한민수는 정혜를 데리고 민수형의 집으로 향했다. 붉은색 대문을 열고 둘은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다.


― 이 아이인데. 그는 인사를 시켰다. 정혜는 꾸벅 인사를 했다.

― 저기 빈방이 있습니다. 민형수가 한정혜를 방으로 데려갔다. 아이를 다시 살폈다. 그 나이또래의 아이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민형수는 한민수의 표정을 살피고 눈치를 챘다. 10여 년 전 일본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황호민 일가를 위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아니 돈 때문이었다. 그에게 염치는 아직 남아 있었다.

― 학교는 다니지 않는다고 하네. 집에서 가르쳤던 모양이야. 민형수는 소진이를 불렀다.

― 소진아, 인사해 한정혜라고 한다. 며칠간 싸우지 말고 친구로 잘 지내. 그는 소진이에게 당부 했다.


형제가 없던 민소진은 친구가 생겨 좋아하는 눈치였다. 지난번 보았던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민수는 사정을 좀 더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신효선은 병원에 입원해 있고 며칠간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진이 학교에 가고 민형수와 그의 아내가 공장에 나간 사이 정혜는 아침을 먹고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처음 보는 바다였다. 그녀는 천천히 시멘트로 이뤄진 길을 따라 바다 방향으로 향했다. 그녀는 블랙홀 같은 검푸른 거대한 질량에 빨려 들어가듯 걸었다. 걸을수록 기묘한 냄새가 더 진해졌다. 그녀는 이게 바다 냄새라고 생각했다. 푸른색과 대비되는 거대한 검은 형체의 바위는 왼쪽에 있었다. 바위는 정혜의 시선을 압도했다. 정혜는 한 번도 바다를 본적이 없었다. 냄새와 소리에 이끌리듯 바다로 정혜는 바다로 걸어갔다. 언덕을 내려가자 이번에는 갈대가 펼쳐졌다. 어른 키보다 높은 갈대가 시야를 가렸다. 갈대를 가로지르자 바다가 그녀를 품어주는 것 처럼 맞이해 주었다. 저 멀리 펼쳐진 푸른색을 시야에 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을 괴롭히고 따라다녔던 소리와 희미한 형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정혜는 갑작스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가끔 떠오르는 기억이다.


작은 골목 사방이 담벽으로 둘러 쌓인 곳에서 선명한 붉은 깃발이 늘어서 있는 그곳에 앉아 있었고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정혜는 그 손을 잡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자신을 데려간 신엄마가 신효선이었다. 실제의 기억인지도 불분명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것이 전부였다. 친엄마가 누구인지. 왜 자신이 신엄마인 그녀와 살게 되었는지 얘기해 주는 사람은 없다. 신엄마가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은 맞지는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감정은 없었다. 그녀는 따듯하지 않았다. 엄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들리는 목소리의 내용을 알려주면 신 엄마와 사람들은 그 말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의 말을 잘 들으면 하루하루는 평범하게 흘러갔지만 조금이라도 떼를 쓰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신경질과 화를 냈다. 하지만 민소진의 집에서 며칠을 보내며 정혜는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삶은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민소진의 집은 차갑고 서늘한 신효선의 법당과는 달랐다. 오후시간이 되자 소진은 가방을 메고 다녀왔다는 말과 함께 집으로 들어섰다. 민소진은 멍하니 마당에 앉아 있는 한정혜에게 사탕을 내밀며 손을 잡았다. 소진은 정혜가 좋았다. 그녀가 이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왠지 모르게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졌다. 아이의 세계는 그 간극이 크지 않다. 둘은 그렇게 며칠 동안 자연스레 어울리기 시작했다, 소진이 학교에 다녀온 뒤 둘은 근처 바닷가를 같이 걸었다.


― 엄마는 어디가 아프대? 민소진이 물었다.

― 가끔 가슴이 답답하고 뭔가 누르는 것 같이 아픈 느낌이래. 며칠 후에 퇴원하면 대구로 갈 것 같아. 우리 엄마는 아냐.

― 그래? 엄마가 아니면 왜 같이 있어? 아빠는? 민소진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 나도 잘 모르겠어. 기억이 안나.

― 네가 한 씨면 아빠도 한 씨 아냐? 민소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들이 올라온 것은 선녀 바위였다. 밀어주고 끌어주며 이들은 바위 정성까지 올라가 만세를 부르며 소리를 질렀다. 마주보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소진은 날카로운 바위 끝 난간위로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정혜가 그런 소진을 말렸다.


― 그런데 대체 여기 와서 뭘 하는 거야?

― 신엄마를 도와주기도 하고 어떤 존재가 나한테 말을 하는 것 같아. 그럼 그걸 들어서 알려 달래. 신 엄마는 나한테 뭔가 그런 기운이 있다고 했어. 그게 어지러운 느낌이 들고 차가운 공기가 내려오는 순간이 있어. 그리고 누군가 기계음 같은 목소리를 내거든. 그럼 그것을 큰 소리로 말해 주는 거야. 정혜는 신기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소진이 귀여워 보였다.

― 그럼 나한테서도 뭔가 보여? 민소진이 말했다.

― 아니. 보일 때가 따로 있어. 어떨 때는 여러 명이 말을 해줄 때도 있고. 그럴 때 천천히 하라고 해. 평상시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뭔가 얘기가 시작되면 머리가 되게 아플때가 많아. 신호인거지. 아. 뭔가 어떤 존재가 나한테 말을 하는구나. 이렇게 돼. 너한테 혹은 너의 가족한테 뭔가 보이면 알려줄게. 사실 나도 왜 나한테 그런 것들이 보이는지 잘 모르겠어. 한정혜는 방긋 웃었다. 민소진은 그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 보인다 생각했다. 소진의 집은 따뜻했다. 소진은 잘 웃었다. 활발하고 자신감이 넘쳐있었다. 정혜는 며칠간 그 집에서 머문 시간이 소중했다. 자신에게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신효선은 병원에서 나온 뒤 대구에 들러 숙소로 돌아왔다. 황정우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한 약속에 대한 부분도 확정을 지어야 했다. 신효선은 한민수에게 전화를 걸어 준비를 해 왔으니 며칠 후 굿을 진행할 수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의 일을 도와줄 몇 명을 대구에서 섭외한 것이었다. 특히 이번 굿은 정성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정혜의 역할도 중요하다. 먼저 정혜가 그 과정을 버터야 하는 것이다. 신효선은 숙소로 돌아온 뒤 짐을 정리하고 정혜를 찾아 나섰다.


― 계세요?

그녀는 붉은 대문 집을 살짝 밀어 내부를 확인했다. 아무도 없나? 일주일 동안 정혜는 기억을 모두 잊어 버린 듯 민소진의 집에 적응했다. 민형수도 정혜가 머물 때는 자신의 딸과 같이 아이를 편하게 대해 주었다. 오후 늦은 시간 저 멀리서 두 아이가 서로 웃으며 마주보고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정혜였다. 신효선은 대문 앞에서 멀찍이 떨어져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아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서로 웃으며 앞서거니 뒤서 거니를 반복하며 웃고 있었다. 정혜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 소진아. 천천히 가. 정혜가 그녀를 불렀다.

정혜가 웃으며 소진에게 소리쳤다. 정혜는 진돗개 마루를 목줄로 산책시키고 소진은 그 뒤를 따랐다. 둘 사이의 관계는 가까워져 있었다. 그때 문득 정혜는 갑자기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

정혜가 낮은 소리를 냈다. 신 엄마? 신효선은 정혜를 노려보고 있었다.

― 가자. 그녀는 다짜고짜 정혜를 끌어 당겼다.

― 아냐. 싫어. 여기 더 있을래. 정혜는 소진의 팔을 잡아 당겼다. 신효선에게서 불길한 기운을 느낀 듯 그녀를 멀리했다.

― 뭐? 무슨 소리야. 빨리 짐 챙겨 다시 숙소로 가야해. 너 해야 할 것이 있어.

― 아냐. 더 이상 그 얘기 듣는 것은 하기 싫어. 정혜가 소리쳤다.

― 따라와..... 신효선은 정혜를 끌어 차에 태웠다.

― 정혜 물건 좀 챙겨 줄래? 정혜는 체념한 듯 뒷 자리에 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저기. 며칠 더 있으면 안돼요? 아빠 엄마도 허락하셨는데요. 소진이 말했다. 소진은 눈물을 글썽이는 정혜를 보고 있었다.

― 왜? 여기서 평생 살게? 안 되는 것 너도 알거 아냐?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네 물건 챙겨와. 아님 내가 들어가서 가져갈까? 신효선은 정혜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후 소진이 물건을 챙겨 신효선에게 건내 주었다. 뱀이 먹이를 낚아 채 듯 소진의 손에서 물건을 집어 트렁크에 던지듯이 실어버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정혜는 그녀가 자주 하는 말을 떠올렸다. 어디서 작은 게 건방지게......그 음성이 공기를 떠돌았다. 흐릿한 하늘에서 빗방울 몇 개가 떨어졌다. 차는 천천히 시멘트 길을 웅웅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신효선이 묶고 있는 갈매리의 숙소는 민형수의 집에서 20분 정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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